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르쳐 주세요 선배-43화 (43/81)

제43화

시호는 헤드폰을 쓰고 있어서 목소리가 커진 것도 모른 채 말을 하고 있었다.

“네, 괜찮습니다.”

“불편한 점이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리모컨으로 화면을 멈춘 시호가 허둥지둥 헤드폰을 벗어서 정리했다.

“제목이 ‘나를 사랑한 후배’네요.”

“그건 왜 갑자기……?”

“한국에 돌아가서 보려고. 도대체 뭐라고 했기에 선배가 이렇게 흥분할까 싶어서.”

“흐, 흥분은 무슨!”

“말 잘 안 더듬는 사람이 더듬을 땐 엄청나게 흥분했다는 증거죠.”

시호는 목을 가다듬으며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닌데? 나 흥분하지 않았는데?”

절대로 기윤기가 보게 하면 안 된다.

그랬다간 정말로 도장 바닥에서 사랑을 나누게 될 수도 있겠다.

그의 성격상 질 수 없다며(?) 강도를 더 높이겠지.

‘며칠 동안 잘 걷지 못하게 될지도 몰라…….’

그럼 분명히 자신을 안아 들고 다니려고 할 것이 뻔했다.

“갑자기 졸음이 막 밀려오네.”

하아암. 작게 하품하는 시늉까지 한 시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윤기가 얼른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어디 가십니까?”

“내 자리에 가려고. 좀 누워 있어야지.”

“여기에서 누워 있어요.”

눕고 싶으면 자리를 준비해 드릴 테니 호출해 달라던 말을 떠올린 윤기가 승무원을 부르려던 참이었다.

“잠깐! 그럼 너는?”

“전 여기에 앉아서 선배를 보고 있겠습니다.”

윤기가 1인용 좌석을 가리켰다.

“그럼 너도 누워.”

방금 자신이 들은 말이 맞는지 의아한 듯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저도 말입니까?”

“응. 누워서 마주 보면 되잖아.”

그렇게 부끄러워하던 사람이 이토록 바람직한 말을 하다니.

몇 분 후.

윤기의 얼굴에는 불만족이 한가득이었다.

“분명 누워서 마주 보기로 한 것 같은데.”

“응, 지금 마주 보고 있잖아. 누워서.”

소파를 길게 늘려서 침대를 만들고 붙어 있는 옆 좌석도 똑같이 한 다음, 칸막이를 밀면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현재 그들은 그렇게 해서 마주 보고 있는 상태였다.

물론 몸은 떨어진 채다.

윤기가 한숨을 쉬며 손으로 눈을 가렸다.

“속았군.”

“난 거짓말 안 했다?”

시호가 담요로 입을 가리며 쿡쿡,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귀여우니까 봐주는 겁니다.”

“또! 여기 한국인 승무원이랑 승객도 있단 말이야.”

“기내에서만 봐줄 겁니다. 내린 후에는 어림도 없을 줄 알아.”

어쨌든 지금은 넘어가 준다는 거지?

그녀가 배시시 웃었다.

짐짓 엄한 표정을 짓고 있던 윤기 역시 입가가 덩달아 올라갔다.

“힘들지는 않습니까?”

“전혀. 좌석도 넓고 먹을 것도 많고 볼 것도 많고. 잘 시간이 아까울 정도야.”

“그럼 안 자면 되죠.”

“으음. 갑자기 졸음이 막 밀려오네.”

눈을 감는 시호를 보며 윤기가 작게 웃었다. 참 귀엽다니까.

“알겠습니다. 도착하기까지 약 7시간 정도 남았으니 충분히 쉬어요. 불편한 거 있으면 부르고.”

“응, 알았어.”

비행기에 탄 순간부터 윤기는 시호 전담 승무원처럼 그녀가 불편하지 않도록 매순간 눈을 떼지 않으며 세심하게 살폈다.

승무원이 신혼여행을 가는 것이냐고 묻기까지 했다.

그때 기윤기의 표정이란.

세상을 다 얻은 자의 그것이었다.

보는 이마저 행복을 느낄 수 있을 만큼 기뻐했다. 얼음인간이라는 별명이 무색할 정도로 말이다.

1년 전, 아니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이렇게 달콤한 순간을 누리고 있을 것이라곤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심지어 버킷리스트 목록을 작성할 때도 타인과 함께하는 활동은 없었는데.

윤기로 인해 많은 것이 바뀌었다.

