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화
- 끊었니?
“아닙니다.”
- 그새 전화 예절도 잊어버린 거니? 어른이 먼저 전화를 걸었으면 우선 죄송하다 사과하고 안부를 물어야 예의지.
나긋나긋하고 우아한 목소리를 들으니 순식간에 과거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새벽부터 일어나서 진수성찬을 차리고, 제대로 앉아서 쉬지도, 부모님과 통화를 하지도 못하던 그때로.
“……죄송합니다.”
시모의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나와 버린 ‘죄송합니다’란 말에, 아직 그때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것 같아서 시호가 입술을 깨물었다.
- 뭐 어쩌겠니. 본성이 그런 것을.
“…….”
- 연교에 내려갔다고 들었다. 오늘 서울로 좀 올라오너라. 일어난 지 한참 지났을 테니까 외출 준비는 다 했을 테지? 12시면 충분히 도착하겠구나.
시어머니는 여전히 상대방의 사정은 고려하지 않고 제멋대로 굴려 했다.
“내일 12시까지 가겠습니다.”
- 뭐? 너 지금 뭐라고 했니?
“사실 다음 주로 미루고 싶지만 더 바빠질 것 같아서요. 저도 제 일이 있는지라.”
- 감히……!
“그럼 먼저 끊겠습니다.”
먼저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른 시호는 휴대폰을 멍하니 내려다보다가 이내 한숨 같은 웃음을 흘렸다.
“이렇게 쉬운 걸.”
기지개를 쭉 켠 시호는 휴대폰을 침대 위에 던져 놓고 욕실로 들어갔다.
사실 가고 싶지 않지만, 어차피 재혁 때문에 할 말도 있었다.
“끝나고 활명수나 한 병 사 먹지, 뭐.”
명현과 마주한다고 생각하니 반사적으로 속이 답답해졌지만 예전만큼 숨이 막힐 지경은 아니었다.
왜 부른 걸까.
연교 맘카페에 올라간 글 때문일까?
그게 아니면 시모가 제게 연락할 일이 없었다.
“상황 파악 참 빠르네. 겨우 하루 이틀 정도 사이에 일어난 일을 벌써…….”
하긴, RS그룹이니.
시호는 ‘RS그룹의 이미지에 피해를 입힐 사안이라 판단될 경우, 양측은 반드시 긴밀히 논의해야 한다’는 이혼 계약서 조항을 떠올렸다.
이번 일이 그룹 이미지에 피해를 끼칠 만큼의 사건인가?
시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명현은 티끌만 한 흠조차 견디지 못하는 성격이다.
며느리였던 여자가 차린 검도장이 소소한 구설에 오르내리는 것도 거슬릴 테지.
“빨리 끝내지, 뭐.”
다음 날.
시호는 윤기에게 서울에 갔다 온다고 메시지를 보낸 뒤 출발했다.
윤기가 운동이 끝나고 메시지를 확인할 즈음엔 자신은 겉으로는 우아해 보이는 지옥 속에서 전 시어머니와 마주 앉아 있을 것이다.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와서 막 도로에 합류하는데 띠링, 메시지가 울렸다.
“윤기가 벌써 확인했나?”
잠깐 신호에 걸렸을 때 휴대폰 화면을 보니 민주였다.
흠. 가뜩이나 속 얹히는 자리 가는데 미리부터 체할 필요는 없지.
‘나중에 확인하자.’
시호는 음악을 재생했다. 쓸쓸함과 서늘함이 배어 나오는 매력적인 목소를 가진 영국 가수 마이클 키와누카(Micheal Kiwanuka)의 ‘Love & Hate’였다.
시댁에서는 언제나 클래식과 오페라만 들어야 했다. 클래식은 선수 시절 때에도 정신 수양과 안정을 위해 자주 들어서 거부감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오페라는 도무지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귀가 찢어질 정도로 높은 소리가 계속 이어지는 아리아를 들을 때마다 너무 시끄러워서 머리가 지끈거렸다.
마치 우아한 말투 속에 감춰진 시모의 마음속 소리처럼 느껴졌다.
참고 참다가 딱 한 번, 용기를 내어 다른 음악 장르를 들으면 안 되겠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세상에, 아무리 운동만 했다지만…… 이런 기본적인 교양과 매너마저 모른다니. 내가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겠구나.]
그날 이후로 시호는 시모를 따라 오페라에 관한 책과 영상, 그리고 실황 공연을 거의 매일 접해야 했다.
‘지금은 그러지 않아도 돼. 또한 앞으로도.’
차가 막히지 않아서 12시가 되기 전에 도착했다.
