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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쳐 주세요 선배-26화 (26/81)

제26화

하지만 윤기는 시호의 걱정과는 다른 말을 내뱉었다.

“불안했습니다. 선배가 또 떠난 걸까 봐.”

“이제 안 떠난다고 했잖아.”

“예. 그러셨죠.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저를 끌어안은 윤기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낀 시호가 달래듯 그의 등을 어루만졌다.

시호가 바로 전화를 받지 않았다는 단순한 사실이 윤기의 불안을 증폭시켰다.

더 잠을 잘 수도 있고, 지금처럼 샤워를 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직감은 단순하게 생각하도록 두지 않았다.

그녀가 전남편과 함께 있던 모습을 이 두 눈으로 봤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곽 비서가 재혁을 여전히 그녀의 남편이라 말해서인지도, 혹은 재혁이 여전히 그녀를 ‘우리 시호’라 칭해서인지도 모르지.

“그 사람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불안해졌습니다.”

앗. 손을 멈춘 시호가 입술을 안으로 말았다.

어쩐다. 오늘도 만났는데. 밥 먹으면서 얘기하려고 했는데…… 싫어하려나?

“선배의 남편이었던 사람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걸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니 충격이었습니다.”

당연히 재혁의 존재에 대해 알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시호와 마주 보며 서 있던 모습을 눈앞에서 보게 되니 숨통이 콱 막히는 기분이었다.

그 남자가 시호를 아내라고 불렀었다는 게, 또한 여전히 그녀를 ‘우리 시호’라고 아주 당연하게 부르는 모양에 울컥 질투심이 솟았다.

질투라는 감정이 그렇게 흉포하고 거대한 것인지를 윤기는 그때서야 제대로 느꼈다.

머릿속에서 상상만 했던 때와는 차원이 다른 감정이었다.

다시는 시호를 찾아오지 못하도록 영영 없애 버리고 싶은 마음마저 들었다.

아니, 또다시 제게서 그녀를 빼앗으려 한다면 정말로 그렇게 해 버릴지도 모르겠다.

“다시 절 떠날 것만 같아서.”

“절대 그럴 일 없어.”

일단 들어가자, 시호는 그의 손을 잡고 현관에서 안으로 이끌었다.

시호는 그에게 먼저 입을 맞추었다.

“선배……?”

“마음 얘기해 줘서 고마워. 불안해하지 마. 내가 돌아갈 일은 없으니까.”

그녀가 다시 입술을 겹쳤다.

굵고 단단한 팔뚝이 시호의 허리를 휘감아 제게로 더욱 바짝 당기며 깊이 키스했다.

숨결을 빼앗듯 강렬한 키스를 나눈 후에 윤기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두 사람의 입술 사이로 은사(銀絲)가 길게 늘어졌다.

마주 보던 그들은 다시 가볍게 입맞춤했다.

“점심 먹어야 하지? 오늘은 내가 해 줄게.”

“아닙니다. 제가 해 드리겠습니다.”

“저번에 애들이 고기를 사 와서 못 해 준 거 해 줄게.

“……그럼 손 씻고 와서 도와 드리겠습니다.”

욕실로 향하는 윤기의 너른 뒷모습을 보던 시호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말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일단 밥을 먹고 난 후에 할까?”

그때라면 분위기도 좀 풀어졌을 거고. 그래, 그러자.

손을 씻고 나온 윤기가 앞치마를 막 두른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제가 매 드리겠습니다.”

“아, 고마워.”

시호의 등 뒤에 선 윤기가 앞치마 끈을 붙잡고 매듭을 묶었다.

“다 됐…….”

시호가 손목에 찬 머리끈으로 머리를 한데 묶었다.

포니테일 밑으로 깨끗하고 연약한 목덜미가 드러나자, 말을 채 끝내지 못한 윤기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크게 흔들렸다.

“혹시 배추된장국 좋아해? 그거 끓이려고 하는데.”

“…….”

“만들기 복잡하고 오래 걸리는 요리는 좀 더 나중에 해야 할 것 같아. 아직 마음의 준비가 덜 됐거든.”

시호는 대답 없는 윤기를 향해 몸을 돌렸다.

“윤기야?”

“아…… 네…… 좋아합니다.”

“왜? 아직도 불안해서 그래?”

아니, 지금은 그래서가 아니다.

시호가 지나치게 유혹적이었다. 본인은 그것을 자각하지 못한 채 무구한 눈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모습 또한 지나치게 매혹적이었다.

