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화
민주는 입을 삐쭉였지만 할 말은 없었다. 여기서 번호를 주지 않아도 문제여서 하는 수 없이 시호에게 소연의 연락처를 넘겨주었다.
어쨌든 시호가 나서서 해결되지 않은 일은 없으니 한고비 넘겼다는 생각에 민주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답답했던 마음이 좀 풀리는 기분이었다.
손해배상이니 뭐니 하는 말로 제 기분을 나쁘게 했지만 이번만은 시호를 용서해 주기로 했다.
뭐가 어찌 됐든 해결되어 다행이다.
김소연 그 기지배가 성깔이 워낙 드러워야지. 얼굴 맞대고 싸우면 이길 수 있는 사람이 많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시호라면 그 목을 조르는 듯한 압박감이 느껴지는 눈빛으로 소연을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시호야, 오늘 미안해. 그치만 너도 말이 좀 심했어.”
시호가 민주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난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뭐……라고?”
당황한 표정이 역력한 민주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더 심한 말을 했을 거야. 그나마 우리가 친구였으니까 이 정도에 그치는 거라고 생각해.”
“친구였으니까? 그럼 이제 친구가 아니라는 말이야? 너 어쩜 그럴 수가 있어? 친구끼리 싸우고 그러다가 화해도 하는 거지! 네가 운동만 해서 잘 모르나 본데, 원래 다 이래.”
예전부터 민주는 이런 성격이었다.
겉으로는 두루두루 잘 지내는 것 같은데 항상 한두 명과 트러블이 있었다.
얘기를 들어 보면 언제나 민주가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고, 상대방이 괜한 시비를 걸어서 분쟁이 일어난 거였다.
미안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지만, 스스로가 잘못했다고 생각해서라기보다는 그저 그 순간을 넘기려는 대응책인 듯했다.
그래도 저를 챙겨 주고 무슨 일이 있으면 가장 먼저 제게 달려와 주는 것이 고마워서 단점은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오늘 민주는 겨우 아물어 가는 시호의 가슴에 서슬 퍼런 칼을 꽂았다.
“앞으로 더는 이런 일 없었으면 해.”
“……알았어. 미안하다고 했잖아.”
“또 한 번 나에 대해 함부로 떠들고 다니면 그땐 나도 내가 어떤 행동을 할지 모르겠다.”
시호의 눈빛이 차갑게 굳었다. 이런 시선을 처음 받아 보는 민주는 놀라 눈만 끔뻑거렸다.
“지금까지 애써 외면해 왔는데. 오늘 확실히 알았어. 넌 날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무슨……! 아냐, 절대로!”
“네 변명 들을 시간도, 마음도 더는 없어. 이번이 마지막일 테니까 똑바로 들어. 만약 또다시 나나 나와 관련된 모든 것들이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내릴 경우, 각오해야 할 거야.”
시호는 차갑게 내뱉었다.
“네 말대로 난 돈, 백, 영향력 다 있으니까.”
민주의 몸이 분함과 두려움으로 부들부들 떨렸다.
“서시호, 너 말 다했어?!”
지금까지 시호에게 쌓여 왔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폭발했다.
“운발 억세게 좋은 너는 모르겠지! 네가 손쉽게 가진 거, 다른 사람들은 죽어라 노력해도 손에 닿을까 말까 한다는 걸!”
서시호는 예전부터 뭐든 쉽게 얻었다.
타고난 재능으로 검도 선수가 되어 상을 싹쓸이하고, 그걸로 대학까지 갔다. 본래 성적으로는 될까 말까 한 명문대를, 인기도 없는 검도라는 종목으로 말이다!
시호의 운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생소하고 인기도 없는 검도를 취미로 삼은 대기업 후계자가 팬이라며 쫓아다니다 청혼을 해서 결혼까지 했다.
가장 열 받는 건, 차갑고 무뚝뚝한 기윤기의 마음까지 얻었다는 것이다!
속이 상하다 못해 문드러졌다.
너무 높은 곳에 있어,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던 윤기에게 시호는 너무나도 쉽게 가까이 다가갔다.
결혼에 이혼까지 했는데도 말이다!
