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르쳐 주세요 선배-46화 (46/81)

제46화

잠깐의 정적 후.

제이슨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박수를 쳤다.

그러자 마법에서 풀려난 듯 말없이 시호를 바라보던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Oh, gosh! You′re killin′ it!(오, 당신 정말 끝내줘!) 나도 캡틴 시호 아래에 드러가고 시퍼!”

아까 윤기에게 달려들었던 아멜리아가 이번에는 시호를 끌어안으며 방방 뛰었다.

“머시써요! 나 캡틴 시호랑 훌령하고 시퍼!”

시호는 자신보다 10센티미터 정도는 더 큰 소녀(?)의 품에 폭 묻힌 채 이리저리 흔들렸다.

윤기가 눈을 가늘게 뜨고 다가오려 하자 시호가 아멜리아의 등을 두드리며 눈짓으로 그를 말렸다.

그를 눈치챈 제이슨이 살짝 웃으며 시호를 끌어안고 있는 아멜리아에게 다가갔다.

“떼끼, 이놈! 관장님이 버젓이 눈을 뜨고 있는데 말이야. 응?”

제이슨이 짐짓 화난 듯 눈을 크게 뜨고 뒷짐을 지자 아멜리아가 크게 웃으며 그를 한 번 꽉 끌어안았다.

“삐지지 마, 킹 소이! 나한테눈 제이슨이 넘버원 간장님이야!”

“그래, 내가 캐나다에서 가장 발효된 사람이다, 요놈아.”

“바료? 나 일본어 알아. 그거눈, 어, 말으 먹이라는 뜻이야. feed for horses.”

아멜리아의 엉뚱한 대답에 문호검도장 안에는 다시 한번 웃음의 파도가 물결쳤다.

제이슨이 시호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제이크래프트는 진심을 다하여 무영단을 후원할 겁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서 단장님.”

그의 두툼하고 커다란 손을 보니 울컥, 벅찬 감격이 밀려왔다.

속으로 감정을 눌러 꾹 참아 낸 시호가 이내 미소를 머금고 그의 손을 맞잡았다.

꼭 아빠의 손을 잡았을 때처럼 든든하고 따뜻했다.

“감사드립니다. 기대 저버리지 않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서 단장님께서 아픔을 드러내고 그것을 이겨내 보이겠다는 용기를 보여 주셔서 저도 용기를 내 보려고 합니다.”

제이슨의 말에 다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아는 사람은 오직 보라뿐이었다. 즐겁게 웃고 있던 보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제게 기윤기 선수 또래의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정확히 기 선수보다 세 살 아래였죠.”

‘있었습니다’라는 말에 시호는 흠칫하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어쩐지…… 슬픈 이야기를 듣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윤기가 그런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제 영향을 받아서 검도를 좋아했습니다. 프로 선수가 되고 싶다고 할 정도로요. 보라와 둘이서 손가락 걸고 맹세했었죠.”

제이슨이 빙긋 웃자 보라가 고개를 숙였다. 눈가가 금세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기윤기 선수가 SBC에서 주최하는 검도왕 대회에서 초등부 우승을 차지했을 때가 열세 살이었을 겁니다. 그렇죠?”

윤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제이크, 도영이는 무척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아이였습니다. 이민을 와서도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죠. 그런 아이가 기윤기 선수의 영상을 접한 후로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대회에 참가했던 열세 살 당시, 윤기는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상대가 자신보다 덩치가 무척이나 크고 위협적이어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러나 윤기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먼저 지쳐 버린 상대 선수가 아주 잠깐 흔들리는 순간 머리치기 한판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도영이는 체격이 작고 여린 아이였습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덩치 큰 아이들 앞에서는 기를 펴지 못했어요. 하지만 그 영상을 본 이후로는 용기와 자신감을 갖고 세상을 대하기 시작했어요.”

코끝이 시큰거리기 시작한 제이슨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

[아빠, 나는 힘들 때마다 기윤기 형아를 생각해. 그 형아도 나처럼 무서웠을 텐데 끝까지 물러서지 않고 맞서 싸워서 이긴 거잖아. 나도 그렇게 되고 싶어.]

