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화
재혁이 기대에 찬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더 이상 찾아오지 마. 간섭도 하지 말고. 그거면 돼.”
“너! 지금 우리 재혁이한테 그게 무슨 돼먹지 못한 말버릇이야! 우리 재혁이가 왜 너한테 미안해해야 하는데!”
입술을 바르르 떨면서 인어공주처럼 다리를 모으며 청순하게 픽 주저앉았던 시모가 벌떡 일어나 핏발 선 눈으로 시호에게 삿대질을 했다.
그러다 재혁과 눈이 마주치자 다시 이마에 손을 올리고 소파 위로 털썩 쓰러졌다.
“흑……. 다 저를 위해 그런 건데…… 부모 마음도 몰라주고…….”
어깨까지 떨며 흐느끼는 시모는 가증스러움의 극치였다.
“따뜻한 허브티 타 드리고 진정되시면 백화점 명품관에서 가방 하나 사 드려. 아님 모임에 꽃다발 들고 서프라이즈로 나타나서 전부 계산하고 집까지 고이 에스코트해 드리든가. 그럼 바로 회복하시니까.”
시호가 재혁의 귀에다 빠르게 소곤거리고는 문을 열고 나갔다.
“아주머니, 주치의 선생님 좀 불러 주세요. 사모님께서 또 아프시다네요.”
“어머! 네에, 사모님께서 또…… 네? 사모님요?”
시호가 저처럼 명현을 사모님이라 칭하자 부산댁의 눈이 커졌다.
“이제 어머님이라고 부를 관계는 아니니까요.”
호칭부터 명확히 해 둬야 재혁이 달라붙을 빌미를 없애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현관으로 향하려던 시호는 아, 하고 몸을 돌려 부산댁에게 말했다.
“혹시 이직 생각 있으시면 저한테 연락 주세요. 아주머니 음식이 워낙 맛있어서 이따금 생각나더라고요. 이 집에서 유일하게 제게 친절하시기도 했고.”
부산댁은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 했지만, 명현을 어려워하고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명현이나 이 집 사람들에 대해 험담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함께 있다 보니 눈빛이나 표정에서 느낄 수 있었다.
“큰 기대 없이 말씀드린 거니까 부담 갖지 않으셔도 돼요.”
부산댁은 이 집에서 일한 지 오래되었다. 그만큼 실력이 출중했으며 입도 무거웠다. 보수도 웬만한 곳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어마어마하다고 들었다.
시호는 자신이 말한 대로 딱히 큰 기대를 갖고 얘기한 것은 아니었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 반, 그리고 혹시 말이 돌아 시모의 속을 긁었으면 하는 마음 반으로 한 말이었다.
하지만 1%의 가능성일지언정 연락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선수단 사람들에게도 맛있는 음식을 먹이고 싶었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앗! 예에, 조심히 가세요.”
떠나는 시호를 배웅하던 부산댁의 마음에 바람 한 줄기가 불었다.
이곳의 장점은 돈은 확실히 챙겨 준다는 것 하나뿐이었다.
인간적인 대우를 기대하기는 어려웠고, 지나치게 까다롭고 엄격했다.
특히 사모인 명현은 도무지 기분을 맞출 수가 없었다.
한식이 당긴다고 하여 음식을 차리면 갑자기 파스타가 먹고 싶다고 하고, 머리가 아프니 가볍게 차려 달라고 해서 차리면 식대가 부족해서 이따위로 차린 것이냐며 혀를 찼다.
부산댁은 갖은 핍박에도 묵묵히 견디고, 주어진 일은 어떻게든 해내고야 마는 근성을 지닌 시호가 내심 마음에 들었다.
더 가까워지고 싶었지만 명현의 눈치가 보여 형식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슬슬 이직할 때도 됐지…….”
***
재혁은 일단 명현을 부축해서 똑바로 앉힌 뒤, 부산댁이 가져온 따뜻한 물을 건넸다.
“주치의 선생님 지금 오신다네요.”
“알겠습니다.”
“흐윽……. 어떻게 시호 걔가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어떻게 나와 내 아들 사이를 이간질시켜!”
