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화
명현의 입매가 굳었다.
“그런 건 왜 묻니?”
“생각해 봤습니다. 우리 사이에 아이가 있었더라면 그리 쉽게 이혼하지는 않았을 거라고요. 저도, 시호도요.”
끔찍한 소리였다.
그 애가 내 아들의 아이를 낳다니. 반은 그 격 떨어지는 피가 흐를 것이 아닌가.
명현은 손으로 머리를 짚으며 앓는 소리를 냈다.
“어머니, 어디 아프십니까? 김 박사님 부르겠습니다!”
몸이 허한 명현은 자주 아팠고, 그럴 때마다 남편과 아들은 전전긍긍했다.
“재혁아, 널 낳을 때 엄마가 아주 위험했다는 건 알고 있지?”
그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약한 몸으로 목숨을 걸고 자신을 낳았다는 것에 재혁은 한없는 사랑과 존경심을 느꼈다.
재혁이 모친을 끔찍하게 위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 기인했다.
“아직도 눈을 감으면 그때의 고통이 생생해. 네 얼굴 한 번 못 보고 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공포가 여전히 선명하게 느껴진단다.”
재혁이 명현의 손을 꼭 붙잡았다. 그녀가 부서질 듯 여린 미소를 지었다.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신중하고 또 신중해야 해.”
“예, 물론이죠.”
“엄마는 혹시나 시호도 그런 고통을 겪게 될까 봐 두려웠어.”
명현은 혹여 시호가 재혁에게 얘기하기 전에 선수를 치기로 했다.
“그래서 김 박사님께 부탁했단다. 시호가, 또 우리 가족이 아이를 맞을 준비가 될 때까지 신중해질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재혁은 잘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시호와 합의하에 계속 피임을 했었다.”
놀란 재혁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게 무슨……! 저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말입니까?”
“우리 전무님은 워낙 신경 쓸 일이 많으시니까. 엄마가 알아서 했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그런 문제를…….”
명현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난 그냥 우리 아들 생각하는 마음에……. 시, 시호도 동의한 일이야.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되었다고. 또, 네게 짐이 되기 싫다면서.”
울먹이는 어머니를 보니 마음이 약해졌다. 재혁은 일단 명현의 어깨를 감싸 달랜 뒤, 침실까지 데려다주었다.
“아버지 들어오면 놀라시겠어요. 그만 우세요, 어머니.”
“흐윽, 미안해. 엄마는 널 생각해서 그랬어.”
“……오늘은 이만 쉬시고 날 밝으면 다시 얘기해요.”
홀로 방으로 돌아온 재혁은 킹사이즈 침대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시호가 내게 뾰족하게 군 이유가 이거였구나.
명현의 말대로, 바깥 일이 바쁜 제게 짐이 되고 싶지 않은 마음에 홀로 끙끙 앓다가 결국 병이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하아. 그런 것도 모르고.”
재혁은 김 박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주치의와 통화 연결이 안 된 적은 없었다.
“김 박사님, 저 한재혁입니다. 시호 관련해서 뭐 좀 여쭤보려고 하는데. 피임에 관해서요.”
김 박사와 통화를 마친 재혁은 마른세수를 하며 시호가 눕던 침대 쪽에 걸터앉았다.
“그래서 잠자리를 잘 받아들이지 않았던 거였구나. 내게 짐이 되지 않으려고.”
하긴, 그때 아이를 낳았다면 제대로 신경 써 주지도 못했을 것이다. 걸핏하면 해외 출장이 잡혔고 급작스러운 회의로 인해 툭하면 회사로 향했었다.
“내가 너무 무심했구나.”
이제라도 정신을 차렸으니 다행이다. 시호가 왜 저렇게 고집을 부리고 튕겨 내는지 알았으니까.
이혼까지 요구했을 정도로 마음이 단단히 토라진 시호에게 미안했다.
왜 이제야 알았을까. 그녀를 정말로 사랑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중요한 문제를 눈치채지 못했다.
이래서야 남편으로서 실격이었다.
스스로가 한심스럽고, 또한 시호에게 너무나도 미안한 마음에 그는 서재의 문을 닫고 진열된 양주를 꺼내 벌컥벌컥 들이켰다.
‘어떻게 이런 문제를 혼자서 끌어안고 버틴 거야, 시호야.’
그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선수일 때도 느꼈지만.
“참 독한 사람이야, 당신…….”
***
[시호야. 이번 주 주말에 볼 수 있을까?]
“하아. 아침부터 무슨.”
메시지를 보자마자 시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같이 살 때는 하숙인처럼 굴더니, 헤어지니까 부부 행세를 하려고 하네.
