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화
“면수건은 다 젖었지?”
언제나 면수건이 땀에 흥건히 젖을 정도로 훈련을 하던 윤기다. 그래 놓고 지친 기색 하나 없이 숨을 고르는 모습에 혀를 내두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지금도 태홍과 수원, 둘 다 상대했을 텐데 땀만 흘릴 뿐 안정된 호흡으로 냉정을 유지하고 있다.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경기하는 것을 직접 보니 얼마나 대단한 선수인지 새삼 깨닫는다.
‘창단 준비 제대로 점검해야겠다. 이런 선수를 모셔 오는데 서툰 점이 있으면 안 되지.’
윤기의 이마를 닦아 준 시호는 자연스럽게 목을 닦아 주려다가 태홍과 수원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의 손에 손수건을 쥐여 주었다.
“수고했어. 오늘 훈련량이 상당한 것 같던…….”
윤기는 제 손에서 빠져나가는 시호의 손을 붙잡고 입술로 가져갔다.
손바닥에 닿은 윤기의 입술은 무척이나 뜨거웠다. 자국이 남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윤기야, 여기…….”
“보고 싶었습니다.”
나른히 속삭이며 저를 응시하는 그의 눈빛 또한 입술의 온도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뜨거웠다.
마법에라도 걸린 듯, 그의 눈에 사로잡힌 시호는 움직일 수 없었다. 둘만 있는 장소가 아닌데도, 윤기의 눈빛과 목소리는 순식간에 단둘뿐인 세상으로 그녀를 데려갔다.
“미치는 줄 알았습니다. 돌아오시지 않을까 봐.”
“……온다고 했잖아.”
“예. 그러셨죠.”
작게 대답하는 윤기의 강인한 눈동자에 희미한 불안이 어려 있었다.
안아 주고 싶다는 생각에 시호가 한 걸음 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간 순간.
정리를 마친 수원과 태홍이 이리로 다가오는 것을 본 시호는 황급히 그에게 붙잡힌 손을 휙 빼냈다.
‘하마터면 정말로 덥석 안아 버릴 뻔했어. 둘만 있는 것도 아닌데.’
조심해야겠다. 윤기와 함께 있으면 때때로 그들이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 잊어버리고 만다.
시호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윤기의 눈동자에 불안과 정염이 불티처럼 일었다.
당장 끌어안고 입을 맞추며 불안을 해소하고 싶었다.
그가 한 걸음 더 다가간 순간.
“선배님!”
오랜만에 찾아온 주인을 보는 강아지처럼 두 녀석의 눈동자가 똘망똘망 해맑게 빛났다.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운동하고 있다고 들어서.”
“아쉽다, 저희 방금 대련 다 끝났는데. 아니면 호구 다시 쓸까요?”
“영상 촬영하고 있는 것 같던데. 나도 보내 줘. 그걸로 볼게.”
“영광입니다!”
“선배님, 혹시 저희와 저녁 같이 안 드시겠습니까? 저희가 쏘겠습니다!”
그들을 바라보는 윤기의 눈빛이 살벌했다. 태홍과 수원은 흠칫하며 꼬리를 내렸다.
“아, 생각해 보니 저희가 약속이 있었네요. 하, 하하. 다음에 같이 저녁 식사 어떠세요?”
“좋지. 저번에 너희가 고기 사 왔으니까 그땐 내가 살게.”
“안 그러셔도 되는데. 하지만 저는 선배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는 착한 후배니까 감사히 따르겠습니다.”
태홍과 수원이 허리를 90도로 숙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외모가 성숙해진 것 말고는 고등학생일 때와 달라진 게 하나도 없는 귀여운 후배들이었다.
시호가 살짝 웃으며 그래, 하고 대답했다.
“……선배, 씻고 오겠습니다.”
낮고 굵은 음성이 화기애애한 그들의 사이를 반으로 쩍 갈랐다.
“그, 그렇지. 그럼 선배님, 조심히 가십시오!”
“다음에는 저희 대련 직접 참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알았어. 오늘 고생 많았다.”
마무리 인사를 주고받으니 마치 우이고 검도부 시절로 되돌아간 기분이 들어서 모두의 마음이 따뜻해졌다.
한 사람만 빼고.