시호가 연교에 온다는 말을 듣는 순간부터 불안했다. 해서 충동적으로, 또한 습관적으로 친구들에게 시호에 관한 말을 흘렸다.
윤기를 좋아하게 된 그 순간부터 시호를 향한 양면적인 마음이 싹텄다.
그래서 시호가 결혼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무척이나 안심되고 기뻤다.
시호가 행복하게 오래오래 결혼 생활을 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윤기에게 다가가려고 했다.
동문 모임에서도 그의 주변을 빙빙 돌았고, 그가 출전하는 검도 대회가 열리면 최대한 직관하려 노력했다. 연결고리가 시호뿐이라 직접적으로 연락을 취할 방법은 없었지만, 그래도 노력하고 있었다.
그런데 시호가 돌아와 버렸다.
아니나 다를까, 연교에 오자마자 시호는 윤기와 금세 가까워졌다. 무려 같은 아파트에 살면서 말이다.
‘넌 뭐가 그렇게 항상 쉽게 풀리니, 서시호.’
민주는 윤기를 처음 본 날을 떠올리다가 그보다도 훨씬 전, 시호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
고등학교에 입학한 민주는 반의 유일한 체육 특기자와 짝꿍이 되었다. 차분하고 어른스러운 그 애가 바로 시호였다.
자신은 소심하고 남의 눈치를 살피는 게 몸에 배어 있는데, 시호는 남들이 뭐라든 신경 쓰지 않고 묵묵히 제 갈 길을 갔다. 그런 모습이 참 멋있었다.
하지만 시호는 쉬는 시간에는 엎드려 잠을 자거나 자신을 찾아온 검도부 사람과 얘기를 나누었고, 현장학습이나 수학여행 등에는 훈련을 하느라 참여하지 않아서, 민주는 그때 어울릴 반 친구들을 사귀어 놓았다. 그들이 소연, 미리, 윤진이었다.
어쩌다 보니 넷이 다니게 되었지만 민주는 시호가 제일 좋았고, 시호와 가장 친한 사이이고 싶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민주는 자신의 바람을 이룰 수 있었다. ‘서시호랑 가장 친한 친구’ 하면 ‘인민주’라는 답변이 당연하게 뒤따랐다.
학교가 끝난 후 시내에서 다른 친구들과 놀다가 헤어지고 다시 학교로 갔던 것이 그 방법이었다.
우이고 검도부는 체육관에서 늦게까지 훈련을 하기 때문에, 빈 교실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가 검도부 훈련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나가면 시호와 함께 하교할 수 있었다.
자신이 시시콜콜한 얘기를 재잘재잘 떠들면 시호는 옅은 미소를 띠며 가만히 들어 주었다.
언제나 다른 친구들의 말을 들어 주느라 지쳐 있던 민주에게는 단비 같은 시간이었다.
고3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시내의 카페에서 모의고사 점수가 떨어진 미리의 푸념을 들어 주느라 지쳤던 민주는 터덜터덜 다시 학교로 향했다.
거의 다 도착했을 때쯤 하늘이 어두워졌다. 비가 쏟아질 것 같았다.
‘우산 안 가지고 왔는데. 시호는 있으려나?’
걸음을 재촉한 민주는 도서관에서 자습을 하다가 검도부 훈련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나갔다.
검도부는 학년이 높은 순서대로 씻고 체육관을 나왔다. 3학년은 남자 다섯 명에, 여자는 시호 한 명뿐이었다.
먼저 나온 남자애들 몇몇이 민주를 보고 알은체를 했다.
[어이, 인민주! 너 또 서시호 기다리냐?]
[서시호 지금 감독님하고 면담 중이라 좀 늦을 듯.]
2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구정훈과 신대현이었다.
[그래?]
[응. 서시호 수영대에서 스카우트 제의 왔다. 개부러움.]
민주의 눈이 커졌다. 수, 수영대? 거긴 성적이 엄청 좋아야 하는 곳인데?!
시호가 다른 운동부 애들보다는 성적이 좋은 편이긴 하지만…… 그래도 거긴 상위권 애들만 노리는 곳인데.
‘거기에서 직접 모시러 왔다는 거야?’
