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화
남자가 손을 치켜든 찰나.
시호의 손에 들린 죽도가 그의 허리를 빠르게 치며 나아갔다.
“와우!”
“옴총나게 스피디해!”
“벙개 같아, 벙개!”
사방에서 감탄사가 터졌다.
제이슨이 흰색의 깃발을 들어 시호의 승리임을 알렸다.
“백, 승!”
죽도를 거둬들인 두 사람은 오른발부터 다섯 걸음 뒤로 물러난 뒤, 상호 인사를 하고 정좌했다.
호면을 벗은 시호가 맞은편에 앉아 있는 로건을 향해 미소를 짓자 그가 엄지를 치켜들었다.
“캡틴 호, 진쫘 검도 오래 안 한 고 마자? 나 놀라짜나! 캡틴 호 눈까리가 호랭이야!”
“어허, 로건.”
“아, 쏴리, 눈까리가 아니라 눈똥자.”
로건이 미안하다는 듯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았다. 시호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내 자신이 방금 전에 썼던 호면을 내려다보았다.
쿵. 쿵. 쿵.
그렇게 격하게 뛰어다닌 것도 아닌데, 여전히 심장이 뛰고 있었다.
호구를 다시 쓰는 날이 오다니.
그것도 한국이 아니라 멀리 타국에서 말이다.
시호는 손으로 호면의 머리 부분을 조심스럽게 쓸어 보았다.
그런 그녀의 곁으로 윤기가 다가왔다.
“선배, 발목은 어떻습니까?”
걱정이 뚝뚝 묻어나는 눈빛과 말투에 시호가 작게 미소 지었다.
“봤잖아, 무리하지 않을 정도로만 움직인 거. 아주 괜찮아.”
“다행입니다. 혹 조금이라도 통증이 느껴지면 곧바로 말하기로 약속했습니다, 분명히.”
“알았어. 그땐 기윤기 등에 업혀 갈게.”
장난스러운 말에도 윤기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1시간 전.
눈물의 프레젠테이션이 끝난 후, 드디어 본격적인 교검이 시작되었다.
윤기는 가져온 도복으로 갈아입은 후 문호검도장 사람들에게 이론과 마음가짐에 대해 간단히 설명한 뒤, 한 사람 한 사람에 맞게 자세를 잡아 주고 조언을 해 주었다.
그런 다음 호구를 착용하고 한 명, 한 명과 차례대로 대련을 시작했다.
사람들은 사력을 다했지만, 윤기의 머리끝조차도 스칠 수 없었다.
[미스터 기, 마치 로키 마운틴 같아. 꿈쩍또 안 해.]
[수비만 하는데도 와우, 무서워.]
[코리아 국까대포는 대다내.]
모두 혀를 내두르며 윤기에게 한 수 배웠다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던 중, 아멜리아가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나 캡틴 시호도 보고 시퍼!]
그녀가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캡틴 호가 검도하는 고 보고 시퍼. 저의 싸움 신청 받아 주시게씁니까?]
시호는 당황했다. 발목 부상을 당해 은퇴한 이후로 호구를 써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멜리아의 말에 마음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열정적으로 검도에 임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자신도 그 틈바구니에 끼고 싶었다.
마룻바닥과 발바닥이 마찰할 때의 감촉.
기합을 내지르며 앞으로 나아갈 때의 쾌감.
호면 너머로 상대방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다음 공격과 수비는 어떨지 가늠할 때의 긴장감.
그 모든 것이 갑자기 생생하게 훅 다가왔다.
[……도복이랑 호구가 없는데.]
그녀의 말에 아멜리아와 보라가 반색하며 탈의실로 뛰어가 여분의 도복과 장비를 가져왔다.
미간을 좁힌 윤기가 시호의 손목을 꽉 붙잡았다.
[선배.]
[괜찮아. 천천히 받아 주는 식으로 할게.]
그래도 윤기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혹여 발목에 무리가 갈까 봐, 그럼에도 시호가 티를 내지 않을까 봐 속이 탔다.
[조금이라도 통증 느껴지면 곧바로 말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응?]
시호의 간절한 눈빛에 결국 지고 만 윤기는 그녀에게 단단히 약속을 받아 내고서야 마지못해 손목을 놓아주었다.
탈의실에서 도복으로 갈아입고 나온 시호는 조금 떨리는 손으로 호구를 착용했다.
손에 호완을 끼고 죽도를 쥐니, 순식간에 현역 시절로 되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자세를 취하자 속에서 벅찬 감각이 끓어올랐다.