속에서 소란스럽게 피어오른 열기는 쉬이 꺼지지 않을 듯했다.

“가지 않아.”

예쁜 말을 입에 담는 도톰한 입술이 눈에 들어왔고.

“자, 약속.”

불쑥 내민 새끼손가락이 귀여웠다.

“안 해 줄 거야? 어떻게 확인을 시켜 줘야 하나.”

윤기는 자신의 손가락을 거는 대신 그녀의 손가락을 입술로 가져갔다.

“읏…….”

촉, 촉, 손가락을 따라 내려간 입술이 손목 안쪽을 강하게 빨아들였다.

그녀의 손목에 자국을 내면서 다른 손으로는 제가 묶었던 리본 매듭을 스르르 풀었다.

“확인시켜 주세요.”

욕망이 번진 검은 눈동자가 위험하게 번뜩였다.

***

한창 점심을 먹고 있어야 할 시간.

두 사람은 침대 위에 있었다.

윤기의 너른 어깨에 머리를 기대 나른한 숨을 내쉬고 있는 시호의 몸 구석구석이 붉었다.

그가 그녀의 머리에 입을 맞추고 뺨을 어루만지며 눈을 맞췄다.

“너…… 눈 감아.”

“왜 그러십니까?”

“눈빛이 음흉해. 더 이상은 안 돼, 못 해!”

“이런. 들켰네요.”

그가 눈을 접으며 사르르 미소를 지었다. 겨우 진정되나 싶던 시호의 얼굴에 다시 홍조가 올라왔다.

“기윤기 선수.”

“……?”

“기윤기는 선수.”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냐, 아무것도.”

미간을 좁힌 윤기가 시호의 허리를 슬쩍 간질였다.

“아……!”

간신히 ‘꺄악’ 하는 소리를 목구멍 안으로 밀어 넣은 시호가 윤기를 곱게 흘겨보았다.

“너 혼난다, 진짜?”

“혼내 주십시오. 선배가 원하는 만큼.”

또, 또 야한 눈빛!

시호는 옅은 숨을 내쉬었다. 저기에 넘어가면 오늘은 침대를 못 벗어날 거다.

“선배의 말은 아주 사소한 것도 제게는 소중하고 거대합니다.”

“정말 별거 아냐.”

“그 별거 아닌 것도 알고 싶습니다.”

은근히 애원조로 말하는 윤기에게 넘어간 시호가 그에게서 돌아누웠다. 부끄러움을 감추고 싶었다.

“사람 마음 설레게 하는 말을 잘 아는 것 같아서. 또 너무 예쁘게 웃고. 다른 사람들도 봤을 거라 생각하니까…… 기분이 좀…….”

피식.

눈을 크게 뜬 시호가 그를 보았다. 피식? 피시이익? 지금 비웃었어?!

“너 지금 비웃은 거지.”

“그냥 웃은 겁니다. 선배가 귀여워서.”

태양이 내 머리 위에만 떴나.

얼굴이 익겠다, 익겠어.

“놀리지 마.”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실 수가 있을까. 내가 다른 사람에게 그런 말을 건네고 또 웃는다는.”

윤기가 시호의 이마 위로 넘어온 머리카락을 뒤로 부드럽게 넘겼다.

“선배뿐입니다. 서시호에게만 이럽니다.”

“은근슬쩍 이름 부르는 것 봐.”

터질 것 같은 심장을 꼭 누르고 장난으로 넘어가려는 시호에게 윤기가 폭탄을 던졌다.

“……시호야.”

덜컥. 툭. 바스스. 결국 심장이 내려앉아 산산이 부서지고야 말았다.

“서시호. 사랑한다.”

도복을 단정하게 입었을 땐 금욕적이던 그였는데. 운동을 마친 후, 호면을 벗고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던 윤기는 무척 색정적이었다.

사랑을 나눈 후 마주 보며 누워 있는 지금은 운동을 마쳤을 때만큼이나 섹시하다 못해 퇴폐적이기까지 했다.

허리에 살짝 비스듬히 걸쳐진 하얀 이불은 선명한 복근과 툭 불거진 장골을 아슬아슬하게 가리고 있었다.

거기에 낮게 가라앉은 음성의 끝이 허스키하게 갈라져서 더 섹시하게 들렸다.

그런 모습으로 사랑한다 말하다니.

