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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쳐 주세요 선배-44화 (44/81)

제 44화

“네가 네 죄를 안다면 날 이렇게 끌어안지는 못할 텐데?”

그러자 윤기가 그녀의 허리를 감은 팔에 더더욱 힘을 주었다.

“음. 아무리 생각해도 선배랑 떨어져 있어야 할 정도의 큰 죄는 저지르지 않은 것 같은데.”

“하마터면 오늘 못 깨어날 뻔한 거 알아?”

몸이 피곤해야 금세 곯아떨어지는 법이라며 윤기는 그대로 시호를 파고들었다.

그렇게 연이어 사랑을 나누었다. 무려 두 번이나 말이다!

어찌나 격렬하던지.

말 그대로 실신하듯 잠든 탓에, 마지막에는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였다.

“빨리 재워 주겠다더니.”

“빨리 재워 주지 않았습니까.”

“내일까지 재워 줄 뻔했지.”

윤기가 시호의 어깨에 촉, 입술을 길게 눌렀다.

“오늘 못 하면 나중에 둘이 왔을 때 실컷 돌아다니면 되죠.”

“그때는 그때대로 소중하고 오늘은 오늘대로 소중해.”

음, 하고 윤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말이네요.”

그때는 그때대로, 오늘은 오늘대로.

머릿속에 새기듯 낮게 읊조리던 윤기가 그녀를 한 번 꽉 끌어안고는 씩 웃었다.

“그럼 데이트하러 갈까요?”

***

일전에 연남동에서 구입했던 커플 캡모자를 쓰고 같은 디자인에 색깔만 다른 후드 티를 입은 두 사람은 손을 꼭 붙잡고 호텔을 나와 시내로 향했다.

바다가 가까이에 있어 해산물이 유명한 만큼, 두 사람은 시호가 찜해 놓은 해산물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몸 관리를 하는 윤기에게도 부담이 없는 곳이었다.

직원들이 굴을 손질하는 모습을 직접 볼 수 있는 독특한 식당에서 푸짐하고 맛있는 식사를 마친 그들은 차로 4분 정도 떨어진 아이스크림 가게에 가기로 했다.

“너무 맛있었어. 재료가 정말 싱싱하더라.”

“선배가 잘 고른 덕분입니다.”

윤기가 입을 맞추려는데 모자의 캡끼리 부딪쳤다.

미간을 찌푸린 그가 모자를 뒤로 돌려 썼다.

“와. 귀여워!”

시호의 말에 더욱더 좁혀진 미간. 윤기가 모자를 다시 앞으로 돌리려 하자 그녀가 팔을 붙잡고 막았다.

“왜에, 보기 좋은데. 처음 본다. 모자 뒤로 돌려 쓴 모습.”

시호가 윤기의 팔짱을 끼고 눈을 휘며 웃었다.

“연하랑 사귀는 기분 제대로 나는데?”

그 말이 어이없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윤기도 따라 웃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 빨리 택시 타자. 누나가 아이스크림 사 줄게.”

“……하.”

윤기가 시호의 머리를 감싸 당겨 쪽! 소리가 나도록 뽀뽀한 다음, 그녀의 뺨을 감싸 눈을 맞추었다.

“숙소에서는 안 봐줄 겁니다.”

“……하하. 노, 농담인데.”

그가 씨익 웃었다.

“새벽까지 안 재울 거니까 각오해.”

누나.

낮게 덧붙인 그가 택시를 잡았다.

“안 탑니까?”

윤기가 뒷좌석의 문을 열고 기다렸다.

그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시호는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택시에 올라탔다. 누가 심장을 쥐고 흔드는 것처럼 마구 떨렸다.

“괜찮아요? 갑자기 굳어 버린 것 같은데.”

“아니. 나 아, 안 굳었는데?”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은 윤기가 고개를 비스듬히 숙이고 그녀를 보았다.

“누나라는 말이 그렇게 설렜나?”

“무슨……!”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질 뻔한 시호는 택시 기사의 눈치를 보며 입술을 안으로 말았다.

“아니거든?”

“음. 예전에는 누나라는 말이 참 싫었는데.”

윤기가 시호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서시호를 더 귀엽게 만드는 단어였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써 볼걸.”

시호가 손을 빼려고 했지만 윤기는 놔주지 않고 오히려 손깍지를 끼며 더 깊게 얽었다.

“나랑 떨어질 생각 하지 말아요. 그럴 틈은 1분도 없을 테니까.”

그러다 윤기는 무언가를 생각하곤 다시 미간을 좁혔다.