누가 보면 시호가 뺨이라도 때리고 간 줄 알 정도로 명현은 서럽게 울었다.
재혁은 착잡했다. 우선 몸이 약한 어머니를 위로해야 하는데,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어머니.”
“아흑, 재혁아…….”
“저 나가 살겠습니다. 숨이 막혀서 더는 이 집에 못 있겠습니다.”
명현이 컵을 떨어뜨렸다.
“에구머니나! 사모님, 괜찮으세요? 우, 우선 닦을 것을!”
“이걸로 닦을 테니 아주머니께서는 유리 조각 좀 치워 주세요.”
재혁이 하얀 테이블보를 쥐며 말하자 고개를 끄덕인 부산댁이 황급히 바깥으로 달려 나갔다.
“재, 재혁아! 그게 무슨 말이야? 응? 이 엄마를 버리겠다고? 가족 등지고 기어이 그 애를 따라가겠다고?”
재혁이 미간을 찌푸렸다.
“다 큰 성인이 독립하는 것이 어떻게 가족을 등진다는 뜻이 됩니까.”
“안 돼, 재혁아, 어, 엄마가 미안해, 응?”
“진작 자립했어야 했습니다. 제가 바쁘니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시호를 잘 챙겨 주고 보듬어 달라는 뜻으로 합가했던 건데. 화목한 줄만 알았던 겉모습 속에 이런 면이 숨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재혁은 무거운 표정으로 저를 꽉 붙잡은 명현의 손을 떼어 냈다.
“저, 아직 시호 사랑합니다. 여전히 제 아내이고 반드시 데리고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런 말을 꺼낼 수도 없게 되어 버렸어요.”
시호의 어두운 표정이 어머니 때문이었다는 것을 재혁은 전혀 생각조차 못 했다.
“만약, 언젠가 시호가 돌아오게 되면 진심으로 따뜻하게 맞아 주세요. 그때까지 나가 살겠습니다. 지금은 머리가 너무 복잡해서 도저히 어머니 얼굴을 볼 수가 없네요.”
명현이 고개를 저었다.
잘난 내 아들이, 언제나 제 편을 들어 주고 엄마라면 껌뻑 죽는 재혁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기어코 그 애를 다시 데리고 오겠다고? 응? 너도 아까 시호 눈빛 봤잖아, 걘 절대 안 돌아와. 너한테 모진 말 쏟아 내는 거 듣고서도……!”
“어머니 때문이잖습니까!”
재혁이 처음으로 명현에게 목소리를 높였다.
“아이 갖고 싶다고 했던 시호 말 묵살한 어머니 때문에 시호가 떠나간 거예요. 피임만 안 했어도, 우리에게 아이만 있었어도 이 사달은 안 났어요!”
“어, 어떻게 그런 말을…….”
“더 있다간 서로 감정만 상할 것 같습니다. 이만 나갈 테니 어머니도 진정하시고 심신 추스르세요.”
“재혁아, 재혁아!”
명현이 애타게 부르는데도 불구하고 재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을 나왔다.
“하아……. 이런 일이 있을 줄은.”
시호가 제게 차갑게 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자신이 없는 동안에 그녀는 이런 어머니를 혼자서 감내해야 했을 것이다.
천사 같은 어머니에게 저런 면이 있을 줄이야.
충격에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만약 오늘 검토해야 할 중요한 서류를 집에 두고 나오지 않았다면, 그 서류가 자신만이 출입할 수 있는 서재에 열쇠로 열어야만 하는 책상 서랍 안에 있지 않았다면 평생 이런 내막이 있는 줄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차에 탄 재혁은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시호에게 어떻게 사죄를 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럼 더 이상 찾아오지 마. 간섭도 하지 말고. 그거면 돼.]
시호가 제게 원하는 것은 명확했다.
‘간섭이 아니라 도움이라면 받아들여 주지 않을까……?’
재혁은 곧장 시호에게 후원을 약속했단 그녀의 담당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 한재혁입니다. 부탁이 있습니다. 시호에게 후원하겠다고 다시 말씀드려 주십시오. 후원금을 비롯하여 시호가 필요로 하는 것 일체를 제가 다 지급하겠습니다. 단, 제가 했다는 것은 비밀로 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것으로 시호에게 조금이라도 위로가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재혁은 윤기를 떠올렸다. 지금 그녀를 위로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일 터였다.