답장을 보내지 않으려다가 이혼 계약서를 떠올리고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이혼할 때 작성한 계약서에는 결혼 생활에 대해 함구할 것, 위자료를 받는 대신 갖고 있는 지분을 포기할 것, RS그룹 이미지를 손상시킬 일이라 판단할 경우 그룹 측과 논의하여 결과를 따를 것, 연락이 끊어지지 않아야 할 것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일정 있어.]
답장을 보낸 시호는 다른 사람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민주야, 오늘 저녁에 볼 수 있을까?]
워낙 마음이 약한 아이니까 친구들의 추궁에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보낸 메시지의 말투가 재혁과 비슷하다는 것을 깨달은 시호는 얼굴을 찌푸렸다.
함께 사는 동안 알게 모르게 상대에게서 물든 버릇이 이런 식으로 나타날 때마다 가슴이 철렁했다.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것 같아서.
“…….”
일어나자마자 부리나케 잠옷을 벗고 곱게 개어 정리한 이불 위에 올려놓을 때.
혼자 있어도 누가 보는 것처럼,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표정 관리를 하며 숨소리조차 내지 않을 때도.
시호는 흠칫하며 일부러 잠옷과 자신을 마구 헝클어뜨렸다.
난 더 이상 그 집에 속해 있지 않다고, 스스로에게 되뇌면서.
그때 휴대폰이 한 번 울렸다.
[응, 일곱 시에 내가 너희 집으로 갈게. 집들이 선물 뭐 사 갈까?]
민주에게서 온 문자였다.
“선물이라…….”
[아냐. 아직 집 정리가 안 돼서. 시내로 갈게. 먹고 싶은 거 있어?]
[히잉. 아쉽다. 놀러 가고 싶었는데. 정리 안 됐으면 내가 도와줄까?!]
[오늘은 좀 그렇고, 다음에 정식으로 초대할게.]
[흑흑. 어쩔 수 없지 모. 아, 너희 아파트 근처에 초밥집 생겼다는데 거기로 가면 안 돼?]
[좋아. 끝나고 연락해.]
[웅! 이따가 봐용♡]
평소와 다름없는 대화에 시호의 표정은 미묘해졌다.
분명히 민주가 말한 게 맞는 것 같은데.
잘 지켜지는 줄 알았는데, 연교에 내려오자마자 깨졌다.
곧 기사도 나가겠다, 더 이상 자신의 이혼이 심각한 비밀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하나뿐인 친구에게는 털어놓아야 할 것 같아서 말한 건데. 그냥 말하지 말 걸 그랬다.
“……그래. 나한테는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게 민주한테는 아닐 수도 있지.”
시호는 애써 가볍게 생각하며 넘어가려 했다. 그편이 정신건강에 좋을 것 같다.
시계를 보니 열 시였다.
두 시간 후면 윤기가 운동을 끝내고 돌아오는 시간이다.
윤기는 자신의 집에서 출근했다.
어제 늦은 점심 겸 저녁을 먹었을 때만 잠깐 밖으로 나갔을 뿐, 계속 침대에서 있었다.
저도 나름대로 체력에는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윤기에 비하면 어린아이 수준이었다.
그는 자신과 단 한순간도 이어져 있지 않으면 못 견뎌 하는 것 같았다.
“신기하다. 어떻게 나를 그렇게 좋아해 줄 수가 있지?”
거울을 보았다. 사랑받고 있다 생각하니 어쩐지 평소보다 좀 더…… 예뻐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나 뭐래니.”
으으, 방금은 좀 재수 없었다.
시호는 몸을 부르르 떨며 나갈 채비를 했다. 윤기가 오기 전까지 공사 현장에 가서 이것저것 살펴볼 생각이었다.
“흐음. 윤기랑 같이 바람이라도 쐬고 올까?”
연남동에 초밥 맛집이 있다던데.
사람이 북적거리는 곳에서의 데이트를 해 보지 못한 시호는 윤기의 손을 붙잡고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을 걷고 싶었다.
오늘은 합동 훈련 안 한다고 했지.
“고속도로 타면 금방 갔다 올 것 같은데.”
시호는 중얼거리며 한옥 안으로 들어갔다.
“서 사장님! 오셨어요?”
만태와 직원들이 미소하며 반겨 주었다.
“안 그래도 방금 수전 싹 다 갈고 점검까지 했습니다. 한번 보시겠어요?”
“그럴까요?”
시호는 남자 라커룸 안에 있는 샤워실로 들어갔다.
“자, 저거 틀어 보시죠.”
