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화
비 오는 날, 수줍은 얼굴로 제게 우산을 건넨 후 부끄러운 듯 휙 돌아서 가 버리는 잘생긴 남학생.
거기에 날아오는 축구공을 막아 주기까지 했으니 그야말로 한 편의 멜로드라마였다.
[민주야, 미안. 늦었지.]
시호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서둘러 다가왔다.
[아냐. 별로 안 기다렸어.]
[우산 가져왔네? 다행이다. 난 안 가져왔거든.]
[아, 이거.]
윤기가 주었다고 말하려던 민주는 이내 그것을 혼자만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겨 두고 싶은 마음에 배시시 웃었다.
[왜 그래?]
[아냐. 같이 쓰자. 오늘 내가 아파트 앞까지 데려다줄게.]
시호의 팔짱을 낀 민주는 콩닥콩닥 뛰는 가슴을 끌어안고 다시 체육관을 힐끔 뒤돌아보았다.
[뭐 있어?]
[으응? 아니이.]
[오늘 좀 이상한데. 또 누가 하소연했어?]
[맞다, 아까 미리가 모의고사 성적 떨어졌다고 어찌나 난리를 치던지, 글쎄 내가…….]
창문으로 멀어지는 두 사람을 바라보던 윤기는 주먹을 꽉 쥐었다.
저 사람이 서시호 선배님과 제일 친한 사람이라고 했지.
시호가 감독님과 상담을 하는 바람에 우산을 직접 건네줄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민주를 선택한 것이다.
‘나에 대해 좋은 얘기를 해 줬으면.’
우산을 주고받으며 서로 다른 생각에 빠졌던 소년과 소녀였다.
그 이후로 민주의 눈은 계속해서 윤기를 좇았다. 그 애는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 사람이었다. 별명이 ‘연교 도련님’일 정도로 어마어마한 집안의 자제였다.
무섭다고만 생각했던 호랑이 교장선생님도 윤기의 앞에서는 눈이 휘어져라 웃으며 잘 보이기 위해 애썼다.
외모도 집안도 훌륭한데 검도 실력은 더더욱 훌륭했다. 지역 신문과 검도 잡지 인터뷰에 ‘한국에 다시없을 천재’라는 기사가 날 정도였다.
모든 걸 다 갖춘 대단한 사람이라서 쉽게 다가갈 수가 없었다. 게다가 1학년이라서 마주칠 일도 거의 없었다.
그래서 민주는 매일 시호를 기다렸다가 같이 하교했다. 운이 좋으면 시호에게 인사를 하러 온 윤기를 볼 수 있었다.
고작 몇 초였고, 제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지만 그래도 행복했다.
시호에게 털어놓을까 생각했지만 그만두었다. 우선 시간이 없었다. 2학기부터 시호는 대학에서 요구한 대회 성적을 맞추기 위해 본격적으로 훈련에 들어갔고, 민주 역시 수능 시험 준비로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윤기 같은 대단한 애를 저처럼 볼 것 없는 사람이 좋아한다고 말하기가 무척 부끄러웠다.
연예인 제의를 받을 정도로 예쁜 여학생이 윤기에게 고백했다가, 처참히 무시당해서 학교가 떠나가라 울었다는 소문은 유명했다.
그런 애도 거절당하는데 평범하디평범한 자신이 들이대 봤자 결과는 뻔했다.
그래도 시호라는 연결고리가 있으니까 어떻게든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는 품고 있었다.
비록 윤기에게 가까이 다가가지는 못했지만, 나름대로는 그와 관련한 소식을 거의 수집가처럼 모았다.
검도에 대해 잘 몰라도 경기 영상은 챙겨 보았고, 얼굴이 나온 부분은 캡처까지 해 뒀다.
자신이 대학교 3학년이 되어서야 윤기가 성인이 되었다. 그때까지도 윤기를 마음에 품고 있던 민주는 본격적으로 시호에게 마음을 털어놓고 도움을 청하려고 했다.
하지만 고등학생일 때와 마찬가지로 시호는 전지훈련이니, 하계 훈련이니 동계 훈련이니, 각종 훈련에 참여하느라 무척 바빴다.
그러다 4학년이 되었을 때, 발목이 접질리는 사고가 일어나고 말았다.
