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화
-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난 공사 현장에 들렀다 갈게.”
- 알겠습니다. 조심히 올라오십시오. 도착하면 연락하시고요.
“알……았어. 너도 다치지 말고.”
통화를 종료한 시호는 눈을 깜빡거렸다.
“내일 일어날 수 있겠지……?”
***
전화를 끊고도 윤기는 한참 동안 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선배]
운동을 마친 후 서울에 갔다 오겠다는 그녀의 메시지를 봤을 때 불안이 일었다.
그 남자가 서울에 있기 때문이다.
막내이모를 통해, 이혼을 했다고 해서 부부였던 사람들의 관계가 완전히 끊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걸 윤기는 잘 알고 있었다.
[부부의 세계란 참 알다가도 모르겠어. 죽이고 싶을 정도로 밉다가도, 나마저 저 사람을 밀어내선 안 된다는 짠함이 느껴질 때가 있거든.]
[…….]
[남들은 그냥 죽게 놔두라고 하는데, 막상 아이 얼굴 위로 겹쳐지는 애 아빠를 보고 있노라면 연민인지 동정인지 모를 감정이 속에서 연기처럼 올라와. 그럼 못 이긴 척 져 주기도 하고, 넘어가 주기도 하지.]
이해할 수 없다는 윤기의 표정에 막내이모가 픽 웃었다.
[알아. 미친 소리처럼 들린다는 거. 하지만 막 부부가 된 사람들도, 부부로 살고 있는 사람들도, 더 이상 부부가 아닌 사람들도 평생 부부가 뭔지 모를 거야. 나처럼.]
아이가 있어서 더 그런 것인지 모르겠다고, 막내이모는 웃으면서 말했다.
시호와 재혁 사이에는 아이가 없지만, 그래도 그들은 부부라는 이름으로 묶인 적이 있던 사이다.
자신은 끼어들 수 없는, 제 눈에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니 속에서 열이 확 들끓었다.
그 귀결은 언제나 자책이었다.
왜 나는 그때 선배를 붙잡지 못했나.
한 번이라도 마음을 표현했더라면, 어쩌면 시호가 결혼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그러나 아무리 이런 생각을 해 봤자 시간은 돌릴 수 없었으므로 답답함만 짙어졌다.
복잡한 머리를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정리할 수 있는 방법은 몸을 괴롭히는 것이다.
마침 다음 타임 체육관 대관 예약이 취소되어 윤기와 수원, 태홍은 간단히 도시락을 먹은 후 오후에도 운동을 이어 가기로 했다.
시호와 먹었던 <바람채 도시락 전문점>에서 점심을 주문한 윤기에게 수원과 태홍이 엄지를 치켜세웠다.
“와, 역시 절대미각 기윤기! 이런 데를 어떻게 알았냐?”
“내 인생 베스트 TOP 3에 들어가는 음식은 기윤기 본가에서 먹은 음식, 기윤기가 만든 요리, 그리고 기윤기가 주문한 도시락이다.”
도시락을 보니 더욱 시호가 생각났다. 점심은 제대로 먹었을까. 그 집에서 먹지는 않았을 거고.
……설마 한재혁과 같이 먹었을까.
윤기가 미간을 찌푸리자, 태홍과 수원이 컥, 하며 물을 마셨다.
“알았어. 조용히 먹을게.”
“나 한마디만 하고 닥칠게. 시호 선배 맘카페 글은 잘 해결됐어?”
윤기의 눈이 더욱 차가워지자 수원이 태홍의 배를 퍽 쳤다.
“커억……! 새꺄, 넘어올 뻔했잖아!”
“야, 기윤기 눈빛 보라고! 저 새끼한테 맞아 죽는 것보다 한 번 토하는 게 낫지! 오후 운동 하다가 실신하고 싶어?”
윤기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슥 쓸어 올렸다.
“와…… 저 새끼 저거 노린 거지?”
“방금 기윤기 보면서 꺅꺅거리는 여자애들 마음에 공감 제대로 됐다.”
별거 아닌 행동도 윤기가 하면 어딘가 우아하고 섹시했다.
집으로 돌아가서 거울 앞에 서서 윤기를 따라 해 보았지만 웬 그물에 걸린 오징어만 있을 뿐이었다.
“새끼. 넌 은퇴하고 모델이나 해라, 인마. 검도복 모델 하면 다음 날부터 한국 사람들 죄다 검도복 펄럭이면서 입고 다닐걸.”