그간 겁이 나서 호구를 착용하지 못했다. 예전과는 달리 아무것도 못하게 될까 봐.
또한, 발목이 또 꺾이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그녀를 막아 세웠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자신을 지켜봐 주는 윤기가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하지 못할 일은 없겠다, 싶었다.
아주 오랜만인데도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본능과 직감은 머리를 거치지 않고 시호를 움직였다.
아멜리아와 보라는 시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때 로건이 손을 번쩍 들고 대련을 청했다.
[좋아요.]
시호의 대답에 미간을 구긴 윤기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다만, 몸받음과 코등이싸움은 되도록 짧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발목에 무리가 가면 안 되어서요.]
몸받음은 자기의 몸을 상대의 몸에 부딪쳐서 상대의 자세를 흐트러뜨리고 공격의 기회를 만드는 것이다.
코등이싸움은 공격을 하거나, 공격을 가할 때 서로 죽도의 손잡이 윗부분을 맞대고 힘을 겨루는 것을 뜻한다.
둘 다 발목에 무리가 가는 기술이다.
[오케이! 돈 워리. 나도 힘 겨루묜서 시간 질질 꾸는 고 시러해.]
그렇게 로건과 시호의 대련이 시작되었다.
검도는 남녀노소 상관없이 겨룰 수 있는 운동이다. 하지만 키와 체격이 자신만큼이나 커다란 남자와 시호가 맞붙는다 생각하니 윤기는 바짝 애가 탔다.
오늘따라 시호는 왜 이리도 여리고 가늘어 보이는지.
그래서 그녀가 조금이라도 비틀거리면 언제든 받아 낼 수 있도록 신경을 날카롭게 세우며 주시했다.
하지만 시합에 들어가니 그럴 필요가 없었다.
시호는 불필요한 움직임을 전부 배제하며 로건의 공격을 모두 막아 냈고, 또 공격했다.
언뜻 보면 그 자리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는 듯했다.
마지막 허리치기를 했을 때에만 뛰어나간 게 다다.
호면을 벗고 호구를 정리하는 시호의 모습은 무척이나 즐거워 보였다.
그녀가 즐거워하는 만큼이나, 당시 시호가 느꼈을 좌절과 절망이 더욱 크게 다가왔다.
윤기는 똑같은 후회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자신이 시호의 곁에 있었더라면. 그녀에게 힘이 되어 주었다면 좋았을 텐데…….
교검 시간이 끝난 후.
제이슨과 도장 사람들은 시호와 윤기를 배웅해 주었다.
배웅이라고 해 보았자 검도장 건물 밖에 대기하고 있던 리무진에 올라타는 그들을 지켜보는 것이었지만.
“그럼 내일도 한 수 부탁드립니다. 오늘 정말로 감사했습니다. 자, 다들 인사!”
“캄사했습니다!”
“감사해요, 플레이어 키, 캡틴 호!”
제이슨을 필두로 그들이 시호와 윤기에게 머리를 숙였다. 좋은 가르침을 준 스승에 대한 존경의 표시였다.
시호와 윤기 역시 머리를 숙이며 답했다.
“혹시 밴쿠버 투어를 하고 싶으시면 정 기사님께 말씀드리면 됩니다.”
제이슨의 말에 정 기사가 미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윤기! 시호! Catch ya later!”
리무진의 문이 닫히자마자 시호가 숨을 크게 내쉬었다.
“하아아.”
그러자 윤기가 그녀의 어깨와 손을 주물러 주었다.
“많이 긴장했죠. 오늘 정말 고생 많았어요, 선배.”
“아냐. 네가 더 고생했지. 교검도 하고 나도 지켜보느라.”
윤기가 제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전전긍긍, 애타는 마음으로 지켜본 것을 잘 알고 있는 시호였다.
“고마워. 네가 옆에 있어서 용기 낼 수 있었어.”
시호가 싱긋 웃었다. 윤기가 붙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 들어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유, 윤기야.”
시호가 빨개진 얼굴로 정 기사 쪽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가 크게 웃었다.
“하하, 괜찮습니다. 저는 신경 쓰지 마세요. 저랑 제 아내에 비하면 아주 점잖으신 편인데요?”
“그렇습니까?”
윤기의 말에 정 기사가 웃는 낯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는 사람들은 그러려니 하는데, 저희를 모르는 사람들, 특히 한국인들은 백이면 백 재혼했느냐고 물어봅니다. 어떻게 몇십 년 지지고 볶은 사람들이 여즉 신혼 같으냐고요. 하하하.”
정 기사의 말에 윤기가 가만히 답했다.
“저희도 꼭 그렇게 되겠습니다.”
