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화
하나 시호는 겉으로는 절대 드러내지 않았다.
허리를 바로 세우고 은은한 미소를 띠었다. 그녀는 지금껏 위기가 닥칠 때마다 이렇게 의연히 견뎌 왔다.
이혼을 요구할 때만 예외였다.
그때는 간신히 허리를 세우긴 했지만 미소를 지을 수는 없었다.
그러다 결국 무너져 내렸다. 눈물을 펑펑 쏟아 내며, 더는 이렇게 살 수 없다며 울부짖었다.
시모는 품위 없는 언행을 지닌 사람은 더 이상 집에 둘 수 없다고 말했고, 시부도 경멸스러운 시선으로 동의했다.
재혁은 저를 미친 사람 보듯 놀란 눈으로 보기만 했다. 그 눈빛에 그간 참았던 외로움과 울분이 폭발했다. 그나마 내 편이라 생각했던 남편은 저를 외계인 보듯, 한 걸음 떨어져서 구경만 하고 있었다.
그제야 우리가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다는 실감이 났다.
지금도 그런 기분이었다.
내게 가장 가까웠던 사람이 실은 가장 먼 곳에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은 매번 미치도록 쓰렸다.
“……시호야.”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제 이름을 부르는 민주가 낯설게 느껴졌다.
그러나 시호는 이번에도 내색하지 않았다.
어차피 결론은 하나다.
멀어지는 것.
서로 모진 말을 내뱉으며 상처를 입느니, 이렇게 서서히 자연스레 멀어지는 것이 나았다.
“지금 소연이한테 메시지 보냈거든. 곧바로 정정해 줄 거야. 얘가 거기 임원이라서 문제 있음 바로바로 해결되거든.”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소연에게서 전화가 왔다.
- 민주야, 아까 톡 뭐야? 너 연교 맘카페 가입했었어? 글 삭제해 달라는 건 또 뭐고?
“아니. 방금 시호 만나고 들어가는 길인데 그 캡처 화면 보여 주더라고. 애들이 다니는 검도장이 아니라, 프로 선수들이 소속된 실업팀을 위한 수련관 건물인가 봐.”
- 뭐? 네가 분명히 검도장이랬잖아!
앙칼진 소연의 목소리에 움찔한 민주. 눈을 앞으로 돌리니 시호의 서늘한 시선이 맞부딪쳐 온다. 목소리가 절로 떨렸다.
“아, 아니,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
- 그걸 잘못 알려 주면 어떡해!
“근데 소연아. 우리 호프집에서 했던 얘기, 분명히 비밀이라고 말했었는데…….”
- 어? 어어, 그거는…… 나는 이혼한 것만 비밀인 줄 알았지.
잠시 주춤하던 소연의 목소리가 커졌다.
- 맞다, 네가 이혼한 것만 비밀이랬잖아!
“내가 언제……!”
- 서시호 연교 내려와서 검도장 운영한다고 알려줬잖아, 네가. 아냐?
“그, 그건…….”
- 시호가 이혼하고 형편이 안 좋아서 검도장 운영한다고 네가 분명히 그랬잖아. 아니면 내가 누구한테 들었겠어?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난 동창으로서 어떻게든 도와주려고 원생 모집해 줬던 거야.
이혼하고 생계가 어려워져 검도장을 운영한다는 건 자기들끼리의 추측이고 결론이었다.
물론 그걸 바로잡지 않기는 했지만 어쨌든 자신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으므로 민주는 억울했다.
“아무튼 시호가 글은 수정하거나 삭제해 줬으면 좋겠다고 해서.”
- 뭐라고? 난 절대 그렇게는 못 해.
예상치 못한 말에 당황한 민주의 눈이 커졌다.
“아니, 잘못된 정보로 피해를 보는 사람들이…….”
- 야, 네가 잘 모르나 본데. 연교 맘카페에서 내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알아? 내 말 한마디에 연교 엄마들 삶이 좌우된다고. 오픈 기념으로 사은품 준다고 거짓말했다가 뽀록난 가게 하나 문 닫게 만든 사람이야, 내가.
“…….”
- 그런데 잘못된 정보였다고 글 삭제하면, 내 평판이 어떻게 되겠어? 카페 회장님 얼굴은 또 어떻게 보고? 신뢰도 떨어져서 나 임원 탈락되고 협찬 끊기면 네가 책임질 거야? 어?