산 아래에 홀로 우뚝 선 성북동 저택은 언제 봐도 지나치게 크고 답답했다.
심호흡을 한 시호가 벨을 누르자마자 커다란 대문이 덜컥 열렸다.
“오셨…… 어머!”
시댁에서 그나마 제게 친절했던 가사 도우미가 놀란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음식만 전담하던 부산댁은 아침마다 시호와 식사를 함께 준비하던 사이로, 시모의 눈을 피해서 짧은 시간 동안 이것저것 ‘불똥 덜 튀는 법’을 알려 주기도 한 사람이었다.
시모의 수족으로 저를 감시하던 다른 가사 도우미는 휴일인 듯했다.
그럴 때면 부산댁이 오후까지 남아 집안일을 돌보곤 했다.
“오랜만에 뵙네요. 잘 지내셨죠?”
“그럼요. 그런데 작은사모님 옷이…….”
부산댁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피부를 드러낸 곳이라고는 손목, 이따금 발목뿐이었던 시호의 무채색 옷차림이 완전 다른 사람처럼 바뀌어 있었다.
검은 시스루 블라우스 사이로 드러난 흰 목덜미와 쇄골은 관능적이었고, 무릎 바로 위까지 오는, 몸에 딱 붙는 와인색 스커트는 관능을 넘어서 도전적이기까지 했다.
언제나 본래의 색과 가장 가까운 단정한 색깔만 칠했던 시호의 입술과 손톱 또한 오늘은 붉게 빛났다.
“많이 달라지셨네요.”
“이상한가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데.”
이 집에 있을 때의 시호는 언제나 밀랍 인형처럼 표정의 변화 없이 그저 가만히 숨을 죽이고 있을 뿐이었는데, 지금은 생기가 넘쳐서 반짝반짝 빛났다.
“사모님 보시기에는 좀 그렇겠지만.”
부산댁이 목소리를 낮췄다.
“제 눈에도 완전 멋있어 보여요. 너무 잘 어울리시는데요?”
“감사합니다. 기분 좋은데요.”
시호가 작게 웃으며 말하자 부산댁의 눈이 더욱 커졌다.
이 집에 들어온 이래로 시호가 이렇게 편안한 얼굴로 웃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하긴. 나라도 이 집만 나가면 덩실덩실 춤을 췄을 거야.’
“어디에 계시나요?”
“아, 응접실에요. 저는 작은사모님 차 준비하고 있을게요.”
“따뜻한 거 말고 차가운 걸로 부탁드리겠습니다.”
“아…… 네, 알겠습니다.”
시호는 겉모습뿐만 아니라 취향까지 완전히 바꾼 모양이다. 아니지, 바꾼 것이 아니라 원래대로 돌아간 것인지도.
어쨌든 지금의 모습이 훨씬 보기 좋았다. 감정 없는 인형에서 눈에 생기가 넘치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달까.
‘그나저나 사모님 보시면 기절하시겠네.’
부산댁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똑똑. 시호는 노크한 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시간 딱 맞춰 왔구나. 그나마 네 장점이 시간관념이 철저하다는 거지. 건방지게 날짜를 제멋대로 정해…….”
차를 한 모금 머금은 뒤, 테이블 위에 찻잔을 내려놓고 고개를 돌린 명현은 눈을 크게 뜬 채 그대로 굳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너…… 지금 그러고 온 거니?”
시호는 대답하지 않고 천천히 걸었다.
소리 내지 않고 우아하게.
바른 자세로 기품 있게.
명현이 입에 달고 살던 말대로 다가와 소파에 앉은 시호가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부르셨어요.”
“세상에, 어찌 그런 꼴로 여기까지……. 오면서 널 본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겠니!”
“생각한 대로 보겠지요. 머릿속에 험한 생각을 품고 사는 사람은 험하게, 순한 생각을 품고 사는 사람은 순하게.”
처음 듣는 시호의 말대꾸에 명현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어디 어른이 말씀하시는데 예의 없이, 그게 무슨 말대답이야?!”
“물어보시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어른이 말씀하시는데 대답하지 않는 것도 예의가 아니니까요.”
똑똑. 노크 소리에 명현은 뾰족한 표정으로 들어오라 말했다. 부산댁이 차를 내왔다.
“여기 있습니다.”
명현이 눈살을 찌푸렸다.
부산댁이 차가운 차를 내려놓고 나갔다.
예전 같았으면 차는 뜨거운 물을 부어 정성으로 우려내야 한다고 잔소리를 했겠지만, 지금은 그런 것에 신경을 쓸 때가 아니었다.
