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화
캐나다?
갑자기 그게 무슨?
“이민을…… 가자는 거야?”
시호는 여전히 진지한데, 윤기의 눈은 낭창 휘어졌다.
“제가 그러자고 하면. 그래 주시겠습니까?”
뜬금없이 캐나다 이민행이라니.
그럼에도 시호는 생각해 보았다.
물론 윤기와 함께라면 어디든 좋을 테지만…….
그녀의 목표와 꿈은 한국에 있었다.
한국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검도선수단을 창립하여 선수들이 편안한 환경에서 운동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
더 나아가서는 검도 꿈나무들, 특히 자신처럼 어려운 환경에서 운동을 이어 가는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아니. 미안해. 갈 수 없어.”
시호는 고개를 저었다.
“너와 어디든 같이 가고 싶은 마음이지만. 아직 이루고 싶은 것들이 많아서 떠날 수가 없어.”
윤기를 세게 붙잡고 매달려도 모자랄 판에 밀어내는 꼴이다.
실망할까?
그래서 지친 넌…… 날 떠나갈까?
“선배 뜻은 그렇군요.”
시호의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다음에 이어질 윤기의 말을 듣고 싶기도, 입을 막고 싶기도 했다.
“자, 잠깐!”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손을 들어 그의 입을 막으려던 시호가 응? 하고 눈을 깜빡였다.
“방금 뭐라고 했어?”
“저도 선배와 같은 생각이라고 했습니다. 선배 옆이면 어디든 상관없어. 선배가 한국에 있고 싶다면 있고, 북극이든 남극이든, 가고 싶은 곳은 어디든 따라갈 테니까.”
“그럼…… 캐나다는 뭐야?”
그가 씩 웃었다.
“캐나다에 본사를 둔 회사에서 후원을 해 주기로 했습니다. RS그룹에 맞먹는 대기업이죠. 어쩌면 더 위일까.”
시호의 동공이 크게 열렸다.
“선배가 그들에게 받은 위자료를 전부 돌려주고도 남는 장사라는 얘기입니다.”
“어, 어떻게? 도대체 언제 그런 엄청난 계약을 한 거야?”
놀란 그녀의 표정이 귀여워 미치겠다는 얼굴로 바라보던 윤기가 손을 뻗었다.
팔과 허리가 휙 낚아채인 시호는 어느새 그의 허벅지 위에 앉아 있었다.
“기업 회장이 전부터 제 오랜 팬이라고 했습니다. 한국의 국가대표 선수라는 것을 고려하여 유니폼에 기업 로고도 부착하지 않겠다고 하더군요.”
“그럴 리가……. 조건은?”
“그저 검도에 매진해 달라고 했습니다. 제가 유명해진 덕분에 캐나다에서 검도를 하는 한국인들 기가 산다나 봅니다. 후원을 받아들이지 못하겠으면 와서 가르침이라도 주었으면 좋겠다고.”
시호는 믿을 수 없었다.
어떻게 그 이유만으로 덥석 후원을 해 줄 수가 있단 말인가.
“좋아하는데 이유가 있느냐고 하더군요. 그 말을 듣고 이해했습니다. 저도 선배에게 뭐든 다 해 주고 싶으니까.”
비록 돌아오는 게 없다고 할지라도.
덧붙인 그가 시호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그래도 되는지 모르겠어. 아무리 그래도 기업을 경영하는 사람인데 순수하게 후원만 해 줄 리가 없을 거야.”
RS그룹 며느리로 살며 가까이서 접한 그들에게서 ‘순수’라는 단어는 찾아볼 수 없었다.
“진짜인지 아닌지 가서 확인하는 건 어떠십니까. 일주일 정도.”
캐나다에서 일주일을?
그것도…… 윤기와 함께?
“할 일이 많은데.”
“어떤 일입니까?”
“마크 제작 잘 되고 있나 체크하고. 용진 선배 만나서 계약서 쓰고, 마케팅 맡아 줄 직원도 소개받고. 주문한 비품 잘 제작되고 있는지도 확인해야 하고.”
“음. 일주일 미룬다고 해서 큰일이 생길 것 같지는 않군요. 전화로도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는 일이고. 계약서는 다녀온 이후에 써도 지장 없을 듯하고.”
윤기의 말에 시호는 설레기 시작했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내일 밤 비행기로 가는 건 어때요?”
놀라움, 또 놀라움이다.
“그, 그렇게 빨리? 너 훈련은 어쩌고?”