몇 년분의 행복이 한꺼번에 밀려오는 기분에 미소가 끊이질 않았다.

“잘 자. 윤기야.”

아주 작게 중얼거린 말도 윤기는 놓치지 않았다.

“우리 시호도 좋은 꿈 꾸길.”

시호는 배시시 웃으며 눈을 감았다.

***

약 10시간에 걸친 비행을 마치고 밴쿠버에 도착했다.

“환영합니다, 기윤기 선수.”

제이슨이 보낸 리무진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인상이 좋은 운전기사가 그들의 짐을 실어 주고 뒷문을 열어 주었다.

“장시간 비행으로 많이 피곤하시죠? 얼른 호텔로 모시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저희 사장님께서 기 선수가 오시기를 얼마나 기다리셨는지 모릅니다. 도장 사람들도 마찬가지고요. 다들 잔뜩 흥분해 있답니다. 하하하.”

기사의 말에 윤기는 고개를 살짝 숙였고 시호는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그녀를 백미러로 보던 기사가 혹시, 하고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두 분께서는 연인이십니까?”

“예.”

빛보다 빠른 윤기의 대답 속도에 기사가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참 잘 어울리십니다.”

“제 연인이기도 하고. 제가 속할 선수단의 단장님이시기도 합니다.”

“오, 이런! 대단한 분이셨군요!”

“아직은 아니지만, 조만간 그렇게 되고 싶은 단장 서시호입니다.”

시호의 대답에 잠시 벙찐 표정을 짓던 기사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정말 매력적인 분이시네요. 다들 단장님을 무척 좋아할 겁니다.”

흐음, 그럼 곤란한데.

윤기가 작게 중얼거리는 말에 시호가 황급히 눈치를 주었다.

‘그런 말 입 밖으로 꺼냈단 봐!’

그녀의 마음속 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서 그가 픽 웃었다.

시호가 목을 가다듬으며 다시 옅은 미소를 지었다. 하여튼,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니까.

시호는 길게 뻗은 리무진 내부를 구경하다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물감으로 그린 듯 색감이 선명한 파란 하늘과 흰 구름에 절로 입이 벌어졌다.

“정말 예쁘네요. 그림 같아요.”

기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날씨가 흐리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도로 양옆에 심긴 나무들은 또 어찌나 푸르고 예쁜지.

시호는 깨끗하고 맑은 풍경에서 내내 눈을 떼지 못했고, 윤기는 그런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따금 백미러로 그들의 모습을 확인한 기사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호텔에 도착한 그들은 직원들의 안내를 받아 맨 위층에 있는 스위트룸으로 향했다.

“와아…….”

고급스러운 우드톤의 디자인과 은은하게 풍기는 향기, 그리고 항구 근처에 위치하여 바다가 펼쳐진 창밖 풍경까지.

심지어 기사는 리무진에서 그들의 옷이 포장된 쇼핑백까지 들고 왔다.

“급하게 오시느라 캐나다 기후에 맞는 옷을 챙기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며 사장님께서 준비하셨습니다. 부디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군요. 사장님께서 무척 신경을 쓰셨거든요.”

“정말 감사드립니다. 엄청난 환대에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하하, 별말씀을요. 그럼 내일 오후 4시에 호텔 정문 앞으로 모시러 오겠습니다. 즐거운 시간 보내시기를.”

기사가 미소를 지으며 문을 닫았다.

“너무 좋다. 풍경도 좋고 공기도 좋고 살짝 지나가는 바람도 좋아.”

윤기가 시호를 끌어안았다. 그녀 역시 그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행복하다. 기윤기와 캐나다에 오다니.”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반은 비즈니스고 반은 여행이지만.”

그래도 좋아.

그녀의 말에 살짝 웃은 윤기가 시호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저도 좋습니다. 선배와 함께라서.”

두 사람은 마주 보며 웃었다.

“피곤하실 테니 좀 더 눈을 붙이는 게 좋을 듯한데.”

윤기의 말에 시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래야 할 것 같아.”

오면서 선잠이 들기는 했지만 이리저리 뒤척이는 시간이 더 많았다.

그럴 때마다 윤기가 심각한 표정을 지어서 시호는 자주 움직일 수도 없었다.

“난 샤워 좀 하고 나올게.”

“같이 할까요?”

은근한 말투에 시호가 윤기를 곱게 흘겨보았다.

“넌 비행기에서 했잖아.”

