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르쳐 주세요 선배-27화 (27/81)

제27화

“오늘 재혁 씨 만났어.”

윤기의 몸이 경직된 것처럼 굳었다.

“괜찮아?”

아니, 괜찮지 않다. 그래도 들어야 했다.

“……예. 말씀하십시오.”

말하면 안 될 것 같은데. 시호가 잔뜩 힘이 들어간 그의 등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사실은 ‘오늘도 만났어’라고 말하려다가 급하게 말을 바꾸었다. 이편이 그래도 듣기에 충격이 덜할 것 같아서였는데. 아니었나 보다.

시호는 흔들리는 윤기의 눈빛을 보며 곧바로 후회했다.

꼭 낯선 곳에 자신을 버리고 가는 주인을 바라보는 듯한 표정에 엄청난 죄책감이 들었다.

이 강하고 커다란 남자가 이토록 불안해하다니.

괜히 말했다. 그냥 내가 해결한 다음에 말할걸.

“그냥 요 앞 카페에서 잠깐 얘기 나눈 거야.”

시호의 팔을 붙잡은 윤기의 손에 힘이 꾹 들어갔다.

“네가 나중에 알게 되면 기분 나쁠까 봐 말 안 한 건데, 괜히 말했나 보다.”

“……아닙니다.”

숨을 깊이 들이마신 윤기가 여전히 그녀를 꼭 붙잡은 채 이어서 얘기하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치를 보며 망설이던 시호도 결심했다는 듯 재혁과 나누었던 대화를 들려주었다.

“확실히 RS그룹의 후원을 받아들이는 편이 선수들에게는 좋겠지. 검도단의 미래를 생각해도 그렇고.”

그에게 붙잡힌 손을 바라보고 있던 시호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운영 방식에 대해서도 관여하지 않겠대.”

“그래서 그 사람이 얻어 가는 게 뭡니까?”

이번엔 대답할 수 없었다.

침묵하는 시호를 보는 윤기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선배입니까?”

이번에도 침묵이 답이었다. 시호는 고개를 숙였다. 도저히 그의 얼굴을 보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내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난 재혁 씨에게 그 어떤 미련도 마음도 남아 있지 않다는 거야.”

“거절한다면?”

“앞으로 다른 곳에서의 후원은 기대하지 말라고 하더라. 나도, 내 선수들도 대접받지 못할 거라면서.”

윤기는 이를 악물었다.

‘비겁한 새끼.’

그러다 심호흡을 하고 시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솔직하게 말해 주셔서 좋았습니다.”

“윤기야…….”

“제게 말하지 않고 감추셨다면 더 불안했을 것 같습니다.”

지금도 불안하지 않은 건 아니라는 뜻이었다. 시호가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방법이 있을 거야. 내가 어떻게든 찾아볼게.”

윤기는 말없이 시호를 마주 안았다. 그러나 눈빛은 형형히 빛나고 있었다.

그는 재혁을 떠올렸다. 신사적이고 언뜻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지만 그의 눈에는 시호를 향한 미련과 집착이 가득했다.

윤기는 승부욕과 소유욕이 아주 강한 사람이었다. 처음은 아무것도 못하고 빼앗겼지만 두 번은 없다.

이제 시호는 자신의 사람이고 무슨 짓을 해서든 반드시 지킬 것이다.

“선배.”

“응?”

“윤태홍이 게시글을 바로잡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했습니다.”

맞다. 그 문제가 있었지, 참.

머릿속에 자꾸 윤기가 떠올라서 잠시 뒷전으로 미뤄 뒀었다.

심각하다면 심각할 수 있는 문제인데 윤기로 인해 별거 아닌 것으로 치부되었다.

이걸 연애의 순기능이라고 해야 하나.

“자기가 누나의 아이디로 글을 쓰겠다고 했습니다.”

“누나 아이디구나.”

“태교 때문에 친정에 와 있다고 합니다.”

태교라. 결혼 생활에 대해서 생각하고 싶지 않은데, 기억은 제멋대로 두둥실 떠올랐다.

[피임은 꼭 해라. 5년이 될 때까지는 아이 가질 생각은 추호도 마라.]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다음 날, 재혁이 출근한 후에 시모가 자신을 서재로 불러 한 말이었다.

