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르쳐 주세요 선배-30화 (30/81)

제30화

그가 눈을 접으며 웃자 시호의 속이 간질거렸다. 얘는 왜 이렇게 잘생겨서는…….

식사를 하는 내내 윤기의 달달한 눈빛은 시호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고, 가게를 나와서도 마찬가지였다.

후식으로 아이스크림을 각각 손에 쥔 그들은 남은 손을 붙잡고 거리를 걸으며 이곳저곳을 구경했다.

“아, 맞다. 윤기야, 나 저녁에 민주랑 약속 있어.”

시호가 누구를 만나든 그것은 그녀의 자유였다. 하지만 상대가 워낙 마음에 들지 않아서 윤기의 표정은 굳어졌다.

시호가 손을 뻗어 좁혀진 윤기의 미간을 꾹 눌렀다.

“왜 그런 표정이야.”

“…….”

“할 말이 있대. 나도 물어볼 게 좀 있고.”

“끝나고 꼭 연락하십시오.”

“응, 알겠어. 이 모자 쓰고 가야겠다.”

시호가 팔짱을 끼며 몸을 기대 오자 그의 얼굴이 조금 풀렸다.

그들은 잠옷으로 삼을 같은 사이즈의 커플 티셔츠를 사고, 작은 전시회도 구경하면서 이곳저곳 알차게 돌아다녔다.

키와 체격이 커다란 윤기는 워낙 눈에 뜨였다. 모자를 쓰고 있어도 반듯하고 잘생긴 이목구비는 팽팽하게 존재감을 겨뤘다.

슬쩍슬쩍 그를 훔쳐보는 시선을 느낀 시호가 어깨를 으쓱했다.

“왜 그러십니까?”

“시선 때문에. 기 선수님이 어지간히 뛰어나셔야 말이지.”

그녀의 말이 귀엽다는 듯 웃은 윤기가 시호의 머리에 쪽, 입을 맞추었다.

“저야말로 선배가 뭘 해도 예쁘고 사랑스러워서 미치겠습니다.”

“밖에서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했지!”

얘가, 정말. 날 매장시키려고 작정을 했구나.

“하루 종일 이렇게 같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윤기의 눈빛과 말투에서 진심이 묻어났다. 자신의 어깨를 감싸고 있는 강인한 손과 너른 품이 무척 든든하게 느껴졌다.

“선배가 내 여자라는 걸 온 세상에 자랑하고 싶다가도, 남들 눈 닿지 않는 곳에서 나 혼자만 보고 싶은 마음이 매순간 부딪칩니다.”

시호의 앞에서 윤기는 무척이나 솔직해졌다.

4년 전 그녀의 결혼 소식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후회한 것은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 못했던 점이었다.

윤기는 살아오면서 그때만큼 ‘만약’이라는 말을 떠올렸던 적이 없었다.

후회는 쓸데없고 가정은 더 쓸데없는 것이라 여겼던 그였지만, 시호의 결혼 이후 매일 후회와 가정 속에서 살았다.

만약 내가 마음을 표현했더라면.

그랬다면, 어쩌면 시호가 저를 돌아봐 주었을지도 모르고, 결혼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만약, 하늘이 제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준다면, 그래서 시호를 만나게 된다면.

이 마음을 아낌없이 드러내리라.

매일 그렇게 생각하며 살았다.

“1분 1초가 아깝습니다. 선배에게 해 주고 싶은 말과 해 주고 싶은 일들이 가득이라.”

윤기가 다정히 미소하며 시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사랑합니다, 선배.”

***

민주와 만나기로 한 초밥집에 미리 도착한 시호는 예약한 룸 안에서 자꾸만 발그레 달아오르는 뺨을 손으로 감쌌다.

오늘 데이트에서 윤기가 보여 주었던 달달한 모습이 떠올라서 속이 화끈거렸다.

“기윤기가 그렇게 다정한 사람인 줄 아무도 모를 거야.”

시호는 부끄러움에 입술을 안으로 말았다.

헤어질 땐 또 얼마나 절절하던지.

[꼭 연락해 주세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걱정과 미련이 철철 넘치던 그 눈빛조차 섹시하게 느껴져서, 시호는 드디어 자신이 미친 건가 싶었다.

동시에, 그것은 윤기가 민주를 얼마나 탐탁지 않아 하는지를 대변했다.

‘민주가 완전히 밉보였네.’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에 미닫이문이 옆으로 드르륵 밀렸다.

“시호야! 오래 기다렸어?”

민주가 미안하다는 듯 코를 찡긋하며 들어왔다.