윤기는 무표정한 얼굴로 뒤돌아서서 샤워장으로 향했다. 태홍과 수원도 얼른 그의 뒤를 따랐다.
“휴우우우.”
태홍, 수원과 대화를 하는 동안 줄곧 저를 바라보고 있던 윤기에게서 강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몸에 어찌나 힘을 들어갔는지 허리가 다 아팠다.
“오늘 운동이 많이 힘들었나.”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괜히 중얼거려 보았다. 스스로를 진정시키기 위해서다.
“……하아.”
시호도 전남편, 시댁과 더는 얽히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계약서에 서명을 했으므로 연락을 받지 않을 수도, 만나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까짓 위자료, 더럽고 치사해서 안 받아 버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며 맨몸으로 나올 수도 없었다.
자신의 앞날과 부모님의 노후, 그리고 검도계에 조금이라도 힘이 되려면 자금이 필요했다.
그룹이 현재의 위상을 갖기까지 자신의 공헌이 결코 적지 않으니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아야 된다고 생각하여 시호는 그에 걸맞은 위자료를 요구했다.
그리고 시댁은-사실 재혁이 강하게 밀어붙여 준 덕분에-그 조건으로 계약서를 내걸었다.
양측의 합의하에 만들어진 조건을 이행하지 않으면 위법 행위로 처벌을 받을 수도 있기에 반드시 지켜야 했다.
순간 시호는 덜컥 겁이 났다.
윤기가 이런 자신의 상황에 지쳐서 결국 떠난다고 말한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은 보내 주는 것뿐이겠지만……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아팠다.
아니, 단순히 ‘아프다’라고 표현하기엔 쓰림의 정도가 너무 심했다. 재혁과 이혼을 할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짧은 시간 동안 윤기는 제 마음에 참 깊게도 눌러앉아 버렸다.
만약 그 애가 떠나기를 원한다면 보내 주어야 할 텐데. 그럴 수 있을까 싶었다.
부상을 당했을 때, 더 이상 선수 생활은 불가능할 것 같다고 했었던 의사의 말만큼이나 슬플 것 같았다.
눈물이 핑 돌 것 같아서 시호는 손바닥으로 뺨을 가볍게 때렸다.
‘미쳤나 봐, 서시호. 사춘기는 지났고, 갱년기 오려면 멀었는데. 이게 웬 청승이야? 갱춘기도 아니고.’
시호는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했다. 이럴 때 호구를 착용하고 격렬하게 뛰다 보면 잡념이 사라질 텐데, 그럴 수 없어서 아쉬웠다.
사실, 아까 대련을 하는 윤기와 수원을 보면서 참 부러웠다. 부상만 아니었더라면 나도 아직까지 운동을 하고 있었을 텐데.
이혼녀가 아닌, 그저 검도선수이자 선배인 서시호로 윤기와 가까워질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순간의 분위기에 취해서 윤기와의 만남을 너무 가볍게 생각한 게 아닐까.’
계속해서 재혁이나 시댁과 연락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과연 윤기가 견딜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라도…….’
“선배.”
그녀의 생각을 툭, 끊기라도 하듯 빠르게 샤워를 마친 윤기가 시호에게 다가왔다. 젖은 머리카락을 타고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모습이 무척 색정적이었다.
시호는 어두운 마음을 애써 억누르고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태홍이랑 수원이는?”
“아직 샤워 중입니다.”
“인사를 하고 가야 하나?”
“안 그러셔도 됩니다.”
윤기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 모습이 고등학생일 때와 똑같아서 시호가 작게 웃었다.
“그래. 가자, 그럼.”
그녀가 몸을 돌리자 윤기가 잠깐 미간을 찌푸리더니, 그녀의 손을 붙잡고 가느다란 마디 사이사이에 제 손가락을 밀어 넣어 손깍지를 끼었다.
“누가 보면…….”
“안 됩니까?”
날 선 목소리에 시호는 움찔했다.
“애들이 볼지도 몰라.”
“상관없습니다.”
윤기의 눈동자가 집요하게 시호를 좇았다.
“선배는 어떠십니까?”