“내일부터 자율훈련권 행사하기로 했습니다.”
자율훈련권?
그게 무엇이냐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시호가 무척 귀여웠다.
윤기는 그녀의 볼을 감싸고 입술에 쪽! 소리가 나도록 뽀뽀를 했다.
“최소 하루, 최대 열흘 동안 자율적으로 훈련하는 거예요. 매일 훈련일지 기록해서 복귀 후 제출하면 됩니다.”
아하, 그런 제도가 있었구나.
납득하는 것도 잠시.
“하지만 항공권이랑 호텔 예약도 해야 하는데.”
“아. 그건 준비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정말 놀랄 일뿐이다.
시호는 방금처럼,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어떻게?’라고 묻는 수밖에 없었다.
“후원을 해 주기로 한 기업의 대표인 제이슨에게 연락하니 곧바로 보내 주더군요. 시차 때문에 금세 답변이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마침 재미있는 책을 읽느라 깨어 있었다면서 좋아했습니다. 그 책을 행운의 표지로 삼겠다고 하면서요.”
또한 제이슨은 책을 읽기 전에 윤기의 시합 영상을 보았다고 했다. 시간이 나는 틈틈이, 혹은 마음이 해이해질 때마다 기 선수의 영상을 시청한다면서.
“제가 원하는 날짜와 시간에 맞추겠다고 해서 가장 빠른 것으로 달라고 했습니다. 그게 내일 밤 9시 비행기인데.”
윤기가 시호의 손으로 자신의 뺨을 감싸며 그녀의 손바닥에 입술을 묻었다.
“어떠십니까?”
나른한 눈빛은 명백한 유혹을 던지고 있었다.
달싹이는 입술에, 손바닥이 간지러웠다. 또한 심장도.
“짐도 싸야 하고, 준비해야 할 것도…….”
“필요한 건 가서 사면 됩니다. 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제이슨이 필요한 건 전부 준비했다고, 몸만 오면 된다면서 자신만만해했거든요.”
커다란 손이 시호의 옷 속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읏.”
곧바로 둔덕을 덮은 뜨거운 온기에 시호가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럼 자러 갈까요?”
“내일…… 하아…… 저녁 비행기라면서…….”
원을 그리는 그의 손가락 끝에서 살살 퍼져 가는 쾌감에 시호의 몸이 움찔거렸다.
윤기가 그녀의 귓불을 입술로 지분거리다가 살짝 깨물었다.
“여행 전날은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설레는 겁니다.”
“흡.”
“그러자면 체력을 소모해야겠네요. 단기간에, 강하게.”
입술이 겹쳐짐과 동시에 혀가 뒤엉켰다.
농밀한 숨결에 담긴 진한 유혹이 이곳저곳을 핥고 빨며 촉촉한 흔적을 남겼다.
그대로 시호를 안아 든 윤기는 그녀의 목덜미와 어깨에 입을 맞추며 침실로 향했다.
사르락.
침구가 구겨졌다.
팔을 교차하여 티셔츠를 단번에 벗어 버린 윤기가 시호의 위로 내려앉으며 무게를 실었다.
시호는 배 속이 꽉 조여 오는 것을 느끼며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들은 매번 닿을 때마다 서로에게서 새로운 자극을 느꼈다. 안아도 안아도 늘 부족하다는 점만 같았다.
“잠…….”
깐. 이어질 말은 윤기의 입술에 무자비하게 먹히고 말았다.
온몸이 바싹 달아올랐다. 그것을 느꼈는지, 윤기가 벅차게 파고들었다.
그의 말대로 단기간에, 강하게, 시호는 체력을 심하게 소모했다.
덕분에 사랑을 나누자마자 그의 품에서 실신하듯 잠이 들었다.
시호의 이마에 입을 맞춘 윤기가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얼굴을 쓸었다.
“잘 자, 우리 시호.”
***
창밖을 바라보던 시호가 한숨 같은 웃음을 지었다.
“왜 그러십니까?”
윤기의 물음에, 상공에 펼쳐진 구름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시호가 답했다.
“어이가 없어서.”
“뭐가?”
“이렇게 갑작스러운 여행은 처음이야. 어젯밤에 가기로 결정해서 다음 날 저녁에 캐나다행 비행기에 타고 있다니.”
그들은 캐나다 밴쿠버행 항공기에 몸을 싣고 있었다.