게다가 이제 집안사람도 아닌 시호가 뜨거운 차를 마시든 차가운 차를 마시든 상관없었다.
명현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너, 우리 재혁이한테 피임에 대해 얘기했니?”
뜻밖의 말에 시호가 눈을 고쳐 떴다.
“아니요. 말한 적 없습니다만.”
“그런데 왜 재혁이가 내게 그런 얘기를 하지?”
그런 얘기?
“아이가 있었다면 이혼하지 않았을 거라고 하더구나.”
시호는 저도 모르게 하, 하고 어이없는 웃음을 내뱉고 말았다.
이건 또 무슨 개소리람.
명현의 눈썹이 불쾌함으로 씰룩거렸다.
“네가 배가 부른 모양이구나. 내가 준 돈으로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모양이야, 겁을 상실한 걸 보면. 그게 돈의 힘이다.”
“…….”
“너처럼 보잘것없는 아이도 몇 푼 위자료로 기고만장해진 것 봐라. 네 부모님도 아주 편하고 여유롭게 생활하시겠구나? 딸 장사 잘한 덕에.”
지금껏 부모를 언급할 때마다 주먹을 꽉 쥐고 입술을 깨물며 참아 왔다. 반항해 봤자 엄마 아빠만 더 힘들어질 게 뻔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난 이 집 며느리가 아니고 저 사람도 내 시어머니가 아니다.
“위자료는 제가 이 집에서 겪은 수모와 모욕에 대한 정당한 대가입니다.”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되, 도리에 어긋나는 언행은 용납할 수 없다.
“제가 만약 술에 취해 집으로 찾아와 재혁 씨에게 다시 합치자고 주정을 부리면 어떨 것 같으세요?”
“생각만으로도 끔찍하구나! 어디서 그런 못 배워먹은 행동을! 왜, 앞으로 그럴 거라고 위협이라도 하는 게냐?”
불쾌해 죽겠다는 명현의 표정에 시호가 픽 웃었다.
“너……!”
“며칠 전 술에 취한 재혁 씨가 연교까지 찾아왔습니다. ‘우리 와이프’라고 부르면서 여전히 사랑한다더군요.”
명현이 눈살을 찌푸렸다. 순간 손이 미끄러졌다. 찻잔이 옆으로 넘어지며 찻물이 쏟아졌다.
“우리 재혁이가 널 찾아가 그런 말을 했다고? 그 바쁜 아이가?”
“내년이면 RS그룹 부회장 되실 분이 행동 조심해야 할 텐데요. 구설에 오르지 않으려면. 돈이 많다고 가정교육을 제대로 받고 자란 건 아닌가 봐요, 어머님.”
시호가 싱긋 웃었다.
명현의 몸이 분노로 벌벌 떨렸다.
“아, 죄송해요. 이제 어머님이 아닌데. 어르신……은 좀 그러니까 사모님이라고 하겠습니다.”
명현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제게 이렇게 맞서거나 비웃음을 건넨 사람도 처음이지만, 그게 언제나 무시하던 며느리라는 사실이 거대한 분노를 일으켰다.
“재혁 씨가 다시는 찾아오지 않도록 주의 부탁드립니다. 주변 눈들도 있고, 무엇보다 제가 싫어서요.”
시호에게 삿대질을 하는 명현의 손가락이 지진이라도 난 듯 미친 듯이 떨렸다.
“아이를 낳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랬다면 지금보다 쉽게 이혼은 할 수 없었겠죠. 설령 이혼하더라도 아이는 두고 나가야 했을 테고, 만나는 것도 쉽지 않았겠네요. 감사드려요, 사모님 덕분에 수월하게 새 출발 할 수 있었습니다.”
시호가 싱긋 웃으며 상큼하게 대답하자 명현이 악문 잇새로 분노에 찬 말을 내뱉었다.
“개처럼 엎드려서 빌 땐 언제고, 어디서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어.”
“…….”
“너 김 박사한테 데려가기 전에 나한테 무릎 꿇고 빌었지. 차라리 아이를 낳아서 헌신하는 삶을 살겠다고, 그러면 앞으로 버틸 수 있을 것 같다고! 올챙이 적 생각 못 하고 뭐? 제가 싫어서요?!”
명현이 피임을 제안하기 전, 시호는 무릎을 꿇고 빈 적이 있었다.
차라리 아이를 낳아 기르는 데 집중하면 이 우울한 감옥 생활을 버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때 내가 했던 말도 잊은 모양인데, 만약 몰래 피임을 멈추거나 재혁이한테 입 벙긋하면 가만 안 두겠다고. 지방에 있는 네 부모 밟아 뭉개 버릴 거라고 내가 했니, 안 했니.”
