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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쳐 주세요 선배-25화 (25/81)

제25화

이혼해도 전남편과 볼일이 아주 없지는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예를 들어, 얼마 전 이혼 기사 배포 날짜 최종 조율과 같은 특수한 혹은 특별한 일이 있는 경우처럼 말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짧은 기간 내에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어째 이혼하기 전보다 더 자주 보는 기분이다.

시호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무슨 일이야?”

- 일단 문 좀 열어 봐. 얼굴 보고 얘기하자.

“용건이 뭐냐니까.”

- 시호야.

“시답지 않은 거면 그냥 가.”

- 선수단에 관한 거야.

시호가 미간을 찌푸렸다. 도대체 재혁과 무영단이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뭔데.”

- 인터폰 사이에 두고 얘기하자고?

잠깐 생각하던 시호가 간단히 내뱉고 인터폰을 끊었다.

“단지 앞 카페에서 기다려.”

이제 재혁과는 완전히 남남이니 함부로 집에 들일 수는 없다.

애매하게 지내긴 싫었고, 또 윤기에게도 예의가 아닌 듯해서다. 그 애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휴. 아침도 안 먹었는데. 하여튼 나 밥 못 먹게 하는 데는 뭐 있다니까.”

시호는 검은 레깅스 위에 윤기가 두고 간 후드 티를 입었다.

워낙 신장과 몸집이 큰 사람의 옷이라서 그런지 엉덩이를 넉넉히 가려 주고도 남았다.

아침에 검도관 별채에서 아파트로 데려다준 윤기는 자신의 집으로 빠르게 내려가서 티셔츠와 후드 티 몇 장을 가지고 올라왔었다.

[일단 잠옷은 이걸로 하시고 이따가 같이 사러 나가죠.]

[됐어. 이제 아침인데 뭘.]

[제가 없는 동안에도 선배가 제게 감싸여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 말하며 윤기는 진한 키스를 퍼붓고는 아쉬워하는 표정을 지으며 체육관으로 떠났다.

그 순간을 떠올리며 곱씹다 보니 다시금 얼굴이 달아올랐다.

“사람 마음 설레게 하는 말을 어쩜 그리 잘하는지. 어디서 배워 오는 거 아니야?”

키스는 또 얼마나 잘하는지. 그리고 키스보다 더 잘하는 건…….

시호는 고개를 몇 번 털어 내고는 검은 캡모자를 푹 눌러썼다. 하지만 붉어진 얼굴을 가릴 수는 없었다.

카페에 앉아 있던 재혁은 10분 남짓 후에 등장한 시호를 보고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디 아파? 볼이 좀 빨간 것 같은데. 감기라도 걸린 거야?”

“아니. 멀쩡해.”

시호는 손등을 제 뺨에 대고는 이내 아무렇지 않은 척 주문하러 일어섰다.

“내가 주문해 놨어. 당신 따뜻한 허브티 좋아하잖아.”

“나 아이스 아메리카노 좋아해.”

“정말? 마시는 거 한 번도 못 봤는데?”

“찬 음료나 카페인은 몸에 안 좋다고 못 마시게 하니까 안 마셨던 거지.”

다소 차갑게 내뱉은 시호는 카운터로 향했다.

재혁은 메뉴를 살피는 그녀를 찬찬히 눈에 담았다.

캡모자에 헐렁한 후드 티에 레깅스, 그리고 편한 운동화.

이틀 전, 몸에 딱 달라붙는 원피스에 높은 하이힐을 신었던 착장과는 완전히 달라진 스타일 역시 처음 보는 차림새였다.

꼭 대학생처럼 신선해 보인다.

마치 자신이 첫눈에 반했던 그 순간처럼 생기가 반짝거려서, 도무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저렇게 예뻤었나…….”

넋을 놓고 시호를 보던 재혁은 그녀가 제 앞에 다가와 털썩 앉자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당신이 그렇게 앉는 것도 처음 봐.”

“감옥에서 편하게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

“감옥? 당신, 우리 집을 그렇게 생각했던 거야?”

시호는 기가 찼다. 그걸 이제야 깨달은 재혁도 참 보통은 아니다.

“이혼할 때 분명 얘기했던 것 같은데.”

“그만큼 우울하다는 표현으로 생각했어. 도대체 왜…… 부족한 건 없지 않았어? 부모님도 당신을 딸처럼 아껴 주셨잖아.”

이젠 대꾸할 기운도 없다. 시호는 쳇바퀴 돌아가듯 반복되는 주제로 들어가는 대신 본론을 끄집어냈다.