소연이 윽박지르며 따지는 말에 민주의 입술이 파들파들 떨렸다.
“소, 소연아. 일단 진정하고…….”
- 네 말만 철석같이 믿고 순수하게 호의를 베풀었는데, 지금 나 거짓말쟁이 되게 생겼어. 알아?
“…….”
- 한 명이라도 더 등록시키려고 선착순 20명한테 가입비 반값 할인해 주고 죽도 무료로 증정해 준다고 했는데, 너 때문에 다 망치게 생겼다고! 난 몰라, 네가 책임져.
툭, 소연은 전화를 끊어 버렸다.
민주는 떨리는 손으로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소연은 받지 않았다.
‘어, 어떡하지?’
만약 소연이 맘카페에 자신의 신상을 까발린다면?
걘 그러고도 남았다. 잘나가던 가게를 하루아침에 문 닫게 만들 정도니까, 저 하나 어떻게 하는 것쯤은 끓인 라면 먹기보다 쉬울 거다.
회사 홈페이지에 저에 대한 글이 올라오고, 그것을 본 회사 사람들이 자신을 보며 수군거리는 모습을 상상하니 온몸에 핏기가 싹 가시는 기분이었다.
백도, 돈도, 영향력도 없는 자신은 연교에서 추방되다시피 쫓겨날 것이다.
백. 돈. 영향력.
기댈 곳은 눈앞에 있는 시호뿐이었다.
“시, 시호야. 소연이가 글을 못 내려 주겠다고 하는데…….”
시호가 흐음, 하며 팔짱을 꼈다. 민주가 눈치를 보며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잘못된 정보를 올린 게 알려지면 소연이 평판에 엄청나게 안 좋은가 봐. 걔가 그 맘카페 임원인데 영향력이 장난이 아닌…….”
“그런데?”
민주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 어, 그러니까 내 말은.”
“그래서 결론이 뭐야?”
처음 듣는 시호의 차가운 목소리에 당황한 민주는 어버버거리며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소연이가 연교에서 여, 영향력이 커서…… 근데 나는 그런 게 하나도 없고…… 잘못 보였다가 날 공격이라도 하면, 나, 난 직장도 잃고 완전히 끝인데…….”
아무런 반응 없이 그저 자신을 물끄러미 응시하는 시호의 시선에 말이 더욱 뒤엉켰다.
“무서워서 그랬어. 나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데, 시호 넌 아니잖아. 내가 기댈 건 너밖에 없고, 또…….”
“인민주.”
거짓말처럼 말이 뚝 멈췄다.
“네가 잘못해서 내가 피해를 입었는데. 수습까지 나더러 해라?”
“시, 시호야, 말을 왜 그렇게 해.”
시호와 대련을 했던 사람들의 마음이 이랬을까?
고요하지만 서늘한 안광에 몸에 쭈뼛 소름이 돋았다. 그저 가만히 서 있을 뿐이지만, 아주 조금의 틈이라도 보이면 목이 물어뜯길 것만 같았다.
속이 떨리는 동시에 뒤틀렸다.
물론 자신이 잘못한 건 맞지만, 이럴 땐 먼저 위로를 한 다음에 얘기를 끝까지 들어 주는 게 맞지 않나?
하지만 평소와는 다른 시호의 모습에 민주는 입술을 꾹 깨물 수밖에 없었다.
어쩐지 그간 자신이 시호에게 가졌던 마음을 고스란히 들켜 버린 기분이었다.
“소연이의 사정과 입장은 이해하면서, 내 사정과 입장은 하나도 고려하지 않는 것 같네.”
“절대 그렇지 않아! 네가 오해한 거야, 시호야. 나 섭섭해지려고 그래.”
시호는 무심한 낯으로 물이 들어 있는 컵을 들어 빙빙 돌렸다.
“듣는 사람이 그렇게 느꼈다면, 말하는 사람이 잘못한 게 아닐까?”
꼭 대련이라도 하는 것처럼 민주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그런데 나도 너무 답답해서 그랬어. 소연이 걔가 얼마나 독종인데. 걔 때문에 문 닫은 가게도 있어. 난 혹시나 네 검도장에 피해가 갈까 봐 너무 걱정이 돼서.”
“내 선수단이 피해를 입는다면 그건 소연이 때문이 아니라 너 때문이지.”
“뭐라고?!”
화들짝 놀란 민주가 눈을 크게 뜨고 시호를 보며 입술을 파들파들 떨었다.
