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화
심장이 쿵쿵 뛰었다.
- 선배.
차 안 가득 울리는 목소리에 몸이 푹 감싸인 기분이었다.
- 안 됩니까?
시호는 이내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가 픽,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 운전 조심해서 오세요.
한 톤 밝아진 그의 목소리에는, 마치 보이지 않는 꼬리가 좌우로 붕붕 흔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기쁨이 묻어 있었다.
전화를 끊은 뒤, 시호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윤기에게 이렇게 큰 의미가 될 자격이 있는 사람일까, 내가?’
이런 생각도 잠시, 곧 떨리는 마음에 그녀의 볼이 붉어졌다.
오늘은 오랫동안 같이 있는 거구나.
“그만! 이러다 사고 나겠어.”
볼을 찹찹 두드린 시호는 백미러를 보았다.
얼굴에 뭘 좀 바를 걸 그랬나? 선크림만 발랐더니 너무 맨얼굴이야.
옷도 좀 살랑살랑한 게 나았을걸.
[선배는 있는 그대로 계시면 됩니다. 서시호의 전부를 사랑하는 거니까.]
윤기의 말을 떠올린 시호는 자신감을 되찾으려 했다.
기윤기 선수님이 있는 그대로 있으라고 하셨으니 말 들어야지.
아파트 정문에 차를 대 놓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윤기가 나타났다.
“선배.”
자신을 보자마자 표정이 환해지는 윤기가 눈부셨다. 심장은 자동적으로 두근거렸다.
“모자 썼네?”
윤기는 검은 캡모자를 쓰고 있었다.
“잘 어울린다.”
“홍대 근처에서 지나가다 산 건데 지금까지 잘 쓰고 있습니다. 이따가 하나 사 드리려고 하는데.”
“그럼 첫 커플 아이템이네?”
시호가 배시시 웃으며 수줍게 말하자, 윤기가 그녀의 입술에 쪽 입을 맞추었다.
“보고 싶었습니다, 선배.”
눈을 접으며 웃는 윤기의 얼굴은 지금껏 켜켜이 쌓여 있던 고단함을 일시에 날려 줄 정도의 위력이 있었다.
무표정일 땐 그렇게 차가운 사람이 웃을 땐 어쩜 저리 아름다운지.
그 갭 차이에 시호는 또 한 번 심장이 덜컹거렸다.
또한, 그 웃는 얼굴은 제게만 보여 준다는 사실에 가슴 가득 벅찬 뿌듯함이 번져 나갔다.
“내가 전생에 조금이라도 덕을 쌓긴 했나 봐. 널 만난 걸 보면.”
윤기의 목덜미가 붉게 달아올랐다.
“제가 할 말입니다.”
부끄러움과 욕망을 동시에 느끼는 듯한 야릇한 눈빛에서 섹슈얼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의 고개가 비스듬히 내려왔다.
연인은 달콤한 키스를 주고받았다.
“제가 운전할까요?”
“괜찮아. 우리 기 선수님 운동하고 오셨는데 쉬어야지.”
“그럼 운전하는 서시호 옆모습 보면서 가야겠습니다.”
시호가 눈을 조금 크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예쁘게 보십니까?”
“방금, 이름…….”
“안 됩니까?”
그건 아니지만. 그의 목소리만큼이나 심장이 쿵, 낮게 떨어졌다. 왜 이렇게 설레는 거야.
“좀…… 떨려서.”
시호의 귀여운 말에 윤기가 낮게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의 머리에 입을 맞추었다.
“귀여워 죽겠다, 서시호.”
“……운전하는 동안은 그런 말 금지야. 사고 날지도 몰라.”
“음. 그럼 자중해야겠네요.”
그가 입가에 웃음기를 머금으며 시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우리 시호 다치면 안 되니까.”
“너, 너도 다치니까 하면 안 되는 거거든?”
이런, 바보같이 말 더듬었어!
“알겠습니다. 서로를 위해서-라고 해 두죠.”
그가 시호의 손등에 쪽 뽀뽀하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더 이상 윤기를 보고 있다간 영원히 출발을 못 할 것만 같아서, 시호는 억지로 시선을 돌리고 차를 출발시켰다.
가는 동안 그들은 각자의 일상을 소소하게 나누었다. 별것 아닌 얘기도 어찌나 재미있던지, 입가에서 미소가 걷힐 줄을 몰랐다.
신호에 걸릴 때마다 윤기는 시호의 손등과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고, 이따금 깊게 머금었다.