[그래. 우리 도영이도 꼭 윤기 형아처럼 용감하고 씩씩한 선수가 될 수 있을 거야.]

[정말? 나 오늘부터 밥도 잘 먹고 수련도 열심히 할 거야!]

어린 아들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해서 제이슨이 미소를 지었다.

“도영이는 매일 기윤기 선수의 동영상을 보면서 용기를 가졌고 꿈을 키웠습니다. 친구를 괴롭히던 불량한 학생과 맞서 싸울 줄 알게 되었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 먼저 손을 내밀 줄 알게 되었죠.”

수련도 게을리하지 않아서 검도 실력 역시 날마다 일취월장했고, 자신감도 더욱 커져 갔다.

늘 윤기의 영상을 보고 연습해서 그런지 기세와 자세가 무척이나 흡사해졌다.

그래서 윤기의 영상을 보고 있으면 꼭 도영이 검도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부자(父子)는 언제나 윤기의 영상을 함께 보며 의견을 나누었다. 덕분에 사이도 무척 좋아졌다.

그렇게 몇 해가 지나고, 도영이 열네 살 되던 해였다.

그날은 눈이 펑펑 내렸고, 제이슨은 중요한 일정에 차질이 생겨서 신경이 무척 날카로운 상태였다.

[아빠, 오늘 윤기 형 영상 올라왔는데, 1분 44초 정도에 자세 분석을 같이…….]

[제이크. 아빠 지금 바쁜 거 안 보이니? 세컨더리 스쿨에 들어갔으면 이제 뭐든 혼자서 할 줄 알아야지.]

[……응. 방해해서 미안해.]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리고 나가던 뒷모습을 보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우선 급한 일부터 처리하고 나서 아까는 아빠가 신경이 예민해서 그랬노라, 사과해야지 생각했다.

나중에. 나중에 언제든지 그럴 수 있을 줄 알았다.

무사히 일을 마치고 도영이 집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제이슨에게 충격적인 비보가 날아들었다.

[제이슨! 차, 차가 눈길에 미끄러져서 보도를 덮쳤는데…… 도영이가…… 미처 피하지 못하고…….]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이웃의 말에 제이슨은 미친 듯이 달려갔다.

그러나 아들은 숨을 쉬지 않았다.

“흑…….”

결국 보라는 울음을 터뜨렸다.

제이슨이 그런 소녀를 안아 주었다.

“제게 소식을 전해 준 이웃이 바로 보라의 어머니였습니다. 두 아이가 아주 친하게 지냈죠.”

여기저기에서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도영이에게서 마지막으로 들은 말이…… 방해해서 미안해, 였습니다. 그게 가슴에 사무쳐서…….”

결국 제이슨의 말에도 울음이 섞여 들었다. 울지 않으려 허공을 쳐다보며 눈을 몇 번 깜빡였지만 굵은 눈물방울이 턱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그러자 여기저기에서 손으로 입을 막거나 훌쩍이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아멜리아는 어깨를 떨며 우는 보라에게 다가가 그녀를 꽉 껴안았다.

남들 앞에서 우는 모습을 절대로 보이지 않던 시호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숙연한 얼굴을 하고 있던 윤기는 그런 시호의 어깨를 안고 토닥였다.

“그게 아들과의 마지막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아이 엄마와 이혼하고 도영이와 둘이서 캐나다로 이민을 온 순간부터 서로가 서로의 전부였는데. 그때 왜 잠깐이라도 시간을 내어서 대화를 나누지 않았을까, 매일 자책하고 후회했습니다.”

눈을 감으면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방문을 나서던 아들이 떠올랐고, 눈을 뜨면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렇게 하루하루 폐인처럼 살던 그는 더 이상 삶에 미련을 둘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다.

혼자 살면 뭘 하나.

자식을 그리 보낸 못난 아비인데.

그러던 제이슨은 생전에 도영이 아빠와 함께 하고 싶어 했던 일을 떠올렸다.

바로 윤기의 영상을 보는 것.

열세 살을 기점으로 실력이 급상승한 윤기의 영상은 심심치 않게 찾을 수 있었다.

