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화
갈 수가 있겠나.
기윤기가 저런 눈빛으로 붙잡는데.
휴우. 시호가 한숨을 쉬었다.
제 곁에 더 머무를 것이라는 신호임을 인지한 윤기가 웃으며 그녀의 뺨에 부드럽게 입술을 대었다.
“떨어지기 싫습니다.”
“그런데 왜 자꾸 놀려?”
“당신 반응이 너무 귀여워서.”
“뭐어?!”
“무슨 말에도 눈 하나 깜짝 안 할 것 같은 사람이.”
윤기가 낮게 웃으며 시호의 희고 말랑한 뺨을 톡톡 두드렸다.
“이런 작은 도발에도 발끈하는 모습이 귀여워서 못 멈추겠습니다. 그러니까 이건 선배 잘못이 커.”
누가 그렇게 귀여우랬나.
덧붙이는 말이 시호의 얼굴을 뜨겁게 만들었다.
“자기 칭찬에는 금세 이렇게 붉게 물드는 얼굴도 예쁘고.”
“……그만해. 누가 들으면 우리 진짜 신고당할지도 모른단 말이야.”
“부끄러워하는 모습은 귀여우면서 예쁘고.”
“진짜!”
시호가 그의 가슴을 주먹으로 팟, 치자 그가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알았어요. 그만할게.”
윤기가 그녀의 아랫입술을 살짝 머금었다 놓았다.
“마음 같아선 하루 종일 말해 주고 싶지만, 그랬다간 가는 내내 선배가 날 안 봐 줄 것 같네요.”
방금 전 자신의 입술이 닿았던 곳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린 그가 다시 시호의 어깨를 감쌌다.
“제이슨은 내일 만나기로 했으니까 도착하면 하루는 자유 시간인데.”
부끄러움도 잠시.
시호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시차 적응도 해야 하고 아무래도 장거리 비행이니 쉬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아, 확실히 그럴 것 같긴 하다.
아무리 침대가 딸린 퍼스트클래스라도 비행기 안에서 숙면을 취하기는 어려울 듯싶었다.
즉흥적으로 여행을 왔다는 데 대한 흥분이 가시지 않을뿐더러 낯선 곳에서 마음을 놓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무영관에 딸린 별채에서 잘 때도 약 일주일 동안은 깊게 자지 못해서 몸이 피곤했었다.
“내일부터 2박 3일은 호텔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검도장에서 교검(校劍)하기로 했습니다. 그 이후 돌아가는 날까지는…… 우리끼리 시간을 보내면 됩니다.”
윤기의 말에 시호의 얼굴이 환해졌다.
“정말?”
그가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메이플 시럽을 뿌린 팬케이크 먹고 싶다고 했었죠?”
“응. 그리고 저녁에는 돌아다니면서 거리 구경도 하고, 맥주도 마시고 싶어. 아, 와인도! 길거리 공연 같은 거 하면 좋겠다. 그것도 버킷리스트에 있거든.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밤에 자유롭게 돌아다니기.”
“……그랬습니까.”
“이런 즉흥 여행도 썼었지, 참. 눈 감고 지구본을 돌린 뒤에 손가락으로 아무 데나 찍는 거야. 그래서 걸리는 나라로 곧장 떠나는 것도 해 보고 싶었어.”
다이어리에 버킷리스트를 적을 때마다 그것을 이루어 낸 스스로를 상상하는 시간이 시호가 누릴 수 있는 작은 행복이었다.
그런 날도 있었구나, 싶어서 시호가 작게 미소했다.
“고마워. 윤기 네 덕분에 하나씩 하나씩 이뤄 가고 있어.”
“…….”
“맞다! 팀버트레인 커피도 꼭 마셔 볼 거야.”
즐겁게 이야기하는 그녀의 얼굴이 눈부시게 빛나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진작 갈 걸 그랬습니다.”
입가에 힘을 꾹 준 윤기가 시호의 뺨을 매만졌다.
“앞으로는 같이 자주 떠나요. 어디든. 아무리 먼 곳이라도 좋으니.”
나지막한 그의 속삭임이 귓가에 달콤히 맴돌았다. 시호는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 가장 적당할 때에 일이 실현된다고 생각해. 그게 나한테는 지금이고.”