“거의 다 와서 차가 막혔지 뭐야. 설상가상 주차장도 꽉 차서 주위를 몇 번이나 돌았어.”

사실 이곳으로 오다가 윤기를 발견해서 근처를 몇 번이나 돌았다.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키와 두 배는 넓은 어깨, 무표정한 얼굴에서 카리스마를 뿜어내는 사람은 기윤기밖에 없었다.

검은 캡모자에 검은 티셔츠를 심플하게 걸쳤는데도 그는 눈을 뗄 수 없는 아우라를 발산하며 이목을 집중시켰다.

초밥집 맞은편 카페 앞에 서 있던 그를 넋을 놓고 바라보는데 뒤에서 차가 클랙슨을 빵빵 세차게 울려 댔다.

하필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어서 어쩔 수 없이 움직여야 했던 민주는 초밥집 건물 주차장으로 가는 대신, 윤기를 보기 위해 근처를 빙빙 돌았다.

소연이 단톡방에 올린 사진을 본 후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윤기와 시호가 저 몰래 만나고 있을 것 같은 생각에 끙끙 앓던 민주는 이렇게라도 윤기를 보니 살 것 같았다.

‘다행이야. 혼자 있어.’

그리고 그가 카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헐레벌떡 약속 장소로 온 것이다.

“어휴, 땅덩이는 좁은데 차는 왜 이렇게 많은지 몰라.”

“고생 많았어. 코스 시키려는데 어때?”

“완전 좋아! 이게 얼마 만에 먹어 보는 고급 초밥이야. 맨날 무한리필 싸구려 초밥만 먹다가 호강한다, 얘. 이래서 친구 잘 둬야 한다니까.”

시호는 별 반응 없이 그저 미소만 지었다.

애피타이저로 전복을 넣은 계란찜이 나온 것을 시작으로 요리가 차례대로 테이블 위에 놓였다.

“어머, 회가 혀 위에서 사르르 녹네, 녹아. 맞다, 사진 찍어야지!”

민주는 신난 표정으로 여러 각도에서 음식의 사진을 찍었다.

“여긴 새우초밥도 때깔이 다르다. 맛은 더 좋고. 새우도 고급인가 봐. 하아, 시호 넌 좋겠다. 이런 거 먹고 싶으면 고민 없이 먹을 수 있잖아.”

“나도 검도단 운영하려면 아껴야지.”

시호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민주야, 혹시 내가 운영하려는 게 뭔지 알아?”

“응? 방금 말했잖아, 검도단.”

“프로 선수들이 소속된 실업팀이야. 그래서 기윤기를 첫 선수로 영입하고 싶다고 말했던 거고.”

윤기의 이름에 움찔한 민주가 곧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아휴. 알지, 그럼. 우리가 몇 년 친구인데, 내가 그런 것도 구분 못 할까 봐?”

“그럼 전달하는 과정에서 말이 와전됐나 보다.”

응? 전달하는 과정? 초밥을 우물거리는 민주에게 시호는 자신의 휴대폰 화면을 보여 주었다.

윤기가 보내 준 캡처 화면이었다.

“이게 뭐야?”

“한번 봐 줄래?”

대수롭지 않게 시호가 건네는 휴대폰을 받아 든 민주의 눈과 입이 크게 벌어졌다.

“이, 이게 왜……?”

“우리가 나누었던 대화. 다른 사람한테 얘기한 적 있니?”

시호는 화를 내는 것도, 추궁하듯 따지는 말투도 아니었다.

그저 평소처럼 차분한 목소리로 자신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할 뿐인데, 등골이 오싹할 정도의 압박감이 느껴졌다.

뜨끔한 민주는 대번에 눈썹을 팔자로 내려뜨리며 최대한 애처로운 표정을 지었다.

“미안해, 친구들이 하도 네 소식을 궁금해해서 그만. 나도 끝까지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자꾸 졸라 대니까 어쩔 수 없었어…….”

민주가 고개를 푹 숙였다.

“어차피 곧 이혼 기사 나갈 거라고 해서 알려도 된다고 생각했어.”

“……그랬구나.”

담담한 시호의 목소리에 민주는 애가 탔다.

“정말 미안해! 그치만 걔네 외에는 아무한테도 말 안 했어! 걔들도 다른 곳에서 절대 말 안 하겠다고 단단히 약속했는데…….”

역시 민주가 맞았구나.

그리고 자신의 생각대로, 이혼 기사가 곧 나갈 예정이라 괜찮다고 생각했나 보다.

