소설리스트

가르쳐 주세요 선배-48화 (48/81)

제48화

한국으로 돌아온 날 밤.

대충 짐을 정리하고 나서 소파에 앉아 함께 찍은 사진을 보았다.

일주일 동안 참 많은 추억이 쌓인 기분이었다.

“아, 로건이 네 머리 위에 뿔 만들었어!”

“대체 언제…….”

“로건은 윤기 네가 정말 좋은 모양이야. 여기 봐, 여기서도 네 옆에 있네.”

시호에게는 아멜리아와 보라가, 윤기에게는 로건이 찰싹 붙어 다녔다.

[윤기, 나 한쿡 가묜 빙대떡 가치 먹어 줄 꺼지?]

[왜 빈대떡을…….]

[윤기하테 빙대 붙을 거니까. 와하하하하.]

[…….]

로건의 시끄러운 웃음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하여, 윤기는 지친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한국에는 되도록 늦게 초청했으면 합니다. 아직도 귀가 먹먹한 기분이에요.”

“하하. 네가 굳은 표정으로 슥 쳐다보면 다들 무서워서 떨어지는데. 아마 수원이도 그렇게는 못 할 거야. 친화력이 너무 좋던데?”

“친화력이 좋다기보다는. 치근대는 것을 잘한다고 하는 쪽이 더 맞을 겁니다.”

마치 로건이 함께 있기라도 한 듯 윤기는 피곤하단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2박 3일 내내 로건이 졸졸 따라다니는 통에 윤기의 눈 밑이 조금 퀭해질 정도였으니까.

게다가, 남은 3일 동안 자신이 밴쿠버 가이드를 해 주겠다며 수선을 피웠다.

[절대 안 돼.]

그러나 윤기가 특유의 날카로운 눈빛으로 완강한 거부 의사를 밝혔을 때는 제아무리 로건이라도 깨갱, 물러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덕분에 시호와 윤기는 무사히(?) 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다들 너무 보고 싶다. 같이 운동을 해서 그런가, 짧은 기간이지만 정이 많이 들었어.”

시호가 문호검도장 사람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들여다보며 그리운 듯 말했다.

윤기가 그녀의 손에 들린 휴대폰을 살짝 빼냈다.

“응?”

시호가 의아한 듯 바라보자.

“다른 사람 그만 보고. 이제 나 좀 봐 주지?”

윤기가 그녀를 들어 올려 제 허벅지 위에 앉혔다.

“내일부터 바로 일정 있죠?”

“으응…….”

“그럼 오늘이 끝날 때까지는 아직 여행 중인 것으로 하죠.”

엄지로 시호의 입술을 지분거리던 윤기가 그녀의 귓불을 살짝 물었다.

여린 몸이 바르르 떨렸다.

윤기는 시호를 끌어안고 소파 위로 천천히 눕혔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고 있는 그녀의 젖은 눈빛에 윤기의 몸이 뜨거워졌다.

“키스하고 싶어.”

그의 말에 시호가 손을 뻗어 윤기의 뺨을 감싸 제게로 내렸다.

말랑한 입술이 겹쳐지며 서로를 달콤하게 머금었다.

***

어젯밤, 그대로 입술을 겹친 채 소파에서 몸을 섞었다.

계속해서 저와 눈을 맞추며 격렬하게 움직이던 간밤의 윤기를 떠올리니 시호의 몸이 다시 뜨거워졌다.

“선배, 아직입니까?”

회상에 빠져 있던 시호는 화들짝 놀라며 말을 더듬었다.

“아, 아니. 지금 나가.”

샤워를 마친 시호는 캐나다에서 사 온 커다란 단풍 무늬가 프린트 된 티셔츠 한 장을 걸친 채 밖으로 나갔다.

“오늘부터 다시 일상 시작이네.”

시호가 팔을 위로 쭉 들어 올려 기지개를 켰다.

“머리 말려 드리겠습니다.”

“내가 해도 되는데.”

“제가 하고 싶어서요.”

그녀를 스툴에 앉힌 윤기가 드라이어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말리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손길에 몸이 금세 노곤해졌다.

“엄청 좋다. 피로가 싹 풀리는 것 같아.”

“대학 다닐 때 스포츠마사지 수업 들으면서 자격증 취득해 놨습니다.”

“어쩐지. 예사 손길이 아니네. 어제 안마해 줄 때도 엄청 좋았는데 그 말도 못 하고 잠들어 버렸어.”

연속으로 두 번이나 사랑을 나눈 후, 기진맥진하여 엎드린 시호의 위로 올라간 윤기는 그녀의 몸을 천천히 풀어 주었다. 어찌나 시원하고 좋던지 그만 까무룩 잠이 들고 말았다.

“좋다. 마사지 받으면서 잠들고. 눈 뜨니까 네 품이고.”

