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르쳐 주세요 선배-35화 (35/81)

제35화

“그런 귀여운 말은 어디서 배워 오시는 겁니까?”

시호가 눈을 곱게 흘겼다.

“선배를 향한 존경심이 너무 해이해졌다?”

“그럴 리가요. 하루가 지날 때마다 선배를 향한 마음이 깊어져서 문제인데.”

그가 시호의 손을 꼭 잡았다.

“보고 싶었습니다.”

“……나도.”

어제 저녁을 먹으면서 민주와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들었다. 물론 시호는 민주가 윤기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은 말하지 않았다.

윤기는 시호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싶었다. 그러자면 오늘 데이트는 무조건 즐거워야 했다.

“밀짚모자 쓴 서시호도 빨리 보고 싶은데.”

그가 눈을 휘며 웃자 마음이 떨려서 시호는 시선을 피했다. 하여튼 기윤기. 사람 마음 뒤흔드는 데 뭐 있다니까.

“선배, 삐졌습니까?”

“내가 애야? 삐지긴.”

“시호야, 마음 상했어?”

시호가 고개를 홱 돌려 다시 쳐다보자 윤기가 그녀의 뺨을 감싸 쓸었다.

“미안해요. 너무 귀여워서.”

“뭘 또 그렇게 사과를……. 안 삐졌어. 귀엽다는 말이 어색해서 그래.”

윤기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왜 어색하지? 이렇게 귀여운데.”

“……너 놀리는 거지.”

“반응이 귀여워서 자꾸만 장난을 치고 싶어집니다.”

윤기가 낮게 웃으며 시호를 품에 안고는 목덜미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예뻐 죽겠다, 서시호.”

어제 헤어진 후부터 오늘까지 내내 시호가 떠올라 미칠 지경이었다. 마음은 자꾸 조급해졌고, 눈은 계속 시계로 향했다.

“보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어.”

귓가에 느른히 내려앉는 음성에 시호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선배는요?”

윤기가 그녀의 귀를 살짝 물며 속삭였다.

“흣…… 나도 보고 싶었어.”

진한 키스로 그리움을 표현한 연인은 서로에게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주말이라 많이 막힐 줄 알았는데, 차는 바닷가로 수월히 나아갔다.

가는 내내 그들은 손을 붙잡으며 짧은 입맞춤을 나누었고 창문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에 감탄했다.

“와아, 예쁘다.”

시호가 탄성을 질렀다.

“서해안도 너무 좋다.”

지금껏 가 본 바다라고는 대학 때 하계 훈련 장소였던 동해와, 신혼여행으로 갔던 하와이가 전부였다.

훈련 땐 놀러 간 게 아니라서 제대로 즐기지 못했고, 신혼여행 때는 곁에 앉아 업무 메일을 주고받는 재혁을 허탈한 마음으로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온 바닷가는 무척 아름다웠고, 답답했던 속이 뻥 뚫리는 듯 시원했다.

좋아하는 시호의 옆모습을 보니 윤기의 입가에도 웃음이 걸렸다. 그들은 손을 꼭 붙잡고 바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벌천포 해수욕장은 모래사장 대신 몽돌이 깔려 있어서 색다른 느낌을 주었다. 밀려온 물이 동글동글한 돌에 부딪칠 때마다 반짝이며 부서졌다.

“돌이 예쁘다. 하나 가져가야지. 너도 마음에 드는 거 하나 주워서 나 줘.”

“뭐 하시려고요?”

“장식장에 날짜랑 이름 써서 장식해 놓게.”

참 귀여운 말만 한다니까. 미소를 지은 윤기가 돌을 주워서 시호에게 건넸다.

이따금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한 줄기가 시호의 머리카락을 건드리면, 윤기는 매번 다정히 옆으로 넘겨 주었다.

그러다 시호가 배시시 웃으면, 참지 못하고 볼을 감싸 입술을 겹쳤다.

“누가 보면 어쩌려고 그래.”

윤기는 열기가 가시지 않은 눈으로 시호의 입술을 내려다보았다.

“아무도 안 봅니다. 봐도 상관없고.”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었고, 다들 자신의 옆에 있는 연인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지나가다가 시호가 그토록 바라던 밀짚모자도 샀다.

모자를 씌워 주며 윤기가 낮게 웃었다.

“예쁘다. 우리 시호.”

“놀리지 마. 나 정말 쓰고 싶었단 말이야.”

“놀린 거 아닌데. 정말 예쁩니다.”

윤기의 눈에서 달달함이 뚝뚝 떨어졌다. 보는 이마저 녹아내릴 정도로 다정한 눈빛이었다.

“자랑하고 싶기도 하고. 나만 보고 싶기도 하고.”

“……나도 그런데.”