그로부터 약 1년간 시호와 연락이 되지 않다가, 대학교를 졸업하고 막 회사에 들어갔을 때였다. 시호로부터 RS그룹의 후계자와 결혼을 한다고 전화가 걸려 왔다.
소식을 듣자마자 든 생각은.
‘어쩜 이렇게 운이 좋을까.’
인기 없는 검도로 명문대에 진학, 발목 부상으로 선수 생활 은퇴와 동시에 재벌가 며느리라니. 차라리 로또 1등에 당첨될 확률이 이보다는 높을 것이다.
하지만 꼭 배가 아프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윤기를 좇다 보니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다른 사람보다 시호를 무척 잘 따랐다. 대놓고 쫓아다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차갑고 무뚝뚝한 남학생이 먼저 다가가 인사를 건네고 물병을 쥐여 주는 것은 오직 그녀뿐이었다.
주장을 향한 존경심이라고 애써 생각했지만, 시호를 향한 윤기의 눈빛은 자신이 그를 보는 눈빛과 같다는 걸 민주는 단번에 알아차렸다.
시호가 결혼한 후. 그녀라는 연결고리가 없어졌지만 어쩐지 마음은 더 가벼워져서 민주는 동문회 때 보다 적극적으로 행동했다.
웃으며 인사를 건네고, 옆에 앉아 음식 맛이 어떤지 묻기도 했으며, 주말에는 뭘 하냐고 물어본 적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윤기는 ‘넌 누구냐?’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아마도 저를 기억조차 못 하는 것 같았다.
충격이었다. 그와의 첫 만남이 민주에겐 아직도 어제처럼 선명한데, 그는 다 잊었던 것이다.
그러다 윤기의 시선이 먼저 제게로 닿을 때가 있었다.
시호의 얘기를 꺼냈을 때였다.
[참, 민주야. 서시호는 잘 지내? 걔 시집간 후로는 소식이 뚝 끊겼다, 얘.]
미리의 말에 민주는 내심 뿌듯했다. 이 많은 사람들 중에 시호와 연락하고 지내는 사람은 저뿐이었다.
[응, 잘 지내고 있어. 남편도 무척 잘해 준다고 하더라고.]
[그렇겠지. 첫눈에 반해서 대학 졸업하자마자 결혼까지 했으니. 하아. 좋겠다. 무슨 로맨스 소설도 아니고. 걘 인생이 어쩜 그렇게 꽃길이라니?]
미리의 푸념에 주위에서 맞아, 맞아, 하고 동조하는 소리가 파도처럼 일었다.
사실 시호는 남편이 잘해 준다고 말한 적이 없다. 그저 ‘잘 지내고 있다’고 했을 뿐이다.
그 애는 자기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단 한 번도 말이다. 늘 떠드는 것은 민주였고, 속마음을 털어놓고 진심으로 대하는 것도 민주 자신이었다.
민주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러다 고개를 든 순간.
윤기와 눈이 마주쳤다.
우아한 짐승이 사냥감을 살피는 듯, 느른하고도 강렬한 눈빛에 심장이 바닥으로 쿵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이제 저 애도 내가 눈에 보이는 걸까?’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윤기와 눈이 마주칠 때는 시호의 얘기를 할 때뿐이라는 것을 금세 깨달아 버렸기 때문이다.
윤기뿐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민주에게 관심을 가질 때는 시호에 관한 소식을 전해 주는 순간뿐이었다.
자랑스럽고 뿌듯하면서도, 허무하고 서글펐다. 서시호의 친구라는 이유를 빼면 자신의 가치는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본인이 이상하다는 것을 민주도 잘 알고 있었다. 시호와 친구가 되고 싶었고, 그렇게 되자 정말 기뻤다.
하지만 동시에 시호에게 미운 마음이 들었다. 스스로의 감정인데도 제대로 다룰 수가 없었다.
특히 윤기의 마음을 알게 된 후부터는 미운 마음이 더욱 커져만 갔다.
언제부터인가 운발 억세게 좋은 서시호를 보면,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것만 더욱 확실해져서 짜증만 났다.
질투하고 시기하고, 부러워서 상냥한 말투에 미운 말을 섞어 얘기했지만 그래도 시호를 좋아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감정들이었다.