“선수단 관련해서 할 말이 뭐야?”

어서 얘기를 끝내고 일어나고 싶다는 표정의 시호를 보니 재혁은 어쩐지 심장 언저리가 저려 왔다.

‘내가 시호에게 이 정도밖에 안 됐었나?’

어쨌든 그 역시 바쁜 시간을 쪼개어 연교까지 내려온 것이므로 입을 열었다.

“RS그룹에서 당신이 만들 선수단에 투자하려고 해.”

“필요 없어. 위자료만으로도 충분해.”

“선수단으로 이익이 창출되는 것도 아니잖아. 기회와 꿈을 잃지 않도록 보다 많은 검도인을 후원하고 싶은 거 아니었어?”

“…….”

“중간에 어떤 상황이 발생할지 모르니, 건물 임대료나 예금만으로는 불안할 거야. 현재 소유한 경기도 토지는 신도시 부지로 책정 예정이지만 공사에 착수하려면 적어도 10년은 기다려야 하지. 아무리 훌륭한 회계사나 투자자를 만나도 RS그룹만은 못할 거고.”

재혁의 말은 구구절절 옳았다.

시호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발견한 그가 쐐기를 박았다.

“검도 꿈나무 장학금 제도 다시 시행할게. 더불어 대학생까지 후원할 수 있는 제도도 신설할 계획이야.”

시호를 막 며느리로 맞아들였을 때만 해도 RS그룹은 검도에 아낌없이 투자했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손을 떼다시피 해 버렸다.

검도 관계자들은 제발 아이들과 한국 검도계의 미래를 생각해 달라며 읍소했지만, 기업 입장에서는 검도를 이용해 좋은 이미지를 뽑을 대로 뽑았으니 별 이득이 없는 후원을 계속 이어 갈 이유가 없었다.

시호 역시 무릎을 꿇고 재고해 달라며 빌었지만, 시부모는 ‘돈의 흐름도 모르는 멍청한 얘기’라며 코웃음을 쳤다.

[앞으로 또 얘기 꺼내면 지금 후원하는 것도 다 끊어 버리는 수가 있어.]

시호는 그때부터 선수들이 마음 놓고 운동에 매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고 싶다는 꿈을 가졌다.

그래서 자신이 집안에 희생됐다 여기거나 기여한 바를 꼼꼼히 기록했고, 이혼할 때 그것을 참고한 위자료를 책정받을 수 있었다.

물론 시댁 측에서 그것을 무효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었지만 재혁이 막아 주었다.

[난 여전히 당신 사랑해. 바람 쐬러 나가도 부족하지 않게끔 해 주고 싶어. 나중에 돌아와서도 그것들은 당신 거니까 자격지심도 덜 느낄 거고.]

고마운 사람이라 표현해야 하는지. 참 애매모호한 관계였다. 그래서 더욱 태도를 확실히 해야 했다.

“당신 혼자서 맨몸으로 부딪치면 텃세를 부리며 방해하겠지. 우리 이혼을 기점으로 완전히 후원을 철회한 거나 마찬가지니까. 그때 내가 방패막이가 되어 줄 수도 있을 거야.”

직원이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들고 와서 잠시 대화가 끊겼다.

시호는 빨대로 얼음을 휘저었다.

재혁의 말이 맞다. 선수 시절엔 어화둥둥 오냐오냐 해 주다가 부상으로 은퇴하니 몇몇 고위 관계자들은 대놓고 홀대했다.

그러다 RS그룹의 며느리가 되어 나타나니 굽신거리면서도 질투했고, 후원이 끊기고 나서부터는 온갖 욕을 퍼부었다.

이혼녀가 된 지금은 어떤 대접을 받을지.

제게만 그런다면 견딜 수 있지만, 자신의 검도단 소속 선수들도 홀대할 것이 뻔했다.

그럴 때 RS그룹이 보호막이 되어 준다면.

“당신 성격에 시간이 갈수록 더 많은 선수들을 들이고 싶어 할 거고, 반드시 재정적으로 문제가 생길 거야. 당신 선수단 후원해 줄 곳이 아주 없지는 않겠지만…….”

재혁이 말꼬리를 늘어뜨리며 뜸을 들였다.

“RS그룹과 척지으면서까지 후원해 줄 곳은 없지 않을까.”

재혁이 의자에 허리를 기대며 가슴을 쭉 폈다.

“주선욱 교수가 후원 의사를 밝혔다지?”

시호가 미간을 찌푸렸다.

대학 때 담당 교수이자 현재는 장인의 뒤를 이어 중소기업을 운영하고 있는 주선욱 교수가 시호가 검도단을 창단하면 후원해 주기로 했었다.