“전에 제 집에 가수원이 고기 사서 놀러 왔을 때 말입니다.”

“응?”

“그때 가수원이 선배더러 누나라고 불렀는데. 설마 그때도 설렌 건 아니겠죠.”

시호는 윤기를 놀릴 수 있는 틈을 놓치지 않았다.

나만 당할 수는 없지. 이래 봬도 공격하기에 가장 알맞은 순간을 잘 캐치해 낸다는 평을 받았던 선수였다고.

“아아, 그때.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지. 누군가한테 ‘누나’라는 말을 처음 들었는데 어떻게 잊겠어.”

윤기가 눈을 크게 떴다. 입은 살짝 벌어진 채였다.

시호는 웃음을 참으며 아아, 하고 그때를 회상하는 듯 허공을 보았다.

“오랜만에 만난 수원이가 나한테 ‘누나’라고 부르니까 마음이 진짜 참…….”

“참, 뭡니까?”

그의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열이 시호의 눈에도 훤히 보였다.

“참 신선하달까. 선명하기도 하고. 가슴이 막…….”

“막?”

“막……!”

간질간질하고 두근두근 뛰던데?

……라고 말하려던 시호는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더 장난을 쳤다간 정말 밤에 위험해질 듯싶다.

시호는 그의 팔짱을 끼고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막막했다, 이거지. 기윤기가 불러 줬으면 더 좋았을 텐데.”

“더 좋았다는 말은… 그래도 좋았다는 거 아닙니까?”

작은 틈도 놓치지 않는 것은 윤기도 마찬가지였다.

“신선하기는 했지. 처음 들어 봤으니까.”

“머리에 남기는 했군요.”

낮게 중얼거리는 윤기의 목소리가 스산하게 느껴졌다. 이거 참. 호텔에서 괜찮겠지? 하하…….

어쨌든 택시에서 내린 두 사람은 얼그레이맛이 유명한 아이스크림 가게로 향했다.

인기가 많은 만큼 사람도 많아서 줄을 서야 했다.

“와아, 이런 맛은 처음이야!”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어 문 시호가 연신 감탄했다.

홍차의 진한 맛이 입 안 가득 퍼져 나가면서 달콤하고도 깔끔했다.

“너무 맛있다. 한국에 돌아가서도 계속 생각날 것 같아.”

“또 먹으러 오죠.”

시호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만 먹어 봐. 이 지역에서 가장 품질 좋은 재료만 쓰는 곳이라고 하니까 몸에도 무리 없을 거야.”

그러자 윤기가 상체를 숙여 시호의 입가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핥았다.

“음. 정말 맛있네.”

아무렇지도 않게, 이것이 아이스크림을 먹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듯 아주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아직 맥주 마시기 전인데. 선배 얼굴이 너무 빨가네요.”

윤기가 손등으로 시호의 말랑한 뺨을 쓸었다.

“차가운 걸 먹고 있는데도 왜 뜨거울까.”

왜 뜨겁긴? 너 때문이잖아!

시호가 눈으로 항의하자 윤기가 웃으며 그녀를 껴안았다.

“너 솔직히 나 놀리려고 캐나다에 왔지.”

“음. 겸사겸사?”

“기윤기!”

그가 다시 웃으며 시호의 입에 쪽, 입을 맞추었다.

손을 붙잡고 거리를 걸을 때도, 지나가다 눈에 뜨인 펍에 들어가 맥주를 마실 때도, 개스타운(Gastown)을 걸으며 버스킹을 구경할 때도 윤기의 시선은 시호에게 붙박여 있었고, 입가에선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아, 스팀 클록(Steam Clock)!”

세계 최초의 증기시계인 스팀 클록은 15분마다 증기를 내뿜으면서 가벼운 음악을 연주하는데, 매시 정각이 되면 완곡이 나온다.

때마침 8시여서 두 사람은 증기를 뿜어내는 시계가 연주하는 곡을 들을 수 있었다. 고등학교에서 수업이 끝날 때 나오는 연주곡이었다.

“캐나다에 온 첫날에 완곡을 듣다니. 우리 운이 좋다. 그치.”

“선배가 제 네잎클로버네요.”

두 사람은 마주 보며 웃었다.

개스타운 길을 따라 늘어져 있는 동글동글한 조명이 달린 가로등이 환상적이고 따뜻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기념품점에 들어가서 잠옷으로 입을 단풍잎이 그려진 커다란 티셔츠 두 장과 곰 모양의 머그컵 두 개를 골랐다.