“우리 시호는 운전하는 모습도 멋있네.”
“너, 그런 말 금지라고 했지.”
“거의 다 오지 않았습니까.”
근처 공용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안전벨트를 풀자마자 윤기는 시호의 목을 감싸 당겨 입술을 겹쳤다.
“음…….”
운전하는 내내 참아 왔던지 갈급한 움직임이었다. 오면서 먹었던 목캔디의 화한 맛이 뒤섞이며 엉키자 솜사탕보다 달콤한 맛이 되었다.
“이제 데이트하러 갈까요?”
밖으로 나간 그들은 손을 꼭 붙잡고 걸었다. 윤기는 모자를 썼고, 시호는 선글라스를 꼈다.
햇빛을 피하려는 용도도 있지만, 혹시나 알아보는 사람이 있어 시끄러워질까 봐서였다.
연인 사이를 숨기려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소란을 막는 쪽이 나았다.
“이런 곳 오랜만에 걸어 봐.”
평일 오후인데도 사람들이 꽤 있었다. 대부분 대학생으로 보이는 커플들이었다.
“저도 1년 전 홍대 근처에서 시합이 있었을 때 이후로는 오랜만에 와 봅니다.”
“그때 모자를 산 거구나.”
고개를 끄덕인 윤기가 손을 붙든 채 한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자신의 모자와 똑같은 모자를 골라 시호에게 씌워 주었다.
“어때?”
“예쁩니다. 무척.”
윤기의 눈에서 달달한 꿀이 뚝뚝 떨어졌다.
“어머, 너무 잘 어울리세요. 남자 친구분이 먼저 사시고 마음에 드셨나 봐요.”
“예.”
호들갑을 떠는 여자 직원에게 무표정으로 간결하게 대답한 윤기가 다시 시호를 보며 웃었다.
“마음에 들어요?”
“응. 좋아.”
모자를 계산하고 나온 그들은 서로 마주 보며 웃었다.
“선배, 사진 찍을까요?”
윤기는 평소 사진을 찍는 것도, 찍히는 것도 싫어했지만 시호와의 순간은 매분마다 남겨 두고 싶은 마음이었다.
“오늘 화장을 안 했는데.”
“하든 안 하든 다 예쁩니다.”
배시시 웃은 시호는 윤기와 얼굴을 맞댔다. 그가 휴대폰을 들고 긴 팔을 뻗어 셀카를 찍었다.
“잘 나왔어? 어디 봐 봐.”
윤기가 시호의 어깨를 감싸고 함께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너만 멋있게 나왔잖아. 나 이상해.”
“예쁘기만 한데요.”
“지워 줘.”
“싫습니다.”
씩 웃은 윤기가 재빨리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는 그녀와 손가락 마디마디를 얽었다.
“이따가 선글라스 벗고 찍어 준다고 약속한다면요.”
시호가 망설였다. 선글라스를 껴도 윤기가 월등한데, 벗으면 완전 비교될 것 같다.
“일단 햇빛이 뜨거우니까 먹고 나서 다시 찍어요.”
하여튼 말 돌리기 선수. 시호가 입술을 삐죽 내밀자 윤기가 쪽! 뽀뽀했다.
“뭐, 뭐야?”
“뽀뽀해 달라는 건 줄 알았는데. 아니었습니까?”
시호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얘가 진짜 너스레만 늘어서는…….
“우리 시호 배고프겠다. 얼른 가자.”
눈을 접으며 사르르 웃은 그가 시호의 손을 꼭 붙잡고 이끌었다.
내가 지금은 배가 고프니까 봐주는 거야. 부끄러운 마음을 애써 감추며 시호는 그와 발을 맞춰 걸었다.
그들이 향한 곳은 마구로 맛집이었다.
크기는 작지만 주말이면 대기 줄이 길게 늘어질 정도로 인기가 있는 곳이었다.
소박하고 정겨운 나무로 된 문을 밀고 들어가니 높은 천장 위로 참치잡이 배를 형상화한 하얀 조형물이 걸려 있었다.
4인용 테이블 1개, 2인용 테이블 1개, 5명이 나란히 앉을 수 있는 바 테이블이 전부인 아늑한 공간이었다.
바 테이블에 나란히 앉은 그들은 연어초밥과 참치회, 그리고 가게의 시그니처 메뉴인 연어를 한 상씩 주문했다.
오픈 주방이라 바 테이블에 앉으면 요리 과정을 볼 수 있었다.
“…….”