기내 샤워실은 제한 시간 30분 내로 끝내야 했고, 물을 쓸 수 있는 시간은 고작 5분이었다.

그래서 빨리 끝낼 수 있는 윤기만 샤워를 했다.

“또 해도 상관없는데, 난.”

그가 시호의 허리를 끌어당기며 나른한 미소를 지었다.

“넌 다른 할 일이 있어.”

“뭡니까?”

“베개로 변신하고 있어.”

베개? 윤기가 되묻자 시호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내가 샤워 마치고 나오면 바로 끌어안고 잘 수 있도록 준비해 둬. 침대 좀 데워 놓고.”

“샤워를 하고 나와서도 할 수 있는 일인 듯싶은데.”

“같이 샤워만 하고 나올 거 아니잖아.”

“…….”

“맞지?”

윤기는 할 말이 없었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랬다간 내일 아침까지 못 일어나고 말 거야. 난 오늘 저녁에 꼭! 길거리 구경하고 맥주를 마셔야겠으니까 협조해 줘.”

그가 붙잡기 전에 시호는 욕실로 휙 들어가 버렸다.

문이 닫히기 직전.

시호가 문 사이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렇다고 먼저 자고 있으면 안 된다? 나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야 해.”

타악.

홀로 남겨진 윤기는 닫힌 욕실 문을 바라보다가 무너지듯 주저앉아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아…… 귀여워…….”

시호를 끌어안고 누우면 참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한편, 욕실로 들어온 시호는 얼른 머리를 감고 보디샤워로 몸을 씻었다.

“으음, 향기 좋다.”

이혼 전, 시댁에서 주관한 행사는 대개 5성급 호텔에서 열렸다.

제이슨이 준비해 준 이곳 캐나다의 호텔 못지않게 어메니티와 시설이 훌륭했다.

하지만 그때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고급스러운 품질도, 향기도 그 무엇도.

윤기와 함께 있으니 작은 비누의 감촉과 향기조차 무척 소중하게 느껴진다.

즐겁게 샤워를 마친 시호가 비치된 목욕 가운을 입고 수건으로 머리를 감싼 채 밖으로 나갔다.

그사이 윤기는 캐리어를 정리했다. 옷을 꺼내어 옷장에 걸어 놓고, 시호가 나오면 바로 사용할 수 있도록 가져온 것들을 화장대에 곱게 올려놓았다.

“쉬고 있지.”

“서시호가 옆에 없는데 어떻게 쉬나.”

그녀에게 다가간 윤기가 머리를 감싼 수건을 풀어서 머리카락을 타고 흐르는 물기를 닦았다.

“배는 안 고파요? 점심 안 먹어도 돼?”

“응, 기내에서 충분히 먹었더니. 윤기 넌 어때?”

“저도 괜찮습니다.”

시호를 의자에 앉힌 윤기가 드라이어로 그녀의 머리를 말려 주기 시작했다.

“내가 해도 되는데.”

“내가 해 주고 싶어서.”

두 사람은 거울을 통해 마주 보며 미소했다.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는 손길에 시호는 눈을 감았다.

좋다. 이게 바로 천국이구나.

“아아. 너무 좋다.”

“시원해요?”

“응. 너무.”

시호의 고개를 부드럽게 뒤로 젖힌 윤기가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내렸다.

“스파이더맨 키스 같다.”

“이건 키스가 아니라 뽀뽀인데. 그럼 진짜로 스파이더맨처럼 키스해 볼까요.”

매끄럽게 스며든 혀가 뒤엉켰다.

이내 시호의 몸을 일으키고 허벅지 밑을 받쳐 안은 윤기가 그대로 침대로 향했다.

그가 시호의 목욕 가운을 옆으로 슬며시 젖히며 입꼬리를 올렸다.

“선배를 빨리 재우는 방법을 써야겠군요.”

***

“으음…….”

이불 밖으로 팔을 뻗은 시호가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5시였다. 이제 슬슬 일어나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일으키는데 뒤에서 허리를 감아 오는 팔이 있었다.

“일어났어요?”

낮게 잠긴 허스키한 목소리가 무척이나 섹시하게 들렸다.

“좀 더 자도 되는데.”

“안 돼. 곧 저녁이야. 노을 보면서 거리 돌아다닐 거야.”

윤기가 그녀를 가까이 끌어당겨 여린 어깨에 턱을 얹었다.

“맞다. 우리 시호 그러고 싶다고 했지.”

시호가 뒤쪽을 찌릿, 곱게 흘겨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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