제이슨은 퍼스트클래스 항공권과 숙소로는 전 세계에 체인이 있는 5성급 호텔을 준비해 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밴쿠버 공항에 도착하면 리무진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했다.
[기윤기 선수를 모시는데 이 정도는 기본이지요. 동행하시는 분께서도 부디 편안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기분은?”
윤기의 나른한 미소에 시호가 눈을 휘며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좋아. 아주.”
요란하게 준비하지 않아도 여행을 갈 수 있구나.
언제 어느 때든, 이제 내가 원하면 뭐든 할 수 있다는 것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윤기가 아니었더라면 아주 늦게 알게 되었겠지.
이 상쾌함과 떨림을, 기대감과 흥분을.
윤기는 시호의 어깨를 감싸며 그녀의 이마에 부드럽게 입술을 눌렀다.
“시호가 좋다니까 나도 좋네.”
“흐음.”
“왜?”
“양심이 좀 없다 싶어서?”
그에게 기대 있던 시호는 상체를 일으켜 눈을 가늘게 뜨고 윤기의 얼굴을 보았다.
“저녁에 일찍 재워 주기는 했는데.”
“…….”
“아침에 일찍 깨워서 오후까지 괴롭히던 게 누구더라?”
유구무언.
입이 있으나 윤기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오늘 아침, 짐을 싸야 한다며 시호를 일찍 깨운 윤기.
한 번에 일어나 얼른 씻고 나온 시호는 배시시 웃으며 설레어 했다.
[밴쿠버는 일교차가 심하구나. 좀 싸늘한 편이라니까 얇은 니트랑 겉에 걸칠 카디건도 가져가야겠다. 흐음, 갑자기 비를 만날 수도 있다는데… 우산은 거기에서 사면 되겠지?]
[그럴 겁니다.]
[팬케이크에 메이플 시럽 뿌린 거 꼭 먹어 볼 거야. 와, 맥주랑 와인도 맛있다네? 몰랐어. 이것도 마실 수 있음 좋겠다. 단풍 모양 인형도 있을까?]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윤기는 가는 손목을 확 붙잡아 끌어당겨 다시 침대에 눕히고 무게를 실어 왔다.
놀라 벌어진 시호의 입을 그대로 삼키고 혀를 밀어 넣으며 집요하게 휘감고 빨아 댔다.
[앗, 잠깐……!]
[비행기 타면 10시간 가까이 붙어 있는데 아무것도 못 하잖아요. 응?]
[흣…….]
그 바람에 가뜩이나 부족했던 시간이 더더욱 줄어들어서, 하마터면 시간에 맞추지 못할 뻔했다.
“캐나다까지 비행시간이 참 깁니다.”
“비행기에서 푹 자게 해 주려고 그런 거다?”
“똑똑하네, 우리 시호.”
초승달을 엎어 놓은 듯 눈을 휘며 윤기는 시호의 머리를 부드럽게 슥슥 쓰다듬었다.
“응. 그러려고 그런 겁니다.”
“기윤기, 뻔뻔함이 날로 늘어 간다?”
그녀의 손을 붙잡아 자신의 뺨을 덮은 윤기가 눈동자를 스륵 밀어 올렸다.
“그래서 싫으십니까?”
멈칫한 시호의 동공이 흔들렸다.
기윤기, 이 치사한……!
‘그런 눈빛으로 물어보면 싫다고 대답할 수가 없잖아!’
남들에게는 이빨을 드러내는 사나운 맹견이 제 주인에게는 ‘사나운 게 뭐죠?’라는 울망울망한 눈망울로 바라보는 듯했다.
“기윤기 넌 선수가 분명해.”
“그러니까 후원도 받고 서시호 단장님한테 스카우트 제안도 받지 않았겠습니까.”
“흥. 너 반대편에 가서 앉아.”
그들이 탄 퍼스트클래스는 1인 좌석 맞은편에 긴 소파가 놓여 있었다. 버튼을 눌러 펼치면 침대가 된다.
두 사람은 그곳에 나란히 앉아 있는 중이었다.
시호의 말을 듣자마자 윤기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건 안 됩니다.”
“나 내 자리로 돌아갈 거야.”
윤기가 그녀의 어깨에 이마를 대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뭐야, 귀엽게. 대형견도 아니고. 마음 약해지게시리.’
윤기가 그녀와 손깍지를 끼며 애원하듯 보았다. 제 손을 만지작거리며 쓰다듬는 손가락에서 미련이 뚝뚝 떨어졌다.
“정말 가실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