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화
시호가 작게 숨을 들이마셨다.
“혼자서 생각할 시간이 좀 필요해서. 미안해.”
그녀의 가라앉은 목소리에 윤기는 알겠다고 말했다.
- 기분 나아지시면 꼭 연락해 주세요.
“응. 미안해.”
- 그런 말 하지 마십시오. 제가 필요하면 연락하시고요. 언제든 달려갈 테니까.
그의 말에 울컥 차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 간신히 대답했다.
“……고마워.”
전화를 끊고 난 후.
차에 몸을 실은 시호는 시트에 머리를 기대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긴 시간 동안 가장 친하다 여겼던 친구와의 사이가 이렇게 되니 머리가 복잡하고 속이 답답했다.
지금은 윤기와 만나기보다는 혼자서 차분히 생각을 정리하는 게 좋을 듯했다.
내가 지금껏 잘못 살아온 걸까.
맹세코 민주를 얕잡아 보면서 우월감을 느끼거나 잘난 척을 한 적은 없었다.
오히려 다른 사람에 비해 한없이 모자란 자기 자신을 다잡으면서 살아왔는데.
“……하아.”
핸들에 팔을 올리고 얼굴을 묻었다. 딱 울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오래전 말라 버린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민주가 윤기를 좋아했다니. 전혀 몰랐다.
언제부터였을까? 고등학생일 때부터 마음에 품었던 걸까?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디 멀리 가서 바람이라도 쐬고 오면 좀 나으려나.
간신히 정신을 차린 시호는 집에 도착했다.
텅 빈 공간이 오늘따라 더욱 적막하게 느껴졌다.
윤기가 떠올랐다. 따뜻한 품과 다정한 눈빛과 부드러운 손길이 그리웠다.
지금 전화하면 곧바로 달려오겠지.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지금은 온전히 홀로 생각하고 견뎌 내고 일어서야 할 때였다.
민주에게서 심한 말을 들었지만, 그 애의 솔직한 마음도 함께 들었다.
각자 차분히 생각을 정리한 후, 다시 한 번 대화를 나눈 다음 결정해도 늦지 않을 듯했다.
“인간관계는 참…… 어렵네.”
아마 나이를 먹어도 이런 고민은 계속될 것이다.
나도 모르는 새 상처를 주고, 또 받겠지.
문득 시호는 윤기가 곁에 있어 준다면 견딜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보라. 자신을 안아 줄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아까보다는 훨씬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어느새 울렁거리던 속이 가라앉아 있었고 지끈거리던 두통도 나아졌다.
이래서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다고 하는 것인가 보다. 재혁과 함께 살 때에는 하루빨리 혼자가 되기를 지독히 바랐었는데.
민주의 마음을 알았다고 해서 윤기를 포기할 생각은 없다. 그건 말이 안 된다. 다만, 가까운 친구의 가슴앓이를 알아주지 못한 데 대한 자책을 느꼈다.
일부러 곁을 내어 주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저 상황과 환경 때문에 검도에만 집중해도 벅찼을 뿐이다.
민주가 이런 자신을 이해해 준다고 여겨서 더 고맙고 미안했었는데.
‘나는 누군가를 외롭게 만들고, 또 스스로를 외롭게 만들 운명일까?’
만약…… 나중에 윤기도 제 옆에서 이런 감정을 느끼게 된다면…….
“아냐.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해 생각하지 말자.”
***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 어느덧 금요일이었다.
그사이 윤기는 보수 작업을 끝낸 연교시청 체육관으로 돌아가 원래대로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훈련에 임했고, 시호는 선수단 창립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틈틈이 공사 현장을 들르는 것은 물론 무영단의 마크와 현판 주문을 넣었고, 오늘은 대학 선배인 용진과 만나 구두 계약을 맺었다.
용진은 다음 주 금요일에 코치 계약을 하는 날, 마케팅을 맡아 줄 사람을 찾아 함께 데려가겠다고 했다. 참 고마운 사람이었다.