“이거면 됩니까?”

“응. 나머지는 돌아가기 전날에 사려고.”

기념품점을 나온 그가 시호의 후드를 여며 주었다.

“춥지는 않아요?”

“아주 조금? 그래도 기윤기 덕분에 따뜻해.”

윤기는 다니는 내내 시호의 어깨와 허리를 보호하듯 감싸 안았고, 공연을 구경할 때에도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고 있었다.

“이제 들어갈까요? 이러다 감기에 걸리면 큰일입니다.”

“응, 그러자. 내일 일정도 있으니까.”

두 사람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호텔로 향했다.

호텔까지는 10분 정도의 거리라서 걸어가기로 했다. 이국적인 풍경과 즐거워 보이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시호와 윤기 역시 즐거워했다.

“하아. 오늘처럼 마음 편하고 즐거운 날은 정말 오랜만이야.”

검도에만 매진하면 됐던 학창시절 이후로는 처음이다.

씻고 나서 침대에 드러누운 시호의 옆에 앉은 윤기가 이불을 덮어 주었다.

“다리 아프지는 않아요?”

“완전 괜찮아. 내일부터는 후원사와 미팅이니까 힘내야지.”

“너무 부담 갖지 않아도 돼요. 평소대로만 하면 제이슨도 마음에 들어 할 겁니다.”

“그랬으면 좋겠다.”

충분히 잤다고 생각했는데, 침대에 누우니 또 잠이 솔솔 밀려왔다.

“뭔가…… 겨울잠 자는 곰이 된 기분이야. 그렇게 잤는데도 또 졸려.”

낮게 웃은 윤기가 긴 팔을 뻗어 팔베개를 해 주었다.

“갑자기 떠나온 여행이라 피곤할 겁니다. 긴장도 됐을 거고.”

“으응…… 그런 것 같아…….”

슬슬 눈이 감겼다. 윤기가 등을 토닥이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시호는 잠에 빠져들었다.

그녀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춘 윤기도 눈을 감았다.

“잘 자요, 선배.”

***

다음 날.

두 사람은 호텔 정문에서 대기하고 있는 리무진으로 다가갔다.

“편안한 밤 되셨습니까?”

차 앞에 대기하고 있던 운전기사가 웃는 낯으로 인사를 건넸다.

“배려해 주신 덕분에요.”

“하하, 다행이군요. 사장님께서 오늘 아침부터 어찌나 기다리시던지. 손수 운전을 하시겠다는 걸 말리느라 얼마나 진땀을 뺐는지 모릅니다.”

운전기사의 말에 시호도 살짝 미소를 머금었다.

“그럼 타실까요?”

윤기가 들고 있던 스포츠 브랜드의 로고가 새겨진 더플백과 호구 가방을 트렁크에 실었다.

그들을 힐끔힐끔 쳐다보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리무진은 긴 몸을 우아하게 움직여 그곳을 빠져나갔다.

시호는 짙은 갈색의 슬랙스와 재킷, 그리고 베이지 톤의 블라우스를 입은 차림새였고, 윤기 역시 검은 면바지에 검은색 셔츠를 입고 있었다.

제이슨은 편하게 오라고 했지만, 아무래도 후원사의 사장과 만나는 자리이니 격식을 갖추어야 할 것 같았다.

“원래는 회사로 먼저 모시려고 했습니다만, 그랬다간 일정이 늦어져 두 분께서 피곤해하실 것 같아서요. 곧바로 도장으로 모시겠습니다.”

긴장된 마음을 안고, 그들은 밴쿠버 동쪽에 있는 버너비(Burnaby)시로 향했다.

그들을 환영하듯 오늘도 날씨가 아주 좋았다.

맑은 공기와 수려한 자연경관을 넋 놓고 구경하는 사이, 리무진이 멈춰 섰다.

“이곳입니다.”

기사가 트렁크에서 더플백과 호구 가방을 꺼냈다.

그것을 들고 깔끔한 회색 건물 안으로 들어선 순간.

우렁찬 함성 소리와 함께 거대한 폭죽이 펑! 터졌다.

“환영합니다! Welcome to Vancouver!”

무척이나 잘생긴 로맨스그레이가 케이크를 들고 있었고, 양옆으로 백인, 동양인, 흑인이 뒤섞여 서 있었다.

“밴쿠버까지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윤기 선수. 정말 보고 싶었습니다.”

그때 금발의 늘씬한 미녀가 윤기의 목을 끌어안았다.

“Gosh, Player G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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