거의 모든 대회의 우승자였기 때문이다.

영상을 클릭하는 순간.

제이슨은 무너져 내렸다.

화면 속에서 열일곱 살의 도영이 검도를 하고 있었다.

평생 볼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던 모습이었다.

열일곱, 열여덟, 열아홉.

그렇게 한 살씩 나이를 먹는 윤기를 보면서 제이슨은 삶의 의욕을 찾아 갔다.

꼭 도영이 자라는 모습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저 각각 캐나다와 한국에 떨어져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윤기가 스물이 되었을 때.

제이슨은 직접 한국으로 날아가 윤기가 참가하는 대회를 관람했다.

경기가 끝난 후, 그를 만나 사인을 받으면서 오랜 팬이라고 밝혔다.

그 이후로 시간이 될 때마다 한국에 가서 윤기의 경기를 관람했고, 매번 사인을 받았다.

[검도를 해 주어서 정말 고맙습니다, 기윤기 선수.]

제이슨의 진심을 담을 수 있는 유일한 말이었다.

“기윤기 선수가 아니었더라면 전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겁니다. 어떤 의욕도, 희망도 없던 제게 기윤기 선수는 빛이 되어 주었고, 아들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가 눈물 젖은 얼굴로 웃으며 덧붙였다.

“물론 기윤기 선수 본인은 전혀 모르는 일이지만요. 아저씨가 너무 좋아해서 혹시 징그러웠습니까?”

이런 상황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제이슨의 모습에 사람들 역시 울면서 웃었다.

“전혀 징그럽지 않습니다.”

윤기가 진지하게 답했다.

“먼 곳에서 응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윤기는 시호를 보았다. 그녀가 살짝 미소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제이슨에게 다가갔다.

“괜찮으시다면. 한번 안아 드려도 되겠습니까?”

무표정한 윤기의 입에서 나온 말에 제이슨의 눈이 커졌다.

“팬서비스를 해 드리고 싶어서요. 그리고…… 아드님을 대신해서.”

제이슨의 눈에 다시 투명한 눈물이 고이더니 펑펑 쏟아지기 시작했다.

자신을 향한 그의 무조건적인 신뢰와 애정의 이유를 알게 된 윤기는 도영을 대신해서 제이슨에게 온기를 전해 주고 싶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윤기가 제이슨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도영이는 분명 잘 지내고 있을 겁니다. 아빠를 자랑스러워할 거예요.”

어깨를 잘게 떨던 제이슨이 윤기를 와락 끌어안았다.

“도영아…… 그때 아빠가 미안했다……. 다시 만나면 그땐 꼭 같이 윤기 형아 동영상 보자. 보면서, 밤새도록 얘기하자…….”

모두들 눈물을 훔쳤다.

아멜리아와 보라는 서로 부둥켜안은 채 거의 통곡하고 있었다.

시호도 난생처음으로 많은 사람들 앞에서 펑펑 울었다. 손등으로 아무리 눈가를 닦고 또 닦아 내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결심했다.

앞으로 더욱더 진심을 다해서 살겠다고.

“……저의 용기를 들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서시호 단장님과 기윤기 선수의 후원사가 될 수 있어서 진심으로 영광스럽습니다.”

빨개진 얼굴의 시호와 제이슨이 가벼운 포옹을 나누었다.

“킹 소이!”

“간장님, 나 말 잘 드루께요!”

“내가 킹 소이 아들노메 쌔끼 되어 줄 테니까 울지 마!”

마지막 로건의 말에 제이슨이 예끼! 하면서 그의 등을 찰싹 때렸다.

“이 감동적인 상황에서 꼭 아들놈의 새끼라고 해야겠냐? 하긴, 그러니까 로건이지.”

문호검도장 사람들이 제이슨을 빙 둘러싸고 서로를 끌어안았다.

그들에게 둘러싸인 제이슨은 무척 행복해 보였다.

***

윤기는 다른 남자와 마주 선 시호를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시했다.

남자가 시호에게 한 걸음 다가선 순간.

그의 몸에 힘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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