주위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찾아보면 제게 호의적인 사람이 없지는 않았다. 그만큼 자신이 주변에 무관심했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반성한 시호는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무영단 사람들에게 든든한 기둥이 되어 줄 것이다. 외롭다고 느끼지 않도록 물질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최선을 다해 지지할 거다.
서울에서 연교에 도착하니 벌써 해 질 녘이었다. 6시 11분. 윤기가 훈련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씻는 것까지 완료했을 시간이었다.
시호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얼마 지나지 않아 기다렸다는 듯이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 선배.
“뭐 하고 있어?”
- 씻고 나왔습니다. 선배는 어디십니까?
“난 이제 IC 지나서 막 연교 시내에 들어온 참이야. 저녁은 먹었어?”
- 아직 안 먹었습니다.
“같이 저녁 먹을까? 기름진 음식은 안 되니까…… 불고기정식백반은 어때? 한우에 직접 기른 유기농 야채만 쓴다는데.”
- 지금 나가겠습니다.
칼 같은 즉답에 시호는 저도 모르게 볼이 붉어졌다. 그가 자신과의 만남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 수 있었으니까.
연남동 데이트를 마지막으로 헤어진 수요일부터 오늘 금요일까지, 한 번도 만나지 않고 저녁에 잠깐 통화만 했다.
서로 시간이 맞지 않기도 했지만, 윤기를 만나면 저도 모르게 그에게 푸념을 늘어놓거나 하소연을 할까 봐 스스로가 걱정되어 의식적으로 피한 것도 있었다.
윤기의 앞에선 한없이 나약해지고 허물어지려는 자신의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잘못하다가는 그를 향한 민주의 마음까지 모조리 털어놓게 될 수도 있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함부로 전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니까. 그런 짓을 할 수는 없었다.
다행히 그동안 마음이 많이 정리되어서, 윤기를 귀찮게 하지 않을 자신이 있을 정도가 되었다.
비상등을 켜고 정문에 잠시 대기하고 있는데 곧바로 문이 열렸다.
“선배.”
뛰어왔는지 윤기의 호흡이 흐트러져 있었다.
“천천히 와도 되는데.”
그의 눈빛이 짙게 내려앉았다.
“그럴 수가 없었어요.”
강렬한 시선이 시호를 얽맸다.
“보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윤기의 뺨을 조심스럽게 매만진 시호가 그에게 살짝 입을 맞추었다.
흔들리는 동공을 마주한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술을 겹쳤다. 주고받는 더운 숨에 서로를 향한 그리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치약 맛이 나. 쓴데…… 달아.”
윤기는 아직 갈증이 가시지 않은 눈빛으로 시호의 입술을 매만졌다.
“선배, 이제 생각은 좀 정리되셨습니까?”
그녀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우리 내일 데이트할까요?”
“데이트? 너 운동 가야 하잖아.”
“끝나고 나서 바로 출발하면 가볍게 다녀올 수 있을 겁니다.”
속절없이 시호는 설렜다.
이 얼마 만에 해 보는 데이트란 말인가.
사실 재혁과는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해 본 적이 없었다.
외식을 해도 친분을 공고히 다져 놔야 하는 사람이 운영하는 곳에서 데이트인지 사교 모임인지 모를 시간을 보냈고, 시부모와 함께 살던 터라 오후에 훌쩍 근교로 드라이브를 다녀오는 것은 엄두도 못 냈다.
“어디에 갈 건데?”
“서해안은 어떠십니까?”
바다라니! 시호의 눈에 빛이 반짝거렸다. 도대체 마지막으로 바다를 본 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난다.
“너무 좋아. 진짜 오랜만에 가 보는 것 같아.”
윤기가 손가락으로 시호의 볼을 살살 쓸며 다정한 눈빛으로 보았다.
“다행입니다. 기분이 나아져서.”
시호가 윤기의 손에 뺨을 더욱 깊이 묻었다.
내일 윤기와 함께 바람을 쐬고 온다면 확실히 머리가 더 맑아질 것 같았다. 어차피 계속 생각해 보았자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니, 이렇게 기분을 환기하는 것도 좋을 듯싶다.