자신도 물론 좋았다. 하지만 윤기에게도 좋은 일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시호에게서 곧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자, 윤기는 붙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마치 조금이라도 힘을 빼면 그녀가 도망이라도 갈 것처럼 강한 힘이었다.
“선배.”
“일단 갈까? 배고프지. 저녁 뭐 먹을까?”
시호가 말을 돌리자, 윤기의 눈 밑이 떨렸다. 지금은 그녀의 말을 따라 준 뒤, 온전히 둘만의 공간에서 다시 대화를 나누는 게 좋을 듯했다.
공교롭게도 각자 차를 가지고 나와서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에는 떨어져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아파트에서 봐.”
“제 차를 두고 가겠습니다.”
“금방인데 뭘.”
대수롭지 않은 시호의 대답에 윤기의 표정이 굳었다. 자신은 잠깐도 떨어지는 게 싫은데, 그녀는 아닌가 보다.
마음의 크기와 깊이에서 차이가 나는 것은 잘 알고 있었고, 또 당연한 것이지만…….
막상 시호가 저와 떨어져도 아무렇지도 않아 하는 모습을 보니 속이 쓰리고 가슴이 욱신거렸다.
그녀가 제 마음을 받아 준 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생각했는데, 자꾸만 욕심이 났다. 저처럼, 시호도 자신만 생각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커져만 갔다.
“그럼 이따 보자.”
미련 없이 제 손을 놓고 붉은 SUV에 몸을 싣는 시호를 보며, 윤기는 비어 버린 손을 꾹 말아 쥐었다.
시호는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주차되어 있는 검은 SUV에 윤기가 올라타는 것을 확인하고는 차를 출발했다.
혼자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오늘 성북동에서 벌어졌던 일과 민주, 그리고…… 윤기.
윤기와 진지하게 대화를 해 봐야겠다.
이혼을 했지만 전남편과의 인연을 확실히 끊을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정말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 앞으로도 종종 오늘과 같은 상황이 발생할 텐데 그때마다 견딜 수 있겠는지를.
자신에 대한 감정을, 그저 이루지 못한 첫사랑에 대한 아쉬움을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것은 아닐까.
시간이 조금 지나면 후회하지는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자, 심장에 큰 구멍이 뚫린 것처럼 허전하고 아팠다.
그럴 확률이 높겠지. 이혼을 특별히 부끄럽다거나 창피하다고 여기지는 않지만 그래도 외모, 이력 모두 뛰어나고 앞길 창창한 미혼의 젊은 선수가 이혼녀에게 이리 열렬히 구애할 이유가…….
“갱춘기 서시호. 정신 차려.”
시호는 머리를 흔들었다. 지레짐작으로 윤기의 마음을 저평가하지는 말자. 그건 아주 못된 짓이다.
윤기가 날 좋아했던 이유는 ‘검도를 잘하는 주장 선배’라는 이유가 가장 컸을 텐데. 그 애에게서 저에 대한 환상이 걷히고 나면 드러날 제 모습에 자신이 없었다.
다시 겁쟁이가 되어 버린 기분에 시호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집에 도착한 그녀는 옷을 갈아입고 윤기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연결음이 얼마 울리지 않아 목소리가 들렸다.
- 선배.
“준비는 다 했어?”
- 예.
“저녁 먹기 전에 할 얘기가 있는데.”
윤기가 침묵했다.
“지금 내려가도 될까?”
- ……제가 가겠습니다.
“아냐. 내가 갈게.”
전화를 끊은 시호는 곧장 계단을 내려가 윤기의 집 문을 두드렸다.
벨을 누르기도 전에 열렸던 평소와는 다르게 몇 초 늦게 문이 열렸다.
그의 표정은 지금껏 봐 왔던 그 어떤 모습보다도 진중하고 무거웠다.
소파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
먼저 입을 연 것은 윤기였다.
“선배.”
“……응.”
“공식적으로 받은 위자료 외에는 모두 돌려주는 게 어떻습니까.”
시호의 눈이 커졌다. 윤기의 입에서 ‘위자료’라는 말이 나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가 그녀 쪽으로 몸을 돌리고 눈을 맞추었다.
“RS그룹에서 자유로워질 방법이 있는데.”
윤기가 시호의 손을 꽉 붙잡았다.
“저와 캐나다에 가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