윤기는 턱을 괴고 고개를 기울였다.
부엌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시호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검지로 테이블을 톡톡, 계속 두드렸지만 그녀는 알아채지 못했다.
그가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직원들은 전부 남자였다.
설마 저 중에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는 건 아니겠지?
“선배.”
낮고 굵은 음성에 정신을 번뜩 차린 시호가 고개를 돌려 윤기를 보았다.
그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왜 그래?”
“왜 자꾸 저기만 보십니까?”
아차. 시호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잘 봐 놨다가 나중에 만들어 주려고 생각하다 보니 그만……. 미안해.”
윤기가 멍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저한테…… 말입니까?”
“그럼 누구한테 만들어 줘?”
“요리하는 거 싫다고 하셨잖아요.”
“응. 그랬는데. 아무래도 상대에 따라 다른 모양이야. 너한테 만들어 준다고 생각하니 안 싫은 거 있지.”
시호가 수줍다는 듯 배시시 웃었다.
“주문하신 음식 나왔습니다. 소스와 달걀을 섞어서 연어를 찍어 드시거나 밥에 비벼서 드시면 되고, 이쪽에 있는 트러플소금과 레몬소금, 그리고 보리된장을 기호에 따라 찍어 드시면 됩니다.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불러 주세요.”
직원의 상냥한 설명에 고개를 끄덕인 시호가 여전히 멍한 윤기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윤기야,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아닙니다.”
그는 마른세수를 했다. 아까 시호의 말에 심장이 딱 멈추는 줄만 알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이번에는 정말로 멈추고 말았다.
“자. 아-해.”
시호가 연어회 한 점을 그의 입에 넣어 주었다.
“어때? 맛있어?”
윤기는 그녀의 입술을 홀린 듯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맛있습니다. 아주.”
자신의 말에 환한 미소를 짓는 시호의 얼굴을 보니 심장이 아릿할 정도로 뛰었다.
“음, 진짜 맛있다.”
오물오물 귀여운 입술이 자꾸만 윤기의 시선을 끌어당겼다.
“오길 잘했다. 그치.”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 아니겠는가. 이렇게 들뜨고 신난 시호의 귀여운 모습을 독차지하고 있는데.
“윤기야, 왜 안 먹…….”
윤기는 시호의 입가에 묻은 소스를 냅킨으로 톡톡 두드려 닦아 주었다.
“내가 해도 되는데.”
불그스름하게 물든 뺨이 사랑스러웠다.
“잘 드시네요.”
윤기가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착하십니다.”
“너 그런 부끄러운 말은 어디서 배웠어?”
“모르겠습니다. 선배를 보면 자연스럽게 나옵니다.”
“……기윤기는 선수.”
지난번에도 자신을 보며 중얼거렸던 말이었다. 잠시 시호의 말의 의미를 생각하던 윤기가 미간을 좁혔다.
그 모습마저도 섹시하게 보여서 시호는 드디어 제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선수라는 말이 그다지 좋은 의미로 쓰인 것은 아닌 듯한데.”
윤기의 고개가 옆으로 천천히 기울어졌다. 봄볕에 나른해진 맹수처럼 우아했고, 또한 위압감이 흘렀다.
“제가 생각하는 그런 의미가 맞습니까?”
시호는 목이 탔다. 토끼의 장난을 받아 주던 흑표범이 지나친 장난에 화가 난 것 같았다.
“그만큼 네가 사람 설레게 하는 말을 잘한다는 뜻이었어. 그냥 장난으로…….”
피식.
……피식?
시호가 고개를 들었다. 입꼬리를 느른히 올린 윤기의 눈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너, 지금 나 놀린 거야?”
“그만큼 선배가 귀엽다는 뜻입니다. 괜히 장난치고 싶을 만큼.”
그제야 쪼그라들었던 시호의 숨통이 팟! 펴졌다.
윤기는 조금만 웃음기를 지워도 얼음처럼 차가워지는 얼굴 때문에 장난을 친다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놀라셨습니까?”
“당연히 놀랐지. 너 무표정으로 바라볼 때마다 얼마나 무서운지 알아? 엄청 쫄았네.”
아휴우우. 긴 숨을 내쉬는 시호를 윤기는 예뻐 죽겠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병 주고 약 준다 이거지.”
“선배가 예뻐 죽겠습니다.”
놀란 시호가 주위를 살피며 손으로 그의 입을 막았다.
“너 바깥에서 그런 말 하지 마! 부끄럽게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