윤기는 필요할 때 필요한 것을 주는 사람이었다. 어쩜 이리 귀신같이 제 마음을 알아채 주는지, 참 신기했다.
그러다 민주가 윤기를 좋아했다는 말이 떠오르자 다시금 마음이 무거워졌다.
“왜 그러십니까?”
어쩐지 민주와 같은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애들이 제게 다가오지 않은 이유가 혹시 이런 이유 때문이었을까.
새삼 윤기가 얼마나 잘난 사람인가를 깨닫게 되니 마음이 복잡했다.
“내가 많이 노력해야겠다.”
“뭘 말입니까?”
“기윤기가 너무 잘나서 위기감이 드네.”
윤기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마저도 지독하게 잘생겼으니 참. 할 말이 없다.
“신기해. 네가 날 좋아해 주는 게.”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는 애가 날 좋아해 주다니, 그래도 전생에 나쁜 짓만 한 것은 아닌가 보다.
“당연합니다. 선배를 보고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설레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툭툭 내뱉는 윤기의 모습에 시호는 더욱 설렜다.
“강의라도 받는 거야? 그런 말은 어디서 그렇게 배워 와?”
“선배를 보면 자연스럽게 나옵니다.”
그의 진지한 답변에 결국 시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고 말았다. 내가 이 애를 이길 날이 올까 싶다.
“왜 그러십니까?”
“저기, 오늘은 저녁 먹고 각자 집으로 가서 내일 만나자.”
윤기의 표정이 굳었다. 그리고 시호의 다음 말을 듣는 순간 단번에 풀렸다.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한 번도 못 해 봤거든. 뭐 입을까, 뭐 먹을까, 생각하고 준비하면서 부산 떠는 거. 꼭 해 보고 싶었어.”
윤기가 픽 웃으며 시호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런 이유라면 환영입니다.”
그가 덧붙였다.
“단, 이번만입니다. 더는 선배와 오래 떨어져 있는 건 사양이니까.”
***
다음 날.
시호는 아침부터 설레는 마음으로 거울 앞에 섰다.
옷을 고르고, 화장을 고치고, 서해안의 맛집을 검색하다 보니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Rrrrrr!
시호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선배, 준비 다 끝나셨습니까? 정문에 차 대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응, 지금 나갈게.”
윤기가 낮게 웃는 소리가 났다.
“왜 웃어?”
- 귀여워서요. 놀이동산 가는 어린이 같아서.
시호의 볼이 붉어졌다.
“또 놀리지.”
- 천천히 나오세요. 넘어지지 않게.
웃음기가 묻어 있는 윤기의 음성이 듣기 좋았다.
“알았어. 그런데…… 거기에 밀짚모자도 팔까?”
망설이던 시호가 겨우 내뱉은 말에 윤기는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나름대로 진지하게 물어본 건데. 민망해진 시호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왜에. 웃지 마.”
- 하하. 서시호 어린이가 너무 귀여워서 안 웃을 수가 없는데요.
정말로 귀여워 죽겠다는 듯한 윤기의 목소리에 시호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귀엽다니. 어릴 때 이후로는 부모님을 비롯해서 친구들, 또 재혁에게도 못 들어 본 말이다.
- 밀짚모자 안 팔면 제가 어떻게든 구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내가 언제 상심을 했다고 그래.”
낮은 웃음소리.
“나 지금 나갈 거야. 끊어.”
알겠다고 대답한 윤기는 전화를 끊는 순간까지 웃었다.
처음 들어 보네. 기윤기가 이렇게 크게 웃는 건.
민망한 것은 민망한 거고. 어쨌든 기분은 좋았다. 윤기를 웃게 만들었으니까.
빨개진 얼굴을 톡톡 두드리던 시호는 다시 한 번 거울을 보고 외모를 점검한 후에 아파트 정문으로 향했다.
윤기의 차가 보이자 시호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차 문을 열고 조수석에 올라탄 순간, 윤기가 목을 감싸 당겨 쪽, 입을 맞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