“진짜 연예인 제의 들어올 것 같은데. 저번에 포털 메인에 인터뷰 사진 걸렸을 때도 연락 엄청 왔잖아. 근데 운동에 집중하겠다고 다 거절하고, 검도 관련된 인터뷰만 했지.”
“크. 나 같으면 CF 한두 개는 찍었다.”
“그래서…… 해결은 됐어?”
“야, 기윤기 자극하지 말라니까!”
윤기가 입을 열었다.
“인민주.”
“그게 누구야?”
“고등학교 때 선배랑 가장 가까이 지냈던 사람.”
윤기의 말에 수원이 아! 하며 손가락을 튀겼다.
“얼굴은 좀 예쁘장하고 몸은 마르고 다리는 좀 굵은 그? 가끔 운동 끝나고 나오면 체육관 앞에서 시호 선배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잖아. 맞지?”
“어어, 나도 기억나려고 함. 종종 눈 마주치면 습관적으로 눈웃음치던 사람이었는데.”
“특히 긴기 나오면 만화에서 캐릭터가 웃을 때처럼 눈동자 완전 사라지게 눈웃음쳤잖아. 난 무슨 유성 펜으로 선 그려 놓은 줄.”
“머리카락을 귀에 꽂았다가 뺐다가 뒤로 넘겼다가 난리를 친 것도 기억남. 탈모는 안 왔는지 몰라.”
수원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그 사람은 왜?”
“맘카페 글 올린 사람한테 잘못된 정보 흘린 사람.”
“뭐어어?!”
태홍과 수원의 입이 동시에 떡 벌어졌다.
“선배랑 제일 친하다면서?”
“그 사람, 우리 동문 모임 때도 계속 근처에 앉았었지?”
수원이 태홍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와, 넌 어떻게 그런 걸 다 기억하냐? 걸어 다니는 기억장치임?”
“네가 주위에 관심이 없는 거겠지. 재밌는 거 아니면 쳐다도 안 보잖아.”
“그건 그래. 킬킬.”
“근데 어떻게 고등학교 때 그 사람 모습은 기억하냐? 너 그 누나 좋아했냐?”
“아니. 얼굴이랑 몸에 비해 종아리가 좀 굵은 편이라서 기억함. 얼굴만 보면 세상 여리여리한데 다리 보면 우리 검도부 에이스인 줄.”
“미친 새끼.”
“아니, 비하하거나 과장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그렇다니까? 내가 언제 예쁘다 못생겼다 이렇게 평가했어? 객관적 사실을 서술하는 것뿐이라고, 나는.”
만담 같은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은 말없이 생각에 잠긴 윤기를 보며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너도 기분 참 그렇겠다.”
“선배랑 그 누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는 모르지만, 아무래도 긴기도 큰 비중을 차지할 것 같은데?”
“긴기, 그건 네 탓이 아니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미간을 살짝 좁히는 윤기를 보며 태홍과 수원은 입을 떡 벌렸다.
“너 설마 몰랐던 건 아니지?”
“……뭘?”
“이야. 이 자식. 주위에 관심 없는 건 알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티 팍팍 내는데도 몰랐단 말이야?”
“그 누나가 너 좋아하잖아.”
윤기의 동공이 크게 벌어졌다. 수원은 혀를 내둘렀고 태홍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미쳤다, 진짜. ‘나 너 좋아해’라고 얼굴에 광고하고 다녔는데도 몰랐다니.”
“근데 긴기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주위에서 그렇게 시끄럽게 꺅꺅거려도 얘가 신경 한번 쓰는 거 봤냐? 연습할 때 우리가 바로 앞에서 고릴라 흉내 내면서 웃겨도 호흡 한번 안 흐트러졌던 놈인데.”
그 흔한 인스타도 하지 않고 오로지 운동과 시호에만 미쳐 있던 윤기였으니 말 다했다.
“내가 볼 때 기윤기 너는 인스타를 할 필요가 있어. 네가 어떤 상태인지 알려 줘야 여자들이 딴맘 안 먹을 거 아니냐.”
“…….”
“물론 시호 선배 사정이 특수하니까 좀 어렵긴 하겠지만…… 그래도 여자 친구 있다는 정도만 알리면 저런 헛짓거리 하는 사람이 조금은 줄지 않겠냐?”
