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르쳐 주세요 선배-39화 (39/81)

제39화

상처받은 친구들의 얼굴을 보는 윤기의 마음은 물론 좋지 않았다.

하지만 언젠가는 꼭 해 줘야지 생각했던 말이다.

태홍의 경기 스타일은 온도계였다. 체온을 재는 대상에 따라 온도가 달라지는 온도계처럼, 상대에 따라 경기력이 좌우되었다. 상대가 약하면 공격적으로, 강하면 방어적으로.

수원의 경기 스타일은 경주마였다. 무조건 돌진하는 스타일로, 유효타격이 인정되는 공격이 많은 편이나 그만큼 본인도 점수를 내어 주는 것이 단점이었다.

윤기에게 뒤지지 않을 정도의 피지컬과 공격력을 지녔지만 그것을 잘 활용하지 못했다. 상대에 대한 파악이 필요했다.

“직업란에 검도선수라고 기재하지 않나? 모든 선수의 실력이 같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시청 소속 프로 선수 정도면 재능이든 노력이든 웬만한 사람보다는 뛰어나다는 걸 인정받은 거고.”

“으응…… 그, 그렇지.”

“그걸 생각하면서 최선을 다한다면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윤기에게서 처음 들어 보는 따뜻한 말(?)에 태홍과 수원은 감격의 눈물이라도 줄줄 흘릴 것 같은 표정이었다.

“기윤기, 짜식… 우리 막내가 형아들 생각하는 마음이 이렇게 깊었구나.”

“나 처음 들어 봐. 윤기야, 마이 보이!”

윤기에게 달려들려던 두 사람은 그가 인상을 팍 쓰자 깨갱, 뒤로 물러섰다.

“잠깐 나갔다 올 테니까 정비하고 있어.”

“정비?”

“영상 찍는다며.”

“너, 너도 같이 찍어 주게?!”

“싫으면 말고.”

“기윤기 전하! 폐하! 각하! 당장 정비하겠습니다요!”

헤헤, 웃는 친구들과 달리 윤기의 속마음은 어두웠다.

시호에게서 시댁에 다녀왔다는 말을 들었을 때 피가 역류하는 기분이었다.

거센 감정은 도무지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혹시 지금도 그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은 아닐까.

공유하고 있는 작은 기억이라도 끄집어내어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티끌만큼이라도 한 것은 아닐까.

불안하고 초조했다.

시호가 재혁과 마주 보며 미소하는 모습을 상상하자 숨통이 콱 막혔다.

만약…… 그녀가 다시 재혁에게 돌아간다고 하면 난 어떡해야 할까?

두 사람이 다시 합치게 되었다고 말한다면 난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그녀가 날 떠나간다면.

그럼 아마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그 자리에 붙박여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가 그대로 말라비틀어져 버릴 게 뻔했다.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렇게는 절대 안 돼.’

시호를 지키려면 자신의 선수로서의 경력, 명성, 재능 등 이용할 것은 죄다 이용해야 했다.

집안에 도움을 청하는 것은 최후의 보루였다. 시호는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지키고 싶었다.

‘RS그룹. 한재혁.’

무영단을 단숨에 국내 최고의 팀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아무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도록.

국내 검도계에 미치는 RS그룹의 입김이 너무 강하면, 해외의 기업을 스폰서로 끌어들일 의향도 있었다.

이미 윤기에게 무기한으로 기다리겠으니 답변을 달라며 제안한 기업이 몇몇 있었다.

지금도 국내에선 최고로 대우받고 있는 데다가 국가대표이니, 최대한 국내 기업의 후원을 받으려고 했지만.

재혁이 그룹을 앞세워 시호의 일을 방해하려 한다면 수단을 가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윤기는 자신의 오랜 팬이라던 한국계 캐나다 기업의 대표를 떠올렸다.

[당신이 대한민국의 국가대표라는 것을 잘 인지하고 있습니다. 저 또한 몸에는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고요. 그러니 나를 믿어 주세요. 기 선수가 마음 놓고 검도에만 매진할 수 있도록 후원하고 싶습니다. 기 선수 유니폼에 태극 마크 외에 그 어떤 로고도 달리지 않을 겁니다.]

[왜 그렇게까지 하십니까? 기업을 운영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좋아하는데 이유가 있나요? 그리고 말씀하신 대로, 기업은 이윤을 내는 것이 목적이죠. 제가 좋아하는 선수가 운동에만 매진하는 모습을 보면 제 컨디션도 좋아질 것이고, 그럼 능률도 올라가겠죠. 안 그렇습니까?