민주는 기분이 묘했다. 저는 힘들게 밤을 새워 가며 공부를 하는데 누구는 대학에서 모시러 오다니.
물론 시호도 우리가 공부할 시간에 열심히 훈련을 할 테지만…….
‘그래도 전 과목 골고루 다 챙겨야 하는 공부보다는 운동이 쉽지 않나? 맨날 똑같은 동작만 반복하면 되잖아.’
훈련 과정을 직접 본 적이 없는 민주는 그것이 얼마나 고되고 힘든지 잘 몰랐기에, 쉽게 생각하며 입을 삐죽거렸다.
[역시 서시호. 한국대에서 여자 선수도 뽑았다면 백퍼 거기 가는 건데.]
[그니까. 서시호 정도면 성적도 괜찮은 편이고. 검도부에서는 톱 아니냐?]
[어. 실력도 톱인데 성적도 톱, 완전 괴물. 그러니까 우리가 만장일치로 주장으로 뽑았지.]
[서시호, 수영대 말고도 여자 선수도 있는 대학에서 다들 데려가려고 난리야.]
헉. 시호가 그 정도로 대단한 거야?
조회 시간에 무슨 대회 나가서 상 받았다고 앞에 나가긴 했지만, 이 정도로 대단한지는 잘 몰랐다.
‘시호가 정말 엄청난 애였구나…….’
질투심이 일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런 애와 가장 친한 친구라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쨌든 감독님이랑 대학 상의하느라 좀 늦어질 듯.]
[알았어. 고마워.]
그들은 민주를 지나쳤다.
[야, 비 오겠다. 뛰자.]
[아씨, 체육관에 안 쓰는 우산 하나 굴러다니던데. 그거 가져올걸.]
하늘은 점점 어두워졌다. 그러다 결국 뚝뚝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어떡해! 시호는 우산 있으려나?]
체육관 처마 아래로 뛰어 들어가려던 민주에게 축구공이 휙 날아왔다.
[엄마야!]
머리를 감싼 채 허리를 숙이고 눈을 꽉 감은 순간.
턱. 누군가 공을 잡았다.
민주는 한쪽 눈씩 차례로 떴다. 키가 엄청 크고 어깨가 굉장히 넓은 남자가 제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죄송합니…… 헉, 윤기야. 미, 미안.]
공을 잡으러 뛰어온 남학생이 민주의 앞을 가로막은 남자를 보며 숨을 헉 들이켰다.
[방향을 잘못 잡아서, 지, 진짜 미안.]
[……여기.]
남자가 공을 건네주자 남학생이 다시 한 번 미안하다고 사과하고는 황급히 운동장으로 뛰어갔다.
‘이건 검도복이잖아.’
민주가 생각한 순간, 자신을 지켜 준 남자가 뒤를 돌았다.
윤기라고 불린 남학생의 얼굴을 본 민주는 정말로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신이 심혈을 기울여 빚은 듯 반듯한 이목구비와 강렬한 눈빛, 고등학생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완벽한 인체 비율.
무엇보다 검도복 아래로 드러난 손등에는 굵은 핏줄이 울툭 튀어나와 있어서 성숙하고 야릇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야말로 귀공자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우아하고 강인한 사람이었다.
‘저 손으로 날 지켜 준 거구나.’
민주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첫눈에 반한 순간이었다.
윤기는 손목에 걸고 있던 접이식 우산을 민주에게 건넸다.
[나, 나 주는 거예요?]
민주의 말에 윤기가 도로 우산을 거두며 인상을 썼다.
굉장히 차갑고 싸늘한 분위기라 민주는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인상을 쓰니까 되게 무서웠지만, 카리스마도 배가 되어서 그조차도 멋있었다.
[……서시호 선배님이랑.]
민주는 눈을 고쳐 떴다.
[네, 제일 친한 친구예요.]
윤기의 표정이 더욱 구겨졌다. 뭘 생각하는 것 같기도, 망설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다 거세진 빗줄기가 후드득 떨어지자, 윤기는 던지듯 민주의 품에 우산을 안기고는 그대로 뒤돌아서서 체육관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어안이 벙벙하여 눈을 깜빡이던 민주의 볼이 이내 붉게 물들었다.
[와…… 꼭 영화 같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