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화
여자는 좋아서 방방 뛰며 어쩔 줄 몰라 했다.
“Oh my god! I′m about to go crazy right now!(어떡해, 미칠 것 같아, 지금!)”
“Hey, Amelia!”
제이슨이 그녀를 부르며 윤기에게서 가볍게 떼어 놓았다.
아멜리아는 황홀한 표정으로 윤기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It just feel like a dream…… No way……!(진짜 꿈같아…… 대박이다……!)”
“하하, 아멜리아가 심하게 쾌활한 소녀라서 그러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소녀라고? 놀란 시호가 아멜리아를 다시 살펴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소녀’라고 불리기에는.
‘……지나치게 성숙한데.’
저보다 큰 키에 ‘소녀’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 아주 풍만하고 굴곡진 몸매, 아름다운 이목구비.
시호는 숨을 낮게 들이마셨다.
키가 크고 늘씬한 금발의 미인이 윤기를 끌어안는 순간, 가슴속에서 뜨거운 것이 꿈틀거리는 기분을 느낀 것이다.
유혹하려던 것도 아니고 그저 선망하던 선수를 실제로 보게 되어 놀랍고 반가운 마음에 몸이 닿은 것인데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멜리아가 워낙 순식간에 뛰어들었고 또 제이슨이 빠르게 떼어 놓았기에 윤기가 아멜리아를 밀어낼 틈이 없었다.
언제나 자신 외에는 냉정하게 대하던 윤기가, 다른 사람이 끌어안아도 가만히 있는 모습을 처음 보아서 그런지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유치하게 왜 이러지, 나.’
시호는 고개를 살짝 흔드는 것으로 정신을 차리려 노력했다.
“환영합니다! 저희 모두 기윤기 선수를 정말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시 정식으로 소개하자면, 저는 항공기 엔진을 제작하는 항공방위 사업체인 제이크래프트를 운영하고 있는 제이슨 리라고 합니다. 한국 이름은 이문호입니다.”
“기윤기입니다. 그리고 메일로도 말씀드렸듯이 이쪽은 곧 제가 속하게 될 선수단의 단장님이십니다.”
“서시호입니다. 반갑습니다.”
시호는 제이슨이 건넨 손을 맞잡으며 인사를 나누었다.
“사실 제가 남자부 검도밖에 찾아보지를 않았거든요. 그래서 서 단장님에 대해 잘 몰랐는데, 저희 검도장에 서 단장님의 열렬한 팬이 있더라고요. 덕분에 서 단장님이 얼마나 대단한 선수였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제이슨이 저쪽 구석에 서 있는 동양인 소녀를 손짓으로 불렀다.
척 봐도 수줍음이 무척이나 많은 듯했다.
“보라, 인사드려야지. 오늘을 무척이나 기다렸잖니.”
“안뇽하세요…….”
발음이 조금 서툴기는 하지만 한국인인 모양이었다.
“보라는 프로 검도선수를 목표로 하고 있거든요. 워낙 샤이한 친구고 입이 무거운데, 서시호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What?!’ 하고 소리를 질렀다니까요? 보라가 기합 소리 외에 그렇게 큰 소리를 낸 적은 처음이었습니다. 하하하.”
보라의 얼굴이 빨갛게 변했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시호는 저도 모르게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고맙습니다. 정말 기쁘네요.”
“캄사함니다…….”
몸을 배배 꼬는 보라를 보며 한바탕 웃음이 퍼져 나갔다. 덕분에 시호도 긴장감을 어느 정도 떨쳐 낼 수 있었다.
“그럼 케이크는 교검이 끝난 후에 먹기로 하고. 우선 저희 문호검도관 도장 소개부터 할까요?”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시호와 윤기는 제이슨의 뒤를 따라다니며 설명을 들었다.
가장 놀라운 것은 한국 전통식 미닫이문을 열면 등장하는 아주 넓은 공터였다.
“합숙 훈련을 할 때에는 이곳에서 다 같이 구호에 맞추어서 연격을 하곤 하죠. 자선 행사나 바비큐 파티도 하고요.”