정 기사는 눈을 크게 뜨며 ‘워후!’ 하고 외쳤고, 시호는 입을 떡 벌리며 ‘얘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라는 얼빠진 표정으로 윤기를 보았다.
“어쩐지 두 분은 저희 부부를 능가하실 것 같은데요?”
쟤가 진짜 부끄럽게…….
시호가 곱게 눈을 흘기자 그가 씩 웃었다.
“조심히 들어가시고 내일 아침에 뵙겠습니다.”
리무진에서 내린 시호와 윤기는 호텔에 도착했다.
룸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자마자 시호가 그의 팔을 주먹으로 아프지 않게 때렸다.
“진짜! 부끄러운 말 안 하기로 해 놓고선.”
“전혀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내가 부끄러웠단 말이야, 내가!”
꼭 누구의 시선도 상관하지 않는 팔불출 남편 같았단…….
자신의 생각에 더욱 부끄러워진 시호가 성큼성큼, 윤기를 지나쳐 욕실로 향했다.
“난 씻을 거니까, 너도…….”
문을 닫으려 뒤를 돈 시호가 깜짝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어, 언제 따라온 거지?
발을 헛디뎌 넘어지려는 순간, 윤기가 그녀의 허리를 휙 감싸 당겼다.
“같이 씻어요.”
“뭐어?!”
“선배는 손 하나 까딱하지 말아요. 내가 다 알아서 해 줄 테니.”
그가 유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윤기는 시호에게 입술을 겹치는 동시에 긴 팔을 뻗어 문을 닫았다.
촉촉한 혀가 뒤엉키며 야한 소리를 냈다.
시호의 옷 속으로 손을 넣은 윤기는 그녀의 등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열기를 지폈다.
“아…….”
붉은 입술 사이로 한숨 같은 신음 한 줄기가 흘러나오자, 윤기의 단단한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스르륵. 옷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더운 열기가 한동안 가시지 않았다.
***
2박 3일 동안 문호검도장에서 교검 시간을 가진 시호와 윤기는 곧 다시 보기로 하며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캡틴 호! 나 한쿡에 가명 가치 운동할 수 있써요?”
“당연하지. 언제든 환영이야.”
“꺄아악!”
어느새 친해진 사람들과 말까지 놓게 된 시호였다.
“써시호! 싸라해!”
아멜리아가 그녀를 끌어안고 방방 뛰었다.
“저기…… 저도 인사하고 시픈데…….”
뒤에 서 있던 보라가 용기를 끌어모아 말했다. 시호가 웃으며 따뜻하게 포옹해 주었다.
“좋아해 줘서 고마워, 보라야. 한국에 오면 또 같이 운동하자.”
“꼭 갈 꺼예요…….”
“응, 기다리고 있을게.”
보라의 뒤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로건이 시호를 끌어안으려던 순간.
빛보다 빠른 속도로 다가와 시호의 앞을 가로막은 윤기가 대신 로건과 포옹했다.
“한국에 오기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마이 갓, 윤키! 싸쉴 나 조아하고 있떤 고야? 종나 짜릿해!”
“어허, 로건! 그런 말 쓰지 말라고 했잖니!”
“쏘리, 킹 소이. 기분 종나, 놉, 아주 조아서 그래써요.”
마지막까지 웃음을 선사한 로건이었다.
“서류는 일주일 후에 보내겠습니다. 부디 행복한 여행이 되기를. 캐나다에 머무는 동안 불편한 점이 있다면 언제든지 연락 주시고요.”
“감사드려요. 교검하는 동안 무척이나 즐거웠습니다.”
제이슨과 시호, 윤기는 차례로 악수를 나누었다.
맑은 하늘에 해가 쨍 빛났다.
그 빛은 시호의 마음속 어두운 부분을 밝게 비추었다.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진정한 자유를 찾은 기분이야.’
남은 3일은 윤기와 단둘이 자유 여행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스탠리 파크(Stanley Park)를 유유자적 돌아다니기도 하고, 작은 보트로 그랜빌 아일랜드(Granville Island)로 이동하여 갈매기와 사진을 찍기도 했다.
밴쿠버 전망대에 올라가서 멋진 야경을 구경하고 내려온 다음에는 펍에 가서 시원한 생맥주를 즐겼다.
돌아가기 전날, 기념품점에 들러 이것저것 사 들고 호텔로 돌아왔을 때는 어찌나 아쉽던지.
“나중에 꼭 다시 오고 싶어.”
“응, 그래요.”
윤기는 속으로 뒷말을 삼켰다.
‘다음엔 신혼여행으로 올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