[재혁이가 너 아니면 안 되겠다니 어쩔 수 없이 결혼은 시켰다만, 네가 우리 재혁이 아이를 가져도 되겠다는 확신은 들지 않는다. 김 박사 조치에 따르도록 해.]

그날부터 최대한 임신 가능성이 낮은 날에만 재혁을 받아들였고, 위험한 날에는 집안의 주치의인 김 박사를 찾아갔다.

김 박사는 시호가 진찰을 받을 때마다 꼬박꼬박 시모에게 보고했고, 잠자리를 감시받는다는 생각에 스트레스가 더욱 심해졌다.

물론 재혁은 알지 못했다. 그에게 있어 어머니는 우아하고 선한 천사였다.

이따금 힘들다고 넌지시 얘기하면 전혀 이해를 못 하겠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타일렀다.

[당신이 오해하는 거야. 어머니가 얼마나 순수하고 여리신 분인데.]

그땐 너무 힘들었는데. 지금은 아이를 갖기 전에 헤어지게 된 것에 감사해야 하는 것인지.

“누나분에게 피해가 가지 않을까? 임신 중인데 소란에 휘말리기라도 하면.”

“그렇게 말하겠습니다.”

“응. 도와주려는 마음은 고맙지만 걱정된다.”

민주와도 만나야겠지. 피한다고 피해지는 일이 아니니까.

생각에 잠겨 있던 시호는 문득 자신을 바라보는 윤기의 시선에 정신을 차리고 눈을 고쳐 떴다.

“왜?”

“선배와 단둘이 있을 때 다른 사람 얘기를 하는 것은 싫습니다만……. 어제 왔던 두 놈들이 무영단에 입단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 걔네도 계약 기간 끝나 가?”

“예. 비슷한 시기에 계약했습니다.”

“음. 태홍이랑 수원이 대련 영상이 올라와 있나?”

“유튜브에 게재되어 있을 겁니다.”

시호가 베드 테이블에 손을 뻗어 태블릿을 가져왔다.

윤기의 가슴에 등을 기댄 시호는 이불을 가슴께까지 올리고 유튜브에서 태홍과 수원의 이름을 검색했다.

아. 여기 있다. 작년 대회네.

“연교시청에서 공식으로 업로드하는 영상은 없어?”

“예. 협회에서 올라가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마케팅 팀을 모집해야 할까.’

대회 영상은 모두 공개하고, 연습 영상은 선수들에게만 공개하면 실력 향상에 도움이 될 것 같다.

이따금 선수들의 훈련이나 대회 비하인드 영상을 찍어 올리면 좋은 이벤트도 될 것 같았다.

시호는 이와 관련해서 생각해 둔 사람이 있었다.

이혼 전 RS그룹 대표로 검도 대회에 참여했을 때, 본인 도장 소속 선수를 응원하러 온 대학 선배 용진과 잠시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카메라도 무리해서 좋은 걸로 구입하고, 편집하는 법도 비싼 돈 내고 속성으로 배웠는데. 돈만 버렸다, 야.’

학부모들이 볼 수 있도록 도장 아이들 영상을 간간이 찍어 올린다고 했는데, 관원들이 점점 줄어서 몇 년 후에도 운영하고 있을지 잘 모르겠다고 푸념했다.

영상을 찍고 편집할 줄도 알뿐더러 성격도 좋으니 선수들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다독여 줄 수 있을 것이다.

해서, 그에게 코치를 맡길 생각이었다.

‘용진 선배한테 마케팅 맡길 사람이 있는지 물어봐야겠다. 발이 넓은 사람이니, 검도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을 구할 수 있을 거야.’

“좋아. 그건 용진 선배한테 맡기고. 주말엔 지방에 내려갔다 와야겠다.”

“지방엔 왜…….”

“감독님 모셔 와야지. 올해 고등학교 감독 은퇴하시거든.”

시간과 일정을 바삐 생각하는 시호를 보던 윤기의 눈이 짙게 내려앉았다.

“선배.”