시호가 그의 허리를 마주 안았다.
“서로 마음을 확인하고. 너와 함께 있는 지금이 가장 적당한 때라고 생각해.”
하얀 이마에 입을 맞춘 윤기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입술을 겹쳐 왔다.
아이스크림을 먹듯 부드럽게 핥고 물던 윤기가 혀를 밀어 넣으려 한 순간.
시호가 고개를 뒤로 물렸다.
왜? 하고 묻는 듯한 윤기의 눈에 불만족이 가득 어려 있다.
“……기내잖아.”
“부르기 전에는 아무도 안 옵니다.”
문이 닫혀 있는 이곳은 둘만의 밀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다시 봐도 정말 좋다. 아파트를 통째로 들여온 것 같아.”
윤기처럼 체격이 큰 사람도 넉넉히 앉을 수 있는 1인 좌석과 그 맞은편에는 이탈리아 유명 가구 브랜드의 최고급 가죽으로 된 소파베드가 있다.
그리고 비록 제한 시간이 있기는 하지만 샤워를 할 수도 있었다.
고급스러운 어메니티를 뜯어보는 재미가 쏠쏠했고 심지어 폭신폭신한 슬리퍼까지 마음에 쏙 들었다.
이보다 더 비싼 것들을 사용했을 때도 아무런 감흥이 없었는데.
역시 누구와 함께 있느냐에 따라 기분과 감정이 달라지는 모양이다.
“기윤기 덕분에 좋은 경험 해 본다. 너무 행복해.”
“그래서. 그렇게 예쁜 말로 빠져나가시겠다?”
앗, 들켰네.
시호가 멋쩍은 듯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작게 웃었다.
“그러다 소리라도 새어 나가면 어떡해. 지나가던 승무원이 듣기라도 하면.”
맞잡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수줍게 속삭이는 그녀가 사랑스러워서 끌어안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윤기는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왜?”
“빨리 내리고 싶어서요.”
이 좋은 퍼스트클래스도, 시호에게 끊임없이 사랑을 표현하고 싶은 윤기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이래서 집이 최고라고 하나 봅니다.”
“그렇다고 해서 집에 빨리 가자고 하면 안 된다?”
시호가 부끄러워하는 표정으로 덧붙였다.
“나 너랑 해 보고 싶은 거 엄청 많단 말이야. 그리고…… 비행기에서 내리면 호텔 가잖아.”
아. 귀여워서 미치겠다.
그가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
웰컴 드링크인 샴페인을 시작으로 캐비어, 연어 그릴, 치즈와 허브가 가미된 으깬 감자, 디저트로는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셰프가 직접 탑승하여 주문부터 요리까지 손수 제공하는 시스템이기에 여타의 기내식과는 차원이 다른 맛이었다.
기내에 있는 라운지를 구경한 그들은 다시 자리로 돌아와서 영화를 틀었다.
헤드폰은 시호만 썼다. 윤기는 그녀의 옆에 있는 것이 목적이므로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했다.
그렇게 한 사람은 소리를 듣지 않고 화면만 보는 이상한 형태이지만, 어쨌든 로맨틱한 분위기를 낸답시고 아주 달달하다는 로맨틱 코미디 영화를 선택했다.
서로 국정원 요원인 것을 모른 채 사랑에 빠진 남녀 주인공이 검도를 하는 장면이 나왔다.
여주인공이 비단결 같은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호면을 벗는 장면에서 시호는 헛웃음이 터졌다.
“저런 장면 나올 때마다 검도하는 모습을 실제로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는지 물어보고 싶다니까.”
실제로는 한데 모아 질끈 묶은 머리 위에 땀에 전 면수건을 두른 우스꽝스러운 모습이다.
저렇게 화장을 하지도 않을뿐더러 보송보송할 수도 없다.
거친 숨을 내쉬며 한껏 지친 표정으로 호구를 정리하는 것이 현실이다.
“하긴, 현실을 반영하면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한테 어떻게 반할까 싶냐만.”
“남자 주인공의 시선에는 저렇게 보이는 게 아닐까요?”
응? 하며 윤기의 어깨에 기대 있던 시호가 상체를 일으켜 그의 얼굴을 보았다.