기 선수를 후원하는 기업이 어디인지 알아보는 이들이 많아질 테니 자연스레 홍보도 될 것이고요.]

거기에다, 하고 그는 덧붙였다.

[기윤기 선수가 유명해진 이후로, 검도장에서 한국인들이 어깨가 아주 으쓱합니다.]

[…….]

[아무래도 종주국인 일본에 비해 인지도나 영향력이 뒤처지는 경향이 있었는데, 역대급 완성형 선수가 한국에서 등장했으니 다들 난리입니다. 일본인들도 기윤기 선수라면 덮어놓고 인정하고요. 2인자라는 생각이 있었는데, 기 선수 덕분에 기를 펴고 삽니다. 하하.]

[말씀 감사합니다. 깊이 생각해 보겠습니다.]

[꼭 그래 주세요. 언제든 기다릴 테니까. 정 안 되겠거든, 항공권과 숙소 모두 제가 제공할 테니까 캐나다에서 검도를 하는 사람들에게 한 수 가르쳐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것만으로도 무한한 영광입니다.]

시호가 시댁과 인연을 완전히 끊지 못하는 이유는 위자료 때문일 것이다.

검도단 창단을 마음먹을 수 있었던 이유도, 무영관을 리모델링하는 비용도 모두 거기에서 비롯된 것이니까.

그것을 해결할 수 있다면 시호는 RS그룹의 간섭을 받지 않고 보다 더 자유롭게 살 수 있을 것이다.

윤기는 주먹을 꽉 쥐었다.

“긴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또 촌철살인이 남았어?”

“왜 아니겠냐. 솔직히 우리가 그동안 최선을 다하지 않은 건 사실이잖아. 윤기야, 우리 네 말 다 알아들었다. 더 하고 싶으면 해. 근데 3분은 넘지 않았으면 하는 작은 소망이 있…….”

“다가오는 세계선수권대회에 참가하자.”

윤기의 말은 가히 폭탄과도 같았다.

“세계선수권……? 국가대표만 뛸 수 있잖아.”

“우리더러 국가대표가 되라고?!”

“너도 그렇고 다른 베테랑 선수들이 떡하니 버티고 있는데?”

시호가 창단한 신생 검도단에서 국가대표가 나온다면, 그래서 세계 대회에서 입상을 한다면.

전국체전에서 우승을 차지한다면.

단숨에 시선이 주목될 거고, 그땐 RS그룹에 대항하여 후원해 줄 기업이 뒤에 버티고 있으니 괜찮을 것이다.

집안 배경을 이용하는 방법도 있었다.

할아버지의 제자들이 현재 정치권에 다수 포진해 있고, 큰아버지가 힘을 가진 의원이기도 하니 어느 정도 방패막이가 되어 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능력이 아니었다.

윤기는 온전히 스스로의 힘으로 시호를 지키고 싶었다.

“그 정도 각오도 없이 뭘 하려고.”

“그건…… 에라이, 그래! 대학 때부터 국가대표로 선출된 놈이랑 같이 훈련하는데 안 될 게 뭐야?!”

“그래, 진짜 죽도록 해 보자. 은퇴 전에 국대는 해 봐야지.”

검도는 ‘평생 검도’라고들 한다. 나이, 성별, 체급에 상관없이 평생토록 즐길 수 있는 운동이라는 의미인데, 요즘은 평생을 수련해도 부족하다는 의미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원과 태홍은 여전히 검도가 좋았다.

잘하고 싶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본인만의 검도에 집중하고 싶었다.

고등학교 때 주장으로서 부원들을 공정히 통솔하고 바른길로 잘 이끌어 준 시호라면, 제대로 검도를 마주 보게 해 줄 것 같았다.

“국가대표 선발전은 대회 개최 시점부터 약 1년 전에 열리지?”

윤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9개월 전에 뽑는다는 얘기가 있어. 1년 전부터 선발해 놓으면 해이해질 수 있다고.”

“그럼 선발전까지는 1년하고도 3~4개월 정도 남았다는 소리인데.”

죽도록 노력하면 못 할 것도 없을 것 같았다.

“그래. 세계선수권대회에서 1위는 한 번 해 보고 죽자!”

“국대는 해 보고 은퇴해야지. 긴기, 잘 부탁한다.”

태홍과 수원이 손을 모으고 윤기를 쳐다보았다. 작게 숨을 내쉰 그가 겹쳐진 손 위로 커다란 손을 올렸다.

“오늘부터 맹훈련이다!”

“그 전에. 난 감독실에 좀 다녀온다.”

“뭐 하려고?”

윤기가 무심히 답했다.