“나도 동의. 긴기 넌 모르겠지만, 너 소개시켜 달라고 건너 건너 조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 나한테 소개팅 들어온 줄 알고 좋아하면 꼭 기윤기 소개시켜 달래.”
태홍의 푸념에 수원이 동의한다는 듯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알지, 알지. 여자한테 관심이 없다고 말하니까 기윤기 선수가 게이냐고 물어보더라. 그냥 첫사랑을 못 잊고 있을 뿐이라고 대답해 줄 수도 없고, 참 답답했다.”
친구들의 말을 들으니 정말 SNS를 개설하는 게 좋을 것 같기도 했다.
“아. 그러고 보니 인스타 안 들어간 지도 오래됐네.”
“마지막 접속이 언젠데?”
“사흘 전인가?”
“헐. 오래도 안 봤네.”
“요즘 시합 영상 보고 분석하느라 다른 걸 통 못 했다. 한 번 들어가면 한두 시간 후딱 지나가서 아예 클릭을 안 했음.”
“나도 마찬가지긴 해.”
맞다, 태홍이 윤기에게로 몸을 돌렸다.
“긴기, 대련하는 영상 찍어서 선배한테 보내 드리면 어때? 우리 영상 유튜브에서 찾아보셨다면서. 하늘 같은 선배님을 귀찮게 해 드릴 수는 없지.”
일단 민주와 SNS 개설은 접어 둔 윤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인 듯했다. 선수를 선발하는 데 도움이 될 중요한 자료일 테니까.
시호가 다른 남자의 영상을 집중해서 보는 것은 내키지 않지만…….
침대에서는 나만 보니까.
그게 중요한 거다.
“사실 우리 삼각대 가져왔거든. 영상 찍으려고. 그래서 말인데, 우리에 대한 네 솔직한 의견을 듣고 싶다.”
“의견?”
“경쟁자이자 동료인 기윤기의 시선이 궁금해서. 가감 없이 말해 줬으면 해.”
“나 정말 시호 선배 검도단 들어가고 싶다. 선수로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싶어.”
흔치 않게 진지한 두 사람의 모습에 잠시 생각하던 윤기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정말로 솔직히?”
“응. 진짜 요만큼도 포장하지 말고 솔직히.”
“장난으로 속마음을 감추지 말고 전력으로 부딪칠 것.”
뜨끔한 태홍과 수원이 서로를 보았다.
“매번 경기 전에 오늘은 컨디션이 안 좋다, 배탈이 났다, 밤새 뒤척여서 피곤하다고 말하면서 졌을 때 대비한 연막 치지 말고.”
사실이었다. 태홍과 수원은 스스로의 능력에 한계를 그어 놓고 그 안에서만 노력했다.
만약 자신의 한계를 넘어설 정도로 노력해도 원하는 목표에 도달하지 못할까 봐, 그랬을 때 재능이 없다는 소리를 들을까 봐 이들은 더 나아가지 못했다.
둘 다 어릴 때부터 타인의 시선을 많이 의식하는 성격이었다.
“매번 그렇게 자기가 질 거라고 확신하는 건 명백한 연습 부족 아닌가?”
윤기의 말은 냉정하고 가혹했지만 반박할 여지가 요만큼도 없었다.
“초등학생일 때부터 지금껏 지켜봤지만. 너희가 고등학생이던 서시호보다 더 노력한 적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자신들이 청해서 들은 거지만, 윤기의 팩트 폭격에 전신이 얼얼할 지경이었다.
“선배는 본인의 모든 걸 다 걸고 무영단을 만들었어. 인생을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가벼운 생각으로 들어와서 뛸 거라면, 난 반대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차라리 주먹으로 얼굴을 맞는 게 더 나을 만큼, 윤기의 말은 차갑고 쓰리고 아팠다.
더 한심한 건 두 사람 다 그의 말에 반박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학연에 기댈 생각이라면 지금이라도 그만두는 게 좋을 거야. 선배에게 방해가 될 거고, 선배를 방해하는 건 그게 뭐든 난 절대로 용납할 수 없으니까.”
자신들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는 윤기의 강인한 눈빛에 태홍과 수원은 각각 주먹을 꽉 쥐었고, 입 안쪽의 연한 살을 짓씹었다.
“지금까지의 잘못된 행동, 버릇, 생각, 모두 버릴 각오로 해. 선배 또한 그런 사람이 아니라면 원하지 않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