명현은 우아하고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헛된 생각 버리고 현재에나 집중하렴. 안 그러면 네 부모님을 포함해서 너와 관련된 사람들 모두 불행해질 거란다’라고 말했었다.
당시를 회상하던 시호는 우아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악귀처럼 포악한 얼굴로 제게 다가오는 시모를 무감정하게 쳐다보았다.
이 순간에도 소리를 바락바락 지르는 것이 아니라 이를 악물며 낮게 말하는 시모의 모습에 소름이 끼쳤다.
“우리 재혁이가 네 말을 믿어 줄 것 같니? 네가 집에 왔다 간 후로 내가 쓰러지면, 어떻게 될 것 같아? 넌 이 집에 있을 때보다 더한 감옥 생활을 살게 될 거다. 그것도 모르고 감히 내게 대들어?”
명현의 손이 위로 들린 순간, 문이 거칠게 열렸다.
“그게 정말입니까?”
재혁이 분노에 찬 얼굴로 서 있었다.
명현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분노와 충격이 뒤섞인 재혁의 눈동자가 시호의 뺨을 때리려던 어머니의 손에 닿았다.
“어머니, 설마…… 시호를 때리려고 하신 겁니까?”
재혁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우아하고 기품 있으며 험하고 거친 언행과는 거리가 먼 어머니가 손을 올리다니?
저렇게 무서운 얼굴로?
“재, 재혁아.”
황급히 손을 내린 명현이 비틀거리며 재혁에게 다가갔다.
“이, 이 시간에 어쩐 일이야?”
“어떻게 그런 말씀을…….”
“오해야, 재혁아. 엄마 말 좀 들어 봐. 응?”
그가 황망한 표정으로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자 명현이 상처받은 얼굴로 그 자리에 스르르 주저앉았다.
평소 같았음 당장에 ‘어머니!’ 하고 달려와 자신을 부축하며 병원에 가자고 채근했을 아들은 여전히 굳은 채 저를 낯선 사람 보듯 보고만 있었다.
“방금 하신 말씀…… 모두 사실입니까?”
“오해 마, 널 위해 그랬어! 엄마는 오직 너를 위하는 마음밖에 없다는 거, 잘 알잖니. 응?”
다 사실이란 말인가?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
재혁이 혼란스럽다는 듯 마른세수를 했다.
“시호도 동의한 일이야. 얘, 그렇지 않니? 말 좀 해 봐!”
아들이 제게서 멀어지자 정신이 반쯤 나간 명현이 달달 떨며 시호를 애처롭게 보았다.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그 촌극을 보고 있던 시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저도 동의한 일입니다.”
“거, 거봐! 재혁아, 엄마 말이 맞지?”
“가족을 인질로 삼아 협박해서 얻어 낸 동의 말씀하시는 겁니까?”
“혀, 협박이라니…… 아윽, 재혁아, 엄마 속이 너무…….”
경련이 인 듯 몸을 떨던 명현이 가슴께를 움켜쥐며 엎드렸다.
재혁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당장 달려가 어머니를 부축해야 할지, 아니면 계속 화를 내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 얼굴이었다.
시호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아직도 저게 연극이라는 걸 모르다니.’
저뿐만이 아니라 다른 가족에게도 관심이 없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효자라고 해야 할지.
시호가 그들을 지나쳐 문으로 다가갔다.
“아주머니께 주치의 불러 달라고 말씀드릴게. 재혁 씨는 어머니 챙겨 드려.”
“가려고?”
재혁은 저도 모르게 시호의 가느다란 손목을 붙잡았다.
아무리 그에게 좋은 감정이 남아 있지 않은 시호라도, 떨리는 재혁의 손길에서 지금 얼마나 미안해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가야지. 난 이 집 구성원도 아닌데 더 있을 이유가 없잖아.”
담담하다 못해 무정하게까지 들리는 시호의 말에 재혁이 고개를 푹 숙였다.
“시호야…….”
너무 미안하면 도리어 미안하다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재혁은 처음 알게 되었다.
입술을 달싹여 보았지만 ‘미안하다’는 말이 그의 마음을 표현하기에는 너무 가볍게만 느껴졌다.
“됐어. 얼른 어머님이나 부축해.”
그녀의 손목을 붙잡은 재혁의 손에서 스르르 힘이 빠져나갔다.
고개 숙인 그를 보던 시호가 입술을 뗐다.
“재혁 씨, 나한테 진심으로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