“자율훈련권 쓰려고.”

그들이 히익, 하고 놀란 숨을 들이마셨다.

자율훈련권은 선수들이 자유롭게 훈련할 수 있는 권리다.

코치진과 선수들 간의 두터운 믿음을 보여 줌과 동시에 혁신적이고 자유로운 분위기를 대내외에 홍보하기 위하여 연교시청의 지침에 따라 김 감독이 고안한 것이었다.

그러나 ‘보여 주기식’으로 만든 그 권리를 사용할 간 큰 선수는 없었다.

김 감독은 강압적이고 철저한 계획 아래 뛰어난 선수가 만들어진다는 주의였다.

본인에게 잘 맞는 방법이 타인에게도 그대로 좋을 것이라고 믿는 전형적인 이기주의자였다.

“그걸 쓰려고? 왜? 얼마나?”

“한 일주일 정도.”

“이, 일주일씩이나?”

윤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캐나다에 다녀오려면 그 정도는 시간이 필요할 듯싶다.

훈련은 2박 3일이면 충분할 거고.

나머지 시간은 시호와 함께 보낼 심산이었다.

“갔다 온다.”

***

생각보다 국 소장과의 얘기가 일찍 끝났다. 차에 탄 시호는 윤기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아직도 운동하고 있나?”

집에 갈까 하던 시호는 눈을 고쳐 떴다.

“주민센터 농구장이라고 했지. 흐음. 한번 가 볼까?”

만약 운동을 하고 있다면, 윤기의 경기를 가까이서 보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이혼 전 그룹 대표로 검도대회에 참석했을 땐 먼발치에서 호구를 쓴 모습만 겨우 보았고, 관계자들과의 회동 때문에 그나마도 끝까지 지켜보지 못했다.

마음을 정한 시호는 주민센터로 차를 몰았다. 농구장으로 쓰는 강당은 3층에 있었다.

계단을 올라가 슬며시 문을 열자, 바닥을 발로 빠르게 디디는 소리와 죽도와 죽도가 맞부딪치는 소리, 그리고 커다란 기합 소리가 훅 끼쳐 와 그녀를 감쌌다.

호면을 쓴 두 사람이 격렬하게 칼을 맞부딪치고 있었고, 태홍은 삼각대에 올려놓은 휴대폰으로 영상을 촬영하며 심판을 보고 있었다.

이미 한차례 뛰고 난 후인지 태홍은 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머리!”

선수들은 머리 뒤로 묶은 호구의 끈에 각각 청색과 백색의 끈을 매단다.

심판이 청색 깃발을 들면 청색 끈을 매단 선수의 점수가 인정되고, 백색 깃발은 백색 끈을 매단 선수의 점수가 인정된다는 뜻이다.

집중한 표정으로 대련을 지켜보던 태홍이 청색 깃발을 번쩍 치켜들었다.

“청, 승!”

경기를 시작했던 자리로 돌아와 마주 선 그들은 칼을 거둬들이고 오른발부터 뒤로 다섯 걸음 물러난 뒤, 고개를 살짝 숙이는 것으로 상대에 대한 예를 취한 후 무릎을 꿇고 앉아 호면을 벗기 시작했다.

휴대폰을 거치대에서 빼내고 몸을 돌린 태홍이 문 앞에 서 있던 시호를 발견했다.

“어? 선배!”

태홍의 외침에 동공이 커진 윤기가 고개를 휙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시호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안녕.”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난 윤기가 성큼성큼 그녀의 앞까지 걸어갔다.

“선배.”

“전화를 안 받아서. 아직 운동하고 있나 보다 해서 와 본 건데, 끝났나 보네?”

“예. 방금이 마지막 대련이었습니다.”

윤기의 이마에서 흐른 땀이 매끈한 뺨을 지나 목을 타고 옷깃 사이로 흘러 들어갔다.

관능적인 분위기가 풍겼다.

“오랜만에 본다. 운동하고 땀 흘리는 기윤기.”

도복을 입은 모습도 정말 오랜만이었다. 짙은 인디고 색의 도복은 그의 커다랗고 단단한 몸을 단정하게 감싸며 강인함과 절제미를 동시에 드러냈다.

사복을 입은 모습보다 이쪽이 훨씬 익숙할 정도로 수없이 봐 왔던 모습인데, 오늘따라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멋있었다.

‘왜 이러지? 별게 다 야하게 보이네. 나 진짜 이상해졌어.’

머릿속을 환기시키려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낸 시호가 윤기의 이마를 사뿐히 누르며 땀을 닦아 주었다.

숨 쉬는 것도 잊은 듯 윤기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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