고개를 숙이고 부끄러운 듯 속삭이는 시호가 못내 사랑스러웠다. 윤기는 밀짚모자가 벗겨지지 않도록 손바닥으로 받치고, 입술로 그녀의 입술을 꾸욱 눌렀다.

쪽, 닿았다 떨어지는 야릇한 음이 길게 늘어졌다.

시호의 허리를 감싼 윤기가 그녀를 제게로 더욱 당겼다.

“참아 보겠습니다.”

“뭘……?”

“이대로 집으로 가고 싶지만. 선배는 아직 더 즐기고 싶을 테니까요.”

윤기가 야릇하게 속삭이며 느른히 웃었다.

“밥 먹으러 갈까요? 배고플 텐데.”

“근처에 수산물 파는 곳 있나 봐. 되게 괜찮대.”

미리 검색했는지 기대에 찬 시호의 모습에, 윤기는 자신이 알아 온 맛집은 다음에 가기로 했다.

그들은 수산물 유통센터에 가서 싱싱한 회도 사 먹고, 다시 바닷가로 와서 걷다가 장난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윤기는 시호가 불편하지 않도록 바람에 날리는 긴 원피스 자락을 살며시 붙잡고 걸었다.

“내가 잡아도 되는데.”

“오늘은 손 하나 까딱할 생각 하지 마세요. 제가 다 해 드릴 거니까.”

“이러다 퇴화되는 거 아닌지 몰라. 이런 사소한 것까지 네가 다 해 주니까.”

“전 좋습니다. 앞으로 서시호 어린이는 제가 챙기겠습니다.”

“너 한 번만 더 어린이라고 해 봐, 진짜.”

시호가 찌릿! 곱게 노려보았다.

“혼내실 겁니까?”

“나 화나면 되게 무섭다, 너?”

“화내도 예쁠 것 같은데, 서시호는.”

윤기가 씩 웃고는 시호의 손등에 입술을 묻었다.

“지금 이 순간이 계속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시호도 동의하는 바였다. 윤기와 함께 있을 때에는 1초가 흘러가는 것도 아까웠다.

가벼운 입맞춤을 나눈 그들은 다시 바닷가를 걷기 시작했다. 윤기의 굵은 팔에 팔짱을 낀 시호는 거의 대롱대롱 매달리다시피 걸었다.

“기윤기! 너 일부러 빨리 걷는 거지.”

“아. 선배가 어린이라는 걸 배려했어야 했는데. 제 실수입니다.”

윤기는 그대로 시호를 번쩍 들어 안았다.

“안 내려놔?! 기윤기!”

시호가 버둥거리자 윤기는 슬쩍 손에 힘을 뺐다.

“꺄악!”

떨어진다고 생각한 시호가 윤기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떨어지는 줄 알았잖아!”

“설마 제가 선배를 놓치겠습니까?”

윤기가 그녀를 안은 채 소리 내어 웃었다. 그 모습이 바다 위로 부서지는 햇살처럼 밝고 환했다.

횟집 2층에서 그들을 부럽다는 듯이 보고 있던 커플 중 남자가 눈을 크게 떴다.

“어? 저거 기윤기 선수 아냐?!”

검도를 배우기 시작한 남자는 요즘 선수들의 경기 영상을 찾아보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다.

특히 한국은 물론 세계 검도계에서도 ‘살아 있는 레전드’로 불리는 기윤기와 관련된 영상과 인터뷰는 죄다 섭렵했다.

“기윤기? 자기가 보여 준 그 잘생긴 검도 선수?”

“어, 맞는 것 같은데? 탈일반인 체격에 외모를 보아하니…… 여자 친구랑 데이트 왔나 보다.”

“어머, 어디어디? 저 여자가 입은 원피스 예쁘다. 어디 거지? 나도 사고 싶어.”

여자는 카메라로 윤기와 시호를 찍었다.

“나중에 찾아봐야징.”

남자는 자신도 휴대폰을 들어 그들의 모습을 찍었다.

“대박! 기윤기 선수 여자 친구 있다는 말은 한 번도 못 들어 봤는데.”

남자 선수들의 영상을 찾아보다가 이따금 여자 선수들도 참고할 겸 본 적이 있었다.

‘서시호’라는 이름이 자주 언급되었지만 호구를 착용한 모습이 익숙했고, 사진이라곤 그녀가 중, 고등학생일 때가 다라서 성인이 된 지금의 모습을 보고 알아보긴 힘들었다.

“근데 저 남자 되게 잘생겼다. 연예인 같아.”

그는 여자 친구의 말에 발끈했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자인 제 눈에도 윤기는 엄청나게 멋있었다.

검도 커뮤니티에 올려 볼까? 몇 분만 올렸다가 댓글 달리면 삭제하면 될 것 같은데.