좀 찝찝함이 남아 있긴 하지만, 어쨌든 벌어진 일을 두고 왈가왈부하는 것보다 수습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시호는 생각했다.

“그 화면을 보면 잘못된 정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거든.”

“미안해…….”

“나뿐만이 아니라 선수단에 관련된 사람 모두에게 피해가 갈 것 같아서. 당장 바로잡아 줬으면 좋겠다.”

“응응, 내가 소연이한테 당장 얘기할게!”

소연. 성씨는 김이었나. 시호는 늘 머리를 아래쪽으로 한데 모아 묶고 쌍꺼풀이 아주 옅게 진 찢어진 눈으로 저를 흘겨보던 여자애를 기억해 냈다.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지, 자신이 지나가면 꼭 함께 다니던 여자애에게 귓속말을 하며 킬킬 웃곤 했다.

그 애와 내 얘기를 하며 즐겁게 웃었을까.

“민주야, 나랑 친구라는 이유로 네가 답답한 일이 많았을 거라고 생각해.”

“아, 아냐! 전혀! 왜 그런 말을 해, 시호야…….”

“우리 사이에서 나눈 대화는 비밀로 해 달라고 했던 내 말, 기억나니?”

민주가 고개를 푹 숙였다.

“……으응.”

“특히 선수단 같은 경우는 시댁도 주시하고 있는 상황이라 무척 조심스러워.”

“정말, 미안해, 난 그냥 네가 너무 자랑스러워서, 내 친구가 이 정도로 대단하다는 걸 알리고 싶어서 그랬어.”

자랑스럽다. 대단하다.

현역 선수였을 때보다 결혼, 그리고 이혼 소식을 알렸을 때 민주에게 더 많이 들었던 말이었다.

선수였을 때 민주는 뭐라고 많이 말했었더라.

[어떡해, 힘들겠다. 난 죽었다 깨어나도 그렇게 격한 운동은 못 하겠어. 내조나 하면 모를까.]

[너무 축하해, 시호야. 훈련이 얼마나 힘들었니. 그거 견디고 메달을 따다니. 휴, 그래도 마음이 안 좋다. 발에 물집 잡힌 거 하며, 멍든 거 하며……. 너 볼 때마다 평범한 삶에 감사하게 된다니까.]

[많이 힘들지. 어휴, 땀 좀 봐. 난 땀 나는 거 싫더라. 찝찝하고. 밖에서 씻기는 더 싫고. 운동부에서 서로 안 사귀는 이유가 서로 밑바닥까지 보여서 그런가 봐.]

힘들겠다, 하지만 이러이러한 이유로 난 못 하겠다.

그저 민주의 말버릇이라 여기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는데, 다시금 생각하니 의미가 참……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물론 그때도 대단하고 자랑스럽다는 말을 하기는 했었지만 지금처럼 빈도수가 잦지는 않았다.

“내가 뭐가 그리 대단하니?”

“네가 얼마다 대단한데! 기사에도 나왔었잖아. 비인기 종목 선수 출신으로 재벌가 며느리까지 되고.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나서 어디 그게 쉽니? 완전 승천한 용이지.”

이때다 싶어 민주는 시호를 잔뜩 치켜세웠다.

“뿐이야? 이혼해서도 엄청난 위자료 받고 당당하게 살고. 가만히 있어도 평생 먹고살 수 있는데, 일을 찾아서 하잖아. 우리하고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됐지. 넌 정말 자랑스러운 친구야.”

묵묵히 말을 듣고 있던 시호는 테이블 어딘가를 바라보며 무언가를 가만히 생각하더니, 이내 픽 웃었다.

“시, 시호야?”

“그렇구나. 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그, 그러엄! 당연하지!”

시호는 쓴웃음을 지었다.

‘우리하고는’이라는 말에 속이 쓰렸다. 자신은 ‘우리’라는 말 안에 들어갈 친구가 아니라는 거니까.

검도 선수로서의 서시호를 지지하고 응원해 주는 줄 알았는데, 민주에게는 RS그룹 며느리라는 타이틀이 더 컸나 보다.

물론 사람마다 가치관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래도 가장 가깝다 생각했던 친구는 선수로서의 자신을 더 자랑스레 여겨 줬으면 했다.

이것도 내 욕심이겠지. 타인의 마음과 생각을 내 뜻에만 맞출 수는 없으니까.

그럼 RS그룹 며느리가 아니었을 때의 서시호는 네게 어떤 가치를 지닌 친구였을까.

그냥 반에서 혼자 운동부니까 불쌍해서 챙겨 줬을 뿐이었을까?

외로움이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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