스산한 목소리에 시호는 저도 모르게 몸을 바로 세웠다. 윤기가 곧바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 다시 제게 기대도록 하긴 했지만.

“용진 선배가 누굽니까?”

시호의 허리를 감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절대로 놔주지 않겠다는 듯 아주 단단하게.

“대학 선배인데. 도장을 운영하고 있거든. 애들 찍어 주느라 촬영이랑 편집할 줄 안다고 해서.”

“대학 선배…….”

“오해하지 마. 결혼도 했고 아들도 있으니까.”

그제야 윤기의 팔에서 힘이 조금 빠져나갔다.

시호가 낮게 웃었다.

“뭐야, 질투했어?”

“예.”

너무나도 심플하고 분명한 대답에 시호는 머쓱해졌다. 그러다가 고개를 돌려 윤기의 입에 쪽, 뽀뽀했다.

“넌 거울도 안 봐? 멋있고 야한 널 두고 어떻게 다른 사람한테 눈이 돌아갈 수 있겠어.”

“…….”

윤기의 목 언저리가 언뜻 붉어진 것 같았다. 곧바로 커다란 손에 덮여서 제대로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아. 그제야 시호는 자기가 무슨 말을 내뱉었는지 깨달았다.

나도 모르게 마음의 소리가 바깥으로 나가고 말았네.

“하하. 그, 그럼 태홍이 대련 영상이나 볼까?”

시호의 귓가에 더운 숨이 닿았다.

“제가 멋있고…… 야합니까?”

아랫배가 욱신 죄어드는 감각에 시호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가는 허리를 감고 있던 팔이 아래로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아……!”

“오늘 하루 종일 확인시켜 주세요. 선배가 날 떠나지 않는다는 걸.”

***

저녁이 되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창밖을 바라보던 재혁은 어제 들었던 생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에게 아이가 있었다면.’

그랬다면 이혼하지 않았을 것이다. 격하게 싸워도, 지금쯤 우리를 반씩 닮은 아이를 사이에 두고 자연스레 화해했겠지.

아직 나이도 젊었고, 눈앞에 닥친 업무를 해결하기에 급급해서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아빠가 될 준비보다는 기업을 이끌어 갈 총수로서의 준비가 우선이었다.

시호도 자신의 뜻에 따라 주는 줄 알았다. 임신이나 아이에 대해서 그녀 역시 말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관계를 맺을 때 피임은 하지 않았는데.

자연스레 아이가 생겼어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그땐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그러다 문득 이따금 시호가 ‘김 박사님께 다녀왔어요.’라고 말하던 것이 떠올랐다.

설마 그녀가 불임이었던 것일까?

아냐. 그랬다면 어머니가 제게 말씀하셨을 것이다. 가족의 건강을 끔찍이 생각하시는 분이니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재혁은 서재를 나서 1층으로 내려갔다.

“어머니.”

응접실에 앉아 따뜻한 허브티를 마시고 있던 명현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아들을 맞았다.

“어서 와, 우리 아들. 차 좀 내줄까?”

“아뇨. 잠깐 여쭈어볼 게 있어서요.”

“그래. 앉으렴.”

어머니의 다정한 목소리에 재혁은 살짝 미소하고는 맞은편에 앉았다.

“우리 전무님 얼굴 오랜만에 본다. 이 호칭도 올해가 마지막이네. 내년이면 부회장 되실 분이니까.”

“집에서는 그냥 어머니 아들이고 싶습니다.”

“어쩜. 다정해라. 그래서 우리 아드님께서 뭐가 궁금하실까?”

“시호 말입니다.”

명현의 미소에 살짝 금이 갔다.

“떠난 사람 얘기를 뭐하러 해. 이제 남인데.”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 곧 돌아올 겁니다.”

재혁은 다 좋은데 마음이 너무 착한 것이 문제였다. 그런 격 떨어지는 아이도 제 사람이었다는 이유만으로 여전히 싸고돌았다.

어미로서 참 답답한 마음이었다.

그래도 시호가 이 집으로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명현은 구태여 아들의 말을 지적하지 않았다.

그딴 아이로 인해 모자간에 소리를 높일 수는 없는 법이다.

“혹시 시호가 불임이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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