“아주 멋지네요. 한국에 있는 저희 수련관에도 넓은 뜰이 있는데 참고해야겠어요.”
“오, 그렇습니까? 혹시 사진을 볼 수 있을까요?”
제이슨의 말에 시호가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냈다.
“안 그래도 저희 무영단을 소개하는 짧은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해 보았습니다.”
제이슨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오우, 정말 놀랍군요. 그 짧은 시간에 어떻게…….”
“말씀하신 대로 준비 시간이 촉박해서 제대로 만들지는 못했습니다. 많이 부족하겠지만 좋게 봐주시기를 바랍니다.”
“혹시 들으셨는지 모르겠으나, 저는 기 선수와 그 소속 팀을 무조건적으로 후원하려고 해요. 기 선수에게는 그만큼의 가치와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간 보여 준 행보만으로도 충분히 증명되는 바이니까요.”
“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제가 용납할 수 없어서요.”
시호가 제이슨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이윤을 남기려는 목적이든, 순전히 영혼의 손짓을 따라가는 것이든, 사장님께서 후원할 선수단이 어떤 곳인지 확실히 아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감 넘치고 분명한 시호의 말에 제이슨과 주위 사람들이 감탄했다.
“영혼의 손짓이라……. 마음을 울리는 말이군요. 좋습니다, 그럼 프레젠테이션 부탁드리겠습니다. 마크, 스크린 세팅 좀 부탁해.”
“예, 알게씁니다!”
윤기만큼이나 체격이 다부진 흑인이 한국어로 대답했다.
시호가 놀란 표정을 짓자 제이슨이 흡족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희 도장 식구들 모두 한국어를 할 줄 압니다. 아까 아멜리아는 너무 흥분해서 모국어가 튀어나온 거고, 평소 도장에서는 거의 한국어만 써요. 제가 한국인이기도 하고, 또 다들 기윤기 선수의 팬이라서 한국이라는 나라에 관심이 아주 많거든요.”
“와아…… 놀랍네요.”
시호가 동의를 구하듯 윤기를 쳐다보자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시호의 뺨을 쓸었다. 무의식중에 나온 행동이었다.
“오우. 플레이어 키의 눈까리 쏘 스위트!”
그의 곁에 서 있던 눈이 파란 백인의 말에 시호의 뺨이 붉게 물들었다.
“이런, 죄송합니다. 로건이 한국어를 채팅으로 배워서요. 속어, 은어에 어찌나 통달했는지. 그래도 나쁜 뜻으로 하는 말은 아니니까 양해해 주세요.”
그렇게 말한 제이슨이 싱긋 웃었다.
“두 분이 비즈니스 파트너이자 소울 파트너라는 것은 정 기사님께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아, 네…….”
수줍은 자신과 달리 윤기는 더없이 당당하고 자랑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래서 시호는 더 민망해졌다.
“간장님! 세팅 오케이!”
마크가 큰 소리로 외치자 제이슨이 엄지를 치켜들었다.
“관장이라는 단어가 발음이 어려워서 그런지 제가 여기서는 간장님이라고 불립니다. 그래서 별명이 킹 소이(king soy)입니다. 하하하.”
제이슨의 말에 모두들 웃음이 터졌다.
윤기는 활짝 웃는 시호를 바라보며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와우. 플레이어 키, 눈까리에소 레드 하트가 퐁퐁 소사나요!”
“어허, 로건! 눈깔이라는 말 쓰지 말라고 했지!”
“제성함니다. 눈아리가 따뚯하다.”
“눈알이라는 말도 좀…….”
만담 같은 제이슨과 로건의 대화에 시호는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문호검도관은 굉장히 화기애애하고 따뜻한 분위기였다. 허물없이 서로를 대하면서도 예의를 지키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우리 무영단도 이런 분위기였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장인 자신이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중심을 잘 잡아야겠다고 시호는 생각했다.
사람들이 마룻바닥에 정좌하고 앉았다.