시호는 윤기에게 몸을 맡기고 기분 좋은 얼굴로 눈을 감았다. 아아, 이래서 다들 안마 의자를 사는 건가? 하지만 그것도 기윤기만은 못할 것 같다.

이렇게 잘생기고 따뜻하고 시원한 곳만 꾹꾹 눌러 주는 안마기기는 없을 테니까.

“행복하다.”

드라이어의 백색 소음이 별안간 뚝 끊겼다.

응? 뭐지? 눈을 뜬 시호가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아침은 간단하게 드셔야겠습니다.”

“나야 좋지. 근데 왜 갑자기…….”

“시간이 부족할 것 같습니다.”

“시간? 늦었어?”

“빨리 하지 않으면 그럴 것 같군요.”

해? 뭘? 시호가 묻기도 전에 몸이 번쩍 들렸다.

“어어?”

순식간에 시호를 침대 위에 눕힌 윤기는 정염에 물든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드러난 하얀 허벅지를 손으로 쓸어 올렸다.

“가르쳐 주세요, 선배.”

“앗…….”

“선배가 얼마나 행복한지.”

커다란 손이 옷 안으로 들어갔다.

“알려 줘, 시호야.”

그의 눈에서 이성이 밀물처럼 빠져나갔다. 시호의 안으로 둔탁한 압박감이 밀려왔다.

그날, 아침 식사는 유례없이 짧았다.

***

“오늘은 일정이 어떻게 되십니까?”

“무영단 마크 제작이 완료됐다는 답변이 와서 강남에 있는 스튜디오에 가 보려고. 올라간 김에 용진 선배 만나서 마케팅팀 직원 면접도 보고, 주문한 비품 잘 제작되고 있는지도 체크하고.”

“피곤하겠습니다.”

“전혀. 하는 일 없이 집에만 틀어박혀 있는 것보다 훨씬 행복해.”

결혼 생활을 하는 동안, 시호는 내 일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뼈저리게 깨달았다.

“주말에는 감독님 뵈러 산청에 내려갈까 해.”

“괜찮겠어요? 몸이 힘들 텐데.”

“이 정도로 지치면 안 되지.”

“만약 거절하신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차선책으로 생각해 둔 분이 있기는 한데. 그래도 임 감독님께서 맡아 주시면 좋겠어. 선수들의 장단점을 정확하게 분석해서 조언을 아끼지 않는 분이야.”

임 감독님이라면 무영단을 바른 길로 이끌어 주시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럼 이따가 보자.”

윤기와 가벼운 키스를 나눈 시호는 차에 몸을 실었다.

스튜디오가 위치한 강남에서 퇴근 시간 전에 돌아오려면 서둘러야 했다.

고속도로에 막 들어섰는데 전화가 걸려 왔다.

시호는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나야. 지금 통화할 수 있어?

“운전 중이야.”

재혁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 그렇구나. 그럼 간단히 말할게. 우리 이혼 기사는 다음 달쯤에 배포될 거야. 주주들 때문에 예정보다 좀 늦어졌어. 양해해 주기를 바라. 파일로 보낼 테니까 수정하고 싶은 부분 있으면 체크해서 줘.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나. 그렇게 생각할 때쯤.

- ……시호야. 미안하다.

시호가 멈칫했다.

- 겉으로 티가 안 나서 잘 지내는 줄 알았어. 적어도 함께 있을 땐 화목한 모습이었으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용서가 안 되겠지만…… 내 진심이야.

재혁은 다정했지만 좋은 모습만을 보고 싶어 했고, 조금이라도 갈등이 있다 싶으면 회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골치 아픈 문제는 자신이 물러나 있는 사이에 해결되기를 바랐고, 속은 어찌 되었든 겉으로 진정되었다 싶으면 그제야 다가왔다.

재료를 손질하여 음식을 차리는 고단하고 지난한 과정은 외면하다가, 다 차려진 정갈하고 아름다운 밥상에 숟가락만 얹는 꼴이었다.

- 시호 네가 하려는 일, 내가 다 지원할게. 후원금이나 물품이 필요하다면 다 제공할게. 그렇게라도 당신 마음이 풀릴 수 있다면…….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조만간 공식 위자료 외에 받았던 비공식 위자료 일체를 돌려줄 생각이야.”

- 뭐, 뭐라고?

“내가 받은 토지, 건물, 다 돌려줄게. 그걸로 우리 사이 완전히 정리하자. 더는 연락 이어 갈 일 없도록.”

- 그거 돌려주면 너 어쩌려고? 10억으로 평생 살 수 있을 것 같아? 뭐 하나 운영하려면 이것저것 품이 얼마나 드는데…….

“캐나다 제이크래프트사에서 후원받기로 했어. 우리 이혼 기사 나간 후에 기사 나갈 거야. 그걸로 확인해.”

- 제이크래프트? 도, 도대체 어떻게?!

“윤기 덕에.”