그 한 장의 사진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모른 채 남자가 글을 올렸다.

- 이거 기윤기 선수 맞음? 여친이랑 데이트 중에 발견. 아님 삭제함. 근데 탈인간급 몸이랑 얼굴 보니 맞는 듯? 여친이 기 선수로 추정되는 남자 보느라 날 안 봄…… 오징어는 이만 바다로 떠납니다…….

“어머머, 자기야. 치마가 바람에 날려서 그런 것 같긴 한데, 저 여자 임신한 건 아니겠지?”

여자 친구의 말에 남자는 눈을 고쳐 떴다. 팔다리가 가는 것을 보니 그냥 치마가 펑퍼짐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저 선수가 저 여자를 저렇게 애지중지하겠어? 발이 땅에 닿는 것도 못 참아 하는 것 같은데. 자기야, 나도 저렇게 들어 줄 수 있지? 우리 이따가 저렇게 하고 사진 찍자.”

남자의 등에서 땀이 삐질삐질 흘렀다. 이런, 기윤기 선수 때문에 애꿎은 제 팔다리만 후들후들 떨리게 생겼다.

***

데이트를 마치고 돌아온 두 사람은 당연하다는 듯이 사랑을 나누었다.

윤기는 집으로 오자마자 시호를 벽으로 밀어붙이고 입술을 겹치며 그녀의 부드러운 살결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음…….”

포개진 입술 사이로 말캉한 혀가 야릇하게 오가며 서로를 휘감았다. 더 갈 곳이 없는데도 시호는 자꾸만 몸을 붙여 오는 윤기에 의해 계속 뒤로 밀렸다.

“윤기야…….”

시호가 달뜬 호흡이 섞인 미약한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윤기는 그녀를 번쩍 안아 들고 침실로 향했다.

등에 폭신한 침구가 닿는 동시에 윤기가 자신의 위로 겹쳐졌다.

“선배, 오늘 즐거우셨습니까?”

나른한 미소를 지으며 다정히 속삭이는 윤기의 모습에 시호의 몸이 흥분으로 움찔 떨렸다.

“좋았어…… 바다도 예뻤고…….”

시호가 손을 들어 윤기의 뺨을 감쌌다.

“기윤기가 계속 예쁘다고 해 줘서.”

“예쁘니까요.”

“안아 주고…… 뽀뽀해 주고…… 계속 다정하게 챙겨 줘서.”

“사랑하니까.”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윤기의 모습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사랑해.”

그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다시 한 번 말했다.

“사랑한다, 서시호. 지금도, 앞으로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밖에 없을 겁니다.”

***

월요일.

시호는 평소보다 한 시간 정도 늦게 눈을 떴다. 커다란 침대에는 저 혼자였다.

하지만 누가 머물렀던 흔적은 아주 깊게 남아 있었다. 그녀의 몸 구석구석이 꽃잎이 스며든 듯 붉었다.

“흐아. 많이도 남겨 놨네. 하긴, 그렇게 많이 했으니…….”

제가 한 말에 시호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주말 내내, 윤기는 뜨겁게 저를 안았다.

아침에 윤기가 나가기 전, 제 이마에 입을 맞추며 언뜻 뭐라고 한 것 같기는 한데 기억은 안 난다. 아마 다정한 인사였을 것이다.

미소를 지으며 기지개를 쭉 켠 시호는 이불을 젖히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일단 씻고 나서 간단히 브런치를 먹고 움직이자.

“윽. 허벅지 안쪽이 얼얼해.”

아마 윤기가 참가하는 대회가 열리는 10월까지는 이런 상태가 지속되지 않을까 싶었다. 큰 대회를 앞두고는 사랑을 나누는 것을 자제하기로 어제 합의를 봤다.

윤기를 위해서, 또한 자신의 체력을 보전(?)하기 위한 조치였다.

“저렇게 날 번쩍번쩍 들어 올리다가 혹시라도 손가락이나 팔목에 무리가 가면 안 되는데. 앞으로는 안아 드는 것도 하지 말라고 해야겠어.”

단단히 결심한 시호는 윤기가 준비해 놓고 간 토스트를 앙 베어 물었다. 아, 맛있다. 기윤기는 못하는 게 없다니까.

Rrrrr Rrrrr!

휴대폰이 울렸다. 유독 날카롭게 들리는 건 기분 탓인가?

“휴대폰아. 너 어디에 있니.”

소리를 따라가니 휴대폰은 침대 밑에 떨어져 있었다. 휴대폰을 주워서 화면을 본 시호의 얼굴이 굳었다.

심장이 콱 막히는 기분에 한 번 심호흡을 하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나다.

시호의 미간이 설핏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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