앞에 선 시호는 숨을 조용히 들이마신 후 노트북에서 프레젠테이션 파일을 불러왔다.
“저희 무영관은 대한민국 경기도 연교시 중원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국내 최초이자 세계 최초로 한옥을 수련관으로 사용할 예정입니다.”
시호가 화면으로 무영관의 시설들을 보여 주자 모두들 입이 떡 벌어졌다.
“오우, 무지하게 커다란 안마체어!”
“와우, 화장시리가 호텔이네!”
“무비에 나오는 한국 궁전 같아.”
그들의 감탄에 낮게 웃은 시호는 턱을 치켜들고, 조금씩 떨려 오는 손끝을 말아 쥐었다.
그러다 윤기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미소했다.
언제 어느 때라도 자신의 곁에는 윤기가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용기가 생겼다.
시호는 입을 열었다.
“제가 무영단을 설립하게 된 계기는 저 스스로에게 진심을 다하지 않았던 것이 후회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말에 두런거리던 말소리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저는 부상으로 인해 예기치 않은 은퇴를 당했습니다. 좌절한 저는 결혼을 택했고, 결과적으로 그것은 잘못된 선택이었습니다. 진정으로 원해서가 아니라 도망칠 구실을 마련한 것입니다.”
윤기는 입가에 힘을 주었다.
저 말을 하기까지 시호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제 마음은 여전히 검도를 원하고 있었지만, 당시 너무 힘들었던 저는 의식적으로 그것을 무시했습니다.”
“…….”
“그 사실이 전남편이나 시댁과의 갈등만큼 저를 힘들게 했습니다. 그래서 결심했습니다. 이혼하게 되면 나 스스로에게 솔직해지자고. 내 진심을 따르자고.”
이혼이라는 말에 장내는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듯 조용해졌다.
눈을 한 번 감았다 뜬 시호가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 무영단의 정신은 ‘진심’입니다.”
버킷리스트를 작성할 때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된다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은?’이라는 질문에 머리보다 손이 먼저 움직였다.
검도에 진심을 다하고 싶다고.
다시 한번 열정을 바치고 싶다고.
그것이 선수단 창단의 계기였다.
시호는 잠시 숨을 고른 후, 저를 향한 시선들과 골고루 눈을 맞추며 다시 말을 이어 갔다.
“진심이란 거짓이 없는 마음이자 변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제가 선수들에게, 그리고 선수들은 본인 스스로와 그들을 믿고 응원해 주는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진심을 바탕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의 재능과 열정을 있는 힘껏 지지해 주고 싶습니다.”
시호의 머릿속에 그간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인생 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제가 무영단을 한국에서 가장 뛰어난 선수단으로 만들겠노라 선포하고 행하고 있는 토대에는 정당하게 받은 제 위자료에, 전남편에게서 받은 과한 비공식 위자료가 더해졌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후자가 없었더라면 좋은 시설과 복지를 행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
“그러나 이대로는 온전히 제 능력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불운했던 과거에 여전히 발목이 붙잡혀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해서, 제이크래프트의 후원을 받고자 합니다.”
시호가 두 손을 모으고 제이슨의 눈을 바라보았다.
“제이크래프트는 사회공헌활동을 중요시 여기는 기업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저희 무영단 역시 높은 성적에만 연연하는 것이 아니라, 저희를 통해 희망과 열정을 느낄 수 있도록 사회공헌활동에 앞장설 계획입니다.”
시호는 어려운 환경 때문에 검도를 배울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검도 꿈나무들을 위하여 분기에 한 번씩 아이들을 초청해 배움의 장을 마련할 계획이었다.
아까 제이슨의 말을 참고하여 무영관의 뜰을 합숙 캠핑장으로 활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주기적으로 봉사활동을 할 것을 약속했다. 이 역시, 선수단 창단을 계획할 때부터 생각해 오던 것이었다.
“이러한 저의 진심이 부디 제이크래프트의 제이슨 대표님께 가닿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