가슴이 먹먹하다 못해 고장 나 버린 것만 같았다.
내가 제대로 행동했다면 지금 그녀의 옆에 있었을 텐데.
***
“벌써 한 시 반이네.”
메시지를 확인했는지 윤기에게서 부재중 전화가 7통이나 와 있었다.
윤기에게 전화를 걸려는데 액정 화면에 민주의 이름이 떴다.
잠시 생각하던 시호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시호야, 나야. 지금 통화할 수 있니?
민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길게는 못 할 것 같아. 차 안이거든.”
- 그렇구나. 시간 많이 안 빼앗을게. 소연이는 해결했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시호는 눈을 고쳐 떴다.
“이렇게 빨리?”
- 어제 찾아가서 담판 지었어. 정말 미안해. 신경 쓰이게 해서.
“…….”
- 넌 이제 내가 꼴 보기도 싫겠지만, 난 아직 너랑 친구이고 싶어. 혹시 네 마음이 풀린다면 언제든 연락해 줬으면 좋겠어. 기다릴게.
“……그래.”
- 시간 내 줘서 고마워. 운전 조심해.
전화를 끊은 시호는 복잡 미묘한 심경이었다.
민주의 말에 상처를 받고,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10년이 넘는 친구 사이다. ‘너를 질투해서 못된 마음을 먹었었다’고 솔직히 고백하며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민주를 칼로 무 자르듯 잘라 내기는 어려웠다.
그렇다고 ‘그래, 우리 없던 일로 하고 다시 사이좋게 지내자’ 하면서 친구 관계를 계속 이어 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시호는 휴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속이 들끓고 머리가 복잡하다.
이럴 때 윤기라도 옆에 있었다면…….
Rrrrrrr.
휴대폰 화면을 보자마자 시호는 피로가 싹 가시는 것을 느꼈다.
- 선배.
마음을 진정시키는 낮은 음성.
“윤기야.”
- 무슨 일 있습니까? 목소리가 안 좋은데.
걱정스러워하는 말투에 불안이 거짓말처럼 가셨다.
“운동 끝났어?”
- 예. 집에 가는 길입니다. 선배는 어디십니까?
아. 내가 어디에 있느냐 하면…….
시호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지난 주말에 바닷가 데이트 하면서 좋은 시간을 보냈는데 또 찬물을 끼얹어야 했으니까.
“전 시댁에 다녀오는 길이야.”
예상대로 정적이 일었다. 시호는 긴장감에 혀로 입술을 축였다.
……화났나?
솔직히 기분 나쁘겠지. 연인이 시댁과의 인연을 끊을 수 없는 이혼녀니까.
-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그런 말씀 없으셨습니다.
사라져 가던 불안이 다시금 연기처럼 미약하게 피어났다.
“예정에 없던 일인데 갑자기 연락이 와서. 말한다는 걸 깜박했어……. 미안해.”
- 그 사람이 오라고 했습니까?
“…아니. 전 시어머니가.”
다시 한번 정적이 일었다.
시호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윤기가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났다.
- 언제 오십니까?
“지금 출발하려던 참이야. 차 안 막히면 한 시간 반 안쪽으로 도착할 거고, 막히면 두 시간 걸릴 것 같아.”
- 계약서 조항을 어기셨습니다.
시호가 눈을 크게 떴다.
“계약서 조항?”
- 식사는 최대한 함께 하기로 하셨습니다. 그 외의 시간에도 되도록 둘이서 같이 있고, 떨어져 있는 상황일 경우 통화와 메시지로 계속 연락을 주고받기로 분명 약속하셨죠. 서로의 연락에는 꼭 응하기로도.
윤기의 목소리는 듣기 좋았지만 어쩐지 무시무시한 기운이 느껴졌다.
- 계약을 어겼을 경우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하지 않은 것 같은데.
“어…… 그랬지.”
- 오늘 밤에 논의하는 건 어떠십니까.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에선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풍겼다. 이거, 보통 심각한 게 아닌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