“잘못된 정보를 유포하고 수습 못 한 네 잘못이 크지. 따라서 너에게도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밖에 없어.”
손해배상이라니! 민주는 지금 제 귀로 들은 단어가 맞는가 싶었다.
“친구 사이에 어쩜 그렇게 매정하게 말할 수 있어? 10년 넘게 우정을 나누고 있는 사이에 어떻게 그런 말을 해?!”
부르르 떨리는 주먹을 무릎 위에 둔 민주가 입술 안쪽 살을 잘근잘근 씹었다.
서시호가 왜 이러지? 내 뜻대로 조종된 적은 없지만, 그래도 이 정도로 공격적이지는 않았는데.
“시호야, 내가 잘못한 거 알아. 근데 난 돈도 없고 백도 없어. 그렇지만 넌 아니잖아. RS그룹 며느리였으니까 인맥도 빵빵할 거고, 위자료도 많이 받았으면서. 친구 좀 도와준다고 생각하면 안 돼?”
여전히 시호가 미동도 없자, 민주는 뾰족한 마음이 일었다.
“자세히는 네가 말 안 해 줘서 모르지만, 남편이 손찌검을 해서 헤어진 건 아닐 거 아냐.”
“…….”
“내가 아는 언니는 폭력에 시달리다가 위자료 한 푼도 못 받고 내쫓겼어. 그거에 비하면 넌 힘든 것도 아닌데 좀 너그럽게 생각해 주면 안 되니? 솔직히 그거 온전히 네 힘으로 얻어 낸 것도 아니잖아.”
민주의 말에 시호는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언제나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한다는 듯이 말해 주었던 친구가, 실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댁 식구들처럼.
“물리적인 폭력만 폭력이 아니야.”
시호의 머릿속에서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결혼 생활을 담아 둔 상자가 덜컹, 열렸다.
[얘, 넌 좀 표정을 밝게 할 수 없니? 네 능력만으로는 넘치다 못해 쏟아지는 부와 명예를 갖고서도 왜 그렇게 죽상이야? 어휴, 보고 배운 게 있어야지.]
[너, 재혁이한테 내일 결혼기념일인 거 아느냐고 물었다며? 바쁜 사람한테 부담을 주면 어떡하니? 눈치도 없이. 백 하나 사 주면 성에 차겠어?]
[당신, 김 박사님한테 우울증 약 지어 달라고 했다면서. 나나 그룹 평판 생각해서 자중해 줬으면 좋겠다. 가서 쇼핑이라도 하고 오면 되잖아. 뭐가 답답하다고 그래? 운동했던 사람이니까 정신력은 강할 거 아냐.]
그녀 역시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려 했다.
때리는 것도 아닌데 조금만 참자.
재벌가에 시집왔으면 이 정도는 버티는 게 당연한 거야.
내 마음과 정신력이 약한 탓이지, 주변 사람은 잘못이 없어.
그렇게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피폐해진 정신은 결국 시호로 하여금 호텔에서 열린 바자회 때 케이크 나이프를 손목에 가져가게 했다.
물리적인 폭력도 아프지만 무관심이라는 정서적인 폭력 또한 만만치 않게 아팠다.
“때리는 것만 상처가 남는 게 아니라고.”
“갑자기 웬 뜬금없는 소리야?”
시호는 더 이상 타인이 저를 상처 입히도록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또한 민주와 이렇게 시간을 낭비할 생각도.
“소연이 연락처 좀 줄래?”
갑자기 단호하게 나오는 시호의 태도에 민주의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어, 일단 내가 물어보고…….”
“그냥 줘. 내가 우겼다고 할게.”
뭐라고 하려고 그러지? 설마 둘이 작당해서 날 궁지에 몰아가는 건 아니겠지?
……아냐. 시호가 그런 애는 아니잖아. 설마 그렇게까지 하겠어? 솔직히 내가 그렇게까지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닌데.
검도장이랑 검도단, 한 글자만 틀린 거잖아.
“의견 있으면 내가 전달해 줄게. 넌 소연이랑 학교 다닐 때에도 말 별로 안 해 봤잖아. 걔가 낯을 좀 가려서 까칠할 수도 있어.”
“민주야.”
차분하고 낮은 음성에 민주는 반사적으로 허리를 곧게 세웠고, 곧 그런 자신을 깨닫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나한테 도움 청한 거니까 내가 알아서 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