이건 자신을 죽이려고 마음먹은 것이나 다름없는 행위였다.

“평생 너만 사랑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다. 죽을 때까지. 어쩌면 죽어서도.”

시호의 심장은 미동도 없었다. 이미 터진 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너무 설레고 벅차면 가슴이 뛰지 않고 도리어 멈춘 것처럼 느껴지는 모양이다.

그것을 윤기를 통해 처음 알았다.

그리고 윤기 역시 자신으로 인해 처음으로 사랑을 알았다고 고백하고 있었다.

아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지금 느끼는 이게 어떤 감정인지도 모르겠어.

미안함? 죄책감? 그도 아니면 이것도 사랑의 한 종류라고 말할 수 있을까.

“결혼해서 미안해.”

“……그게 왜 미안한 일입니까.”

“그냥.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너한테 조금이라도 위로가 됐으면 싶어서.”

그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던 시호가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슬펐겠다. 내 결혼 소식 들었을 때.”

“슬픔보다는 절망이 더 컸습니다. 이제 내게는 평생 기회가 없겠구나 싶어서.”

덤덤히 말하고는 있지만 윤기의 눈에는 언뜻 그 시절의 아픔이 비쳤다.

“한 번이라도 표현해 보지 그랬어.”

“그럴까도 생각해 봤습니다. 매월 14일마다 특별한 이름이 붙는 기념일에 뭔가를 건네 볼까, 아니면 오늘 훈련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고백을 해 볼까.”

그 시절, 고등학생이었던 윤기의 가장 크고 유일했던 고민은 시호였다.

선배와 가까워지고 싶었고, 선배와 가까운 사람은 나뿐이고 싶었다. 그러려면 자신이 고백을 하고 시호가 받아 줘야 했다.

“자신이 없었습니다. 선배에 비하면 나는 너무나도 초라하다고 생각했으니까.”

아무도 모를 것이다. 연교의 도련님이자, 대학생을 능가하는 실력을 지닌 천재 선수라고 불렸던 기윤기가 저보다 작은 여자의 앞에선 한없이 작아졌다는 사실을.

“뭐든 차분한 얼굴로 잘해 내는 선배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려면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잘 올라가고는 있었지만 목표가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은 간과했다.

시호는 높은 산 위에 피어난 꽃이 아니라, 마음이 내키면 어느 곳으로도 날아갈 수 있는 새였다.

정상에 다다랐으나 그녀는 없었다.

이미 다른 곳으로 날아가 둥지를 틀고 말았다.

“평생 혼자일 거라 생각했는데.”

그녀가 다시 돌아왔다.

“꿈만 같습니다. 선배와 마주 보고 있는 이 순간이.”

그에게는 정말로 꿈속에서만 가능할 것 같았던 일이었다. 시호를 아내로 맞아들인 남자가 그녀를 놓을 리 없으니까.

힘든 내색 한 번 않고, 무엇이든 최선을 다하는 사랑스러운 그녀를 어떻게 놓을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기적이 일어났다.

하늘이 제게 준 마지막 기회였다.

“절대로 꿈으로 끝낼 생각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이 일상이 될 수 있도록 죽을힘을 다할 겁니다.”

갈망과 결의가 뒤섞인 눈빛을 바라보던 시호가 자신의 뺨을 감싼 그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쳤다.

“많이 아팠겠다. 고등학생 기윤기. 대학생 기윤기. 우리 기윤기 선수.”

시호의 말에 깊이 박혔던 상처가 눈 녹듯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무서워. 난 그런 사랑을 받을 정도로 좋은 사람이 아닌데.”

“선배는 있는 그대로 계시면 됩니다. 서시호의 전부를 사랑하는 거니까.”

“네 눈에 씐 콩깍지가 벗겨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야.”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평생 안 벗겨질 거니까요.”

윤기가 팔베개를 해 준 손으로 시호의 어깨를 감싸 품으로 당기자, 그녀가 그의 허리를 안으며 안겨 왔다.

자신의 머리를 다정하게 쓸어내리는 손길에 몸을 맡기며 눈을 감고 있던 시호는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윤기야, 이혼할 때 난 솔직해지기로 결심했거든. 내 자신에게도, 또 내 옆에 있게 될 사람에게도.”

옆에 있게 될 사람이라는 말에 윤기는 가슴이 뻐근해졌다.

“그래서 말인데.”

역시 말해야겠다.

윤기가 그랬듯, 자신도 솔직하게 그를 대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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