이런 친구가 있어 자랑스러우면서도, 자신은 한참 미치지 못하는 것 같아서 자격지심이 들었다.
스스로가 못났다는 걸 알면서도 고칠 수가 없었다.
좋아하는 친구가 다른 사람과 더 친해질까 봐 말을 과장하거나 축소하여 전달했고, 눈치를 보며 상대방이 듣고 싶은 말만 했지만 속은 반대여서 시간이 지나면 모두 이런 자신을 눈치채고 떠나갔다.
[지금까지 애써 외면해 왔는데. 오늘 확실히 알았어. 넌 날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그러나 시호는 이런 제 모습을 눈치챘음에도 불구하고 옆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
“널 보면, 언제부터인가 화가 났어. 노력하는 것에 비해 너무 커다란 결과를 얻어 간다고 생각했어. 사람들의 관심도, 윤기의 시선도 손쉽게 가져가는 게 싫었어!”
울음 섞인 민주의 목소리에 시호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윤기?”
“그래, 기윤기! 고등학교 때부터 좋아했어. 근데 윤기가 널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된 순간부터 너에 대한 미움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갔어.”
의외의 말에 당황한 시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전혀 몰랐다. 민주가 윤기를 좋아하는 줄은.
시호의 눈빛에 민주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너무 꿀려서 자존심 상했어. 난 내세울 게 하나도 없는 애니까.”
계속해서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민주를 바라보던 시호는 가만히 냅킨을 건넸다.
멈칫한 민주는 그것을 받아 들고 눈가를 찍은 다음, 코를 팽-풀었다.
“집안 사정 어려운 건 마찬가지인데 너만 잘 풀리는 것 같아서 모든 게 다 원망스러웠어.”
처음으로 들어 보는 민주의 진심이었다.
“거기에다 넌 네 속마음은 하나도 얘기를 안 하니까. 나만 너랑 친구 하고 싶어서 매달리는 것처럼 느껴졌단 말이야.”
“넌 다른 사람들 얘기 들어 주는 것에 지쳤다고 했잖아.”
민주가 눈을 크게 떴다. 그건 미리나 소연 같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재미없는 자기 얘기만 줄줄이 늘어놓는 애들을 말한 거였지, 시호는 달랐는데!
“다른 애들 얘기 들어 주는 것에 지쳤다고 해서 나까지 피곤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어.”
민주의 눈에 다른 의미의 눈물이 고였다. 시호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애들의 푸념을 들어 주는 것은 짜증 나지만, 시호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민주는 자신도 시호에게 의지하고 싶은 친구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속내를 털어놓지 않아서 섭섭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시호는 자신을 배려하고 있던 거였다니.
“미안해, 시호야. 정말 미안해. 네가 너무 좋은데 그만큼 질투도 나고 미웠어. 나도 나를 이해할 수가 없었어.”
민주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흐느꼈다. 그런 친구를 보는 시호의 표정은 착잡했다.
민주가 꼭 재혁처럼 느껴졌다. 가장 가까이에 있다고 생각했고,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 서로 마음을 털어놓은 적은 없었고, 그러므로 가장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일단 오늘은 이만 일어나자.”
놀란 민주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미, 미안해, 시호야. 응? 우리 이제 다시는 못 보는 거야? 더는…… 친구 할 수 없는 거야?”
“각자 시간을 갖고 좀 진정이 된 후에 차분히 다시 이야기하는 게 좋겠어.”
맞는 말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민주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 내며 일어섰다.
가게를 나와 각자 방향으로 헤어지려는데 민주가 시호를 불렀다.
“시호야, 네가 날 진심으로 생각해 줬다는 거 알아. 자격지심으로 꼬인 내 마음이 너를 힘들게 했다는 것도.”
“…….”
“소연이한테는 전화하지 않아도 돼. 내가 어떻게든 해결할게. 그럼 조심히 들어가.”
민주는 자신의 차로 향했다. 그런 친구를 바라보던 시호는 윤기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얼마 울리지 않아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휴대폰을 보고 있었던 것 같았다.
“윤기야.”
- 네, 선배. 끝나셨습니까?
“미안한데. 오늘 못 만날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