- 너 정말 기 선수랑 만나는 거야? 진지하게?

재혁의 다급한 덧붙임에 시호가 눈을 고쳐 떴다.

- 너무 빠르다고 생각하지 않아? 적어도 1년 정도는 지나고 나서…….

“사랑이 시간을 정해 놓고 찾아오는 게 아니더라.”

- 사……랑?

재혁은 충격받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나 윤기 정말 사랑해. 상처 주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이제 연락 안 해 줬으면 좋겠어. 끊을게.”

말을 하고 나니 속이 후련했다.

재혁과의 통화는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

스튜디오에 도착한 시호는 로고 완성본을 보며 흡족해했다.

“잘 나왔네요. 기대 이상이에요.”

무영단의 상징은 나비와 칼이었다.

‘無影團(무영단)’이 새겨진 칼날 끝에 나비가 앉아 있는 형상의 붉은 로고는 시호의 이미지와도 아주 잘 부합했다.

인고의 시간을 보내고 애벌레에서 나비가 되어 비상하고 싶은 마음을 담아 도안을 제안했다.

“단장님께서 워낙 명확하고 탁월한 이미지 도안을 주셔서 쉽게 제작했습니다.”

시호는 로고 패치를 눈높이까지 들어 올렸다. 도복 오른쪽 소매 중간에 새기면 아주 멋질 것 같다.

‘윤기 도복에 먼저 대 볼까.’

시호가 손에 쥔 패치를 흔들었다.

“이 테스트용, 제가 가져가도 되죠?”

“그럼요.”

패치를 가방에 넣은 시호는 스튜디오를 나온 뒤 용진과 만나기로 한 카페로 향했다.

태블릿으로 스카우트를 제안할 선수들의 영상을 보고 있던 시호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선배, 여기.”

반갑게 손을 흔든 용진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야, 깜짝 놀랐다. 갑자기 캐나다를 간다고 해서.”

“약속 미뤄서 미안. 중요한 일이 있어서.”

그녀가 가져온 쇼핑백을 건넸다.

“자, 선물. 기념품이야. 언니 거랑 도윤이 것도 같이 넣었어.”

“오오, 땡큐! 미연이랑 도윤이가 좋아하겠다. 그런데 뭐 보고 있어?”

“서현시청 도진영 선수. 입단 제안해 볼까 하고.”

“서현시청이면 도진영보다는 주건희 선수가 괜찮은데. 화려한 플레이를 하는 선수는 아니지만 기복 없이 꾸준해. 도 선수는 화려하지만 뭐랄까. 너무 시선을 의식한다고나 할까?”

오호. 시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코치님 의견 참고할게.”

“맞다. 이번 달까지 검도장 정리하고 연교 내려가기로 했다. 도윤 엄마랑 얘기 끝냈어.”

“정말?”

“응. 네 말대로 연교는 교육열도 높고 인프라도 잘 갖췄고 숲세권이라서 마음에 든대. 사택 제공이라는 말에 눈 뒤집히게 좋아하더라.”

용진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검도장 적자라서 몇 달째 힘들었거든. 현재 살고 있는 집도 오래돼서 불편한데 이사할 형편이 안 됐고. 고맙다.”

“내가 더 고맙지. 어려운 결정 해 줬는데. 그럼 계약서 작성하자.”

“가져왔어?”

“구두계약만 하니까 불안해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아이고, 우리 단장님, 그러셨습니까? 예예, 당장 사인하겠습니다요.”

용진이 장난을 치며 시호가 내민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안 살펴봐? 무작정 사인을 하면 어떡해.”

“서시호가 뭐 사기라도 치겠어?”

“언니가 들으면 기절하겠네.”

“미연이도 너라면 뭐든 다 오케이래. 집에 한번 놀러 와. 미연이가 너 보고 싶댄다. 도윤이도 검도 이모 뭐 하냐고 가끔 묻고.”

“나도 언니랑 도윤이 보고 싶네. 그럼 계약된 겁니다, 이 코치님?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월급 주시는 분께 제가 더 감사드리지요. 후배님 밑에 납작 엎드려 붙어 있겠습니다.”

그들은 마주 보며 웃었다.

“이야. 앉은 지 몇 분 만에 내 인생이 완전히 생각지도 못한 곳으로 흘러가 버리는구만.”

용진의 말에 시호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게 인생이더라.”

그가 눈을 고쳐 뜨고 시호를 보았다.

“한 50년은 살아 보신 분 같습니다?”

“지난 일주일이 딱 그만큼이었던 것 같아. 희로애락을 다 느꼈거든. 그리고 선배, 우리 검도단과 확실히 계약하기로 한 선수가 있는데.”

“누구? 나도 아는 사람이냐?”

“기윤기.”

“콜록콜록! 뭐? 기, 기윤기?”

냅킨으로 입가를 닦던 용진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설마 국대 기윤기 말하는 거야?”

시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 기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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