수전은 정상적으로 작동되었다.
이 공간에 있으니, 윤기와 물장난을 쳤던 것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렸다.
몸이…… 장난이 아니었었지. 화난 근육이라는 게 뭔지 아주 제대로 알았지, 그날.
“마음에 안 드세요?”
“아, 아니에요. 좋네요. 온도랑 수압 조절도 잘 되고.”
“이 모델이 고장이 없기로 유명한데, 그건 왜 그랬는지 모르겠네요.”
음. 그럼 운명이라고 볼 수밖에 없으려나. 수전이 고장 나지 않았다면, 윤기와 단번에 가까워질 수는 없었겠단 생각이 들었다.
“고마운 놈이었네요.”
“예? 뭐가 말입니까?”
“아. 아니에요. 혼잣말이었어요. 그보다, 진척은 어떤가요?”
“아주 수월합니다. 워낙 뼈대가 튼튼해서. 이렇게 좋은 건물을 왜 방치했는지 모를 정도로요. 아마 서 사장님하고 인연이 닿으려고 기다리고 있었나 봅니다. 하하하.”
만태의 시원시원한 말에 시호도 미소를 지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풍스러운 검도관이 될 겁니다. 연교를 대표하는 건물은 물론, 아마 전 세계에서 꼭 가 봐야 할 검도관으로 뽑힐걸요. 제가 그렇게 만들겠습니다! 와하하하.”
“부탁드릴게요.”
“그건 그렇고, 이야, 저 기윤기 선수 덕분에 간만에 가장 대접 톡톡히 받았습니다. 똥강아지 놈들이 어찌나 좋아하던지, 유치원 때 이후로 못 받아 봤던 볼 뽀뽀를 다 받았다니까요? 우리 기 선수가 참 대단합니다.”
“다행이네요. 윤기도 들으면 기뻐하겠어요.”
만태가 목소리를 낮추고 시호에게 속삭였다.
“두 분은 사귀시는 거죠?”
“아…….”
“걱정 마십쇼. 저희 입 진짜 무겁다니까요? 아니, 그런데 그 범인은 잡으셨습니까? 헛소문 댓글 범인!”
“범인이라는 표현은 좀.”
어쨌든 범인으로 추정되는 사람과 오늘 저녁에 만나기로 했다.
“애 엄마한테 물어보니까 연교 맘카페 영향력이 생각보다 엄청 크더라고요. 소문 잘못 났다가 폐업한 가게도 있더만요. 누구는 사은품을 주고 누구는 안 줬다고. 주인이 선착순이라고 분명히 말했는데, 아 그걸 기록을 안 해 놔서 변명만 늘어놓는다고 또 난리가 나서 결국 장사 접었답니다.”
시호의 입가에서 미소가 조금 사라졌다. 음, 생각보다 훨씬 더 큰 일이 될 수도 있겠구나.
괜한 논란에 휘말리면 선수들이 힘들어질 수도 있겠어.
“그렇다고 이상한 사람만 있는 건 아니에요. 우리 애 엄마처럼 개념 있고 현명한 엄마들도 많다고 하니까. 근데 그 임원 눈에 잘못 들면 좀 성가셔지나 봐요.”
“그 임원요?”
“예쁜자매맘이라고, 명성이 자자한 사람이 있답니다. 한번 눈에 잘못 들면 찢어질 때까지 물어뜯는다나 뭐라나. 애 엄마도 치를 떨더라고요. 나이도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은데 굉장히 지독하다고.”
예쁜자매맘. 분명 동창 찬스를 이용해 선착순으로 검도장 할인을 받아 주겠다고 댓글을 단 사람이었다.
***
공사 현장을 둘러보고 국 소장과 몇 가지 개선해야 할 점에 대해 의논한 후, 시호는 차에 탔다.
5분 후면 윤기가 운동이 끝나는 열두 시다.
전화가 올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벨소리가 울렸다.
“호랑이네, 기윤기.”
살짝 미소를 머금은 시호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선배, 어디십니까?
휴대폰과 블루투스로 연결되어 차 안에 듣기 좋은 중저음이 가득 울렸다.
“수련관 둘러보고 집에 돌아가는 중이야. 혹시 초밥 좋아해?”
- 좋아합니다.
“잘됐다. 우리 연남동에 갔다 올까? 거기 초밥 맛있는 집이 있대. 고속도로 타면 빨리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은데.”
- 좋습니다. 그럼 씻고 있겠습니다.
“응. 끝나고 전화해. 밑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 선배.
“왜?”
- 다녀온 뒤에. 오늘 자고 가도 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