“여자 주인공이 어떤 모습이든 저 남자의 눈에는 무작정 예쁘게만 보일 겁니다. 내가 그랬으니까.”
윤기가 시호의 뺨을 감싸 쥐며 미소를 지었다.
“선배가 어떤 모습이든 너무 예뻐서 눈을 뗄 수가 없었거든.”
교복을 입은 서시호도, 도복을 입은 서시호도. 운동을 하기 전의 서시호도, 운동을 하고 난 후의 서시호도.
“한껏 꾸민 그 어떤 여자보다도 훨씬 더 예쁘고 사랑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저렇게 표현한 것 아닐까요.”
쿵. 쿵. 쿵.
격렬하게 운동을 하고 난 후처럼 심장이 세게 뛰었다.
자신을 향한 그의 다정한 시선과 달콤한 미소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빨개진 시호의 두 뺨을 본 윤기가 짓궂게 물었다.
“나한테 또 반한 것 같은 표정인데.”
“아, 아니거든?”
“정말 아닙니까?”
스윽. 그가 그녀 쪽으로 상체를 기울이며 귓가에 더운 숨을 불어 넣었다.
“읏.”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린 시호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작게 중얼거렸다.
“……맞아. 아주 조금.”
그가 피식 웃으며 시호의 목덜미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흠. 우리도 해 볼까요?”
“뭐를?”
“저거.”
그가 턱짓으로 모니터를 가리켰다.
어느새 화면 속에서는 도복을 입은 두 남녀가 입술을 겹치며 뒤엉키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넓은 도장.
구석에는 다른 부원들의 호구와 죽도가 늘어져 있다.
그곳에서 두 사람은 정신없이 서로를 탐하기 시작했다.
‘신성한 도장에서 저게 무슨……!’
시호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어쩐지 호텔이나 침실에서의 애정 신보다 훨씬 더 자극적으로 보였다.
“무영단 정식으로 창단하고 나면 늦게까지 남아서 청소해야겠군요. 우리 둘이.”
자신의 귀를 살짝 베어 물며 속삭이는 그의 낮은 음성에 배 속에서부터 고인 열기가 솔솔 피어올랐다.
“마룻바닥에 어긋난 곳이 없는지 몸소 확인해 보죠.”
자신의 허리를 느릿하게 매만지는 손길에 은근한 뜻이 담겨 있었다.
“음. 그러고 보니 선배가 도복 입은 모습을 본 지 참 오래됐네요.”
“그러게. 학창시절엔 교복보다 더 자주 입었는데.”
하얀 피부는 흰색 도복도 감색 도복도 모두 잘 어울렸다.
질끈 묶은 머리 아래로 길게 뻗은 목덜미는 지나치게 깨끗해서 도리어 야릇한 느낌을 주었다.
그래서 도복을 입은 시호를 보고 입을 벌리던 남학생들이 참 많았다.
그 시선들로부터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 윤기가 눈으로 얼마나 많은 레이저를 쏘아 댔는지 시호는 전혀 모를 것이다.
“보고 싶네. 도복 입은 서시호.”
나만. 윤기가 시호의 손등에 촉, 입을 맞춘 뒤 다시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모니터 속의 남녀는 절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 흡, 아아……!
- 선배 안이 너무 따뜻해서 나오기 싫어요. 멈출 수가 없어.
- 그럼 계속 이대로 있자…….
낯 뜨거운 대사에 시호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하필 저쪽도 여자가 선배다.
그녀는 은근히 헤드폰의 음량을 줄였다. 밖으로 들릴 리가 없는데도 어쩐지 그래야 할 것만 같았다.
“뭐라고 하기에 얼굴이 그렇게 빨개졌습니까?”
“뭐, 뭐가? 아무 말도 안 하는데?”
“저렇게 계속 입을 움직이고 있는데. 정말 아무 말도 안 합니까?”
윤기가 그녀의 헤드폰으로 손을 가져가자.
“안 돼!”
시호가 그의 팔을 두 손으로 끌어안으며 필사적으로 막았다.
“아냐, 아무것도 안 들려!”
“그럼 헤드폰 고장이라는 소리인데. 승무원을 부를까요?”
“아니!”
그러자 밖에서 똑똑 하고 작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손님, 괜찮으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