지극히 개인적으로 나눈 대화인데, 언제 그것까지 알아냈을까.

“지금 협박하는 거야? 당신 후원 거절하면 다른 곳 후원도 못 받게 될 거라고?”

“협박이라는 말은 좀 그렇다. 협력이라고 해 줬으면 좋겠어. 사적인 감정 배제하고 냉정하게 생각해 봐. 당신 이제 단장이잖아.”

대기업의 후원을 받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고, 선수들에게도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

그러나 그만큼 자유는 줄어들 것이다.

“이혼해서까지 발목 잡히고 싶지 않아.”

“네 운영 방식에 대해선 일절 터치하지 않을게.”

“그렇담 더더욱 이상하네. 사적인 감정 배제하고 냉정하게 생각하라면서. 이렇게 해서 재혁 씨는 뭘 얻는데?”

“네 마음.”

재혁이 진지한 눈으로 시호를 보았다.

“난 우리가 다시 합칠 거라 믿어. 아니, 꼭 그렇게 만들 거야.”

“당신한테는 뭐든 다 쉽지? 결혼도, 이혼도. 깊이 생각하지 않고 결정해도 별 타격이 없으니까.”

시호의 담담한 목소리에는 사나운 감정의 찌꺼기가 군데군데 뒤섞여 있었다.

“그런데 난 아냐. 절박하지 않은 선택이 없었어.”

“시호야.”

“당신이 정말 날 생각한다면. 그냥 놔둬. 도움 주지도 말고 방해하지도 마. 우리 이제 남이라는 거, 그것만 존중해 줘. 갈게.”

“우리 이혼 계약서 잘 생각해 봐.”

멈칫. 미간을 좁힌 시호는 음료 한 번 마시지 않고 그대로 일어나서 가 버렸다.

테이블 위에 두 잔의 따뜻한 허브티와 차가운 아메리카노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던 재혁이 무언가를 깨달은 듯 눈을 크게 떴다.

다른 두 개의 성질, 그 사이에서 어느 한쪽을 닮게 태어난…….

“만약 우리 사이에 아이가 있었더라면…….”

***

집으로 돌아온 시호는 곧장 옷을 벗어 던지고 샤워를 했다.

불쾌한 기분을 물로 씻어 내리고 싶었다.

내가 확실하게 거절한 건가?

머뭇거리지는 않았나? 설마 기대에 찬 눈빛으로 쳐다본 건 아니겠지?

재혁의 제안은 매력적이었다. 자신만 생각하면 단번에 거절할 수 있지만, 선수들과 또 나아가 검도계에 이로운 일이기도 했다.

대기업에서 각 잡고 후원해 준다는데. 마다하면 역적이지.

그러나 더는 그와 얽히기 싫었다. 자유를 누리려 빠져나왔는데 또다시 수렁으로 끌려갈 수는 없었다.

‘이건 순전히 개인적인 감정인데. 난 정말로 선수단을 운영할 준비가 되어 있는 건가?’

어쩌면 너무 단순하게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자신감을 가지고 열심히 하다 보면 잘 풀릴 거라는, 막연한 낙관론에 사로잡혀 있었는지도.

훌륭한 지도자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분명 존재했다.

신생 선수단을 향한 날 선 시선과 방해를 생각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팠다.

게다가 재혁의 제안을 거절한다면 RS그룹과도 척짓는 것이 된다. 거기에 이혼 계약서까지.

- RS그룹의 이미지에 피해를 입힐 사안이라 판단될 경우, 양측은 반드시 긴밀히 논의해야 한다. 만약 따르지 않을 경우, 불이익을 초래할 수 있다.

“……하아.”

수건으로 머리를 감싸고 커다란 타월을 몸에 두른 후 욕실을 나가니 휴대폰이 미친 듯 울리고 있었다.

윤기였다. 화면에 뜬 이름을 보자마자 마음이 안정되는 것을 느끼며 시호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윤기야.”

- 선배, 어디십니까?

“집이야. 샤워하고 있었어.”

- ……하아.

어쩐지 그의 호흡이 좀 거칠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 지금 들어가도 됩니까?

지금? 아, 아직 옷도 안 입었는데?!

“잠깐만, 옷만 입고 열어 줄게.”

- …….

“윤기야?”

- 예. 기다리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시호는 속옷을 입은 다음, 반바지와 윤기의 헐렁한 티셔츠를 입고 얼른 현관으로 가 문을 열어 주었다.

스포츠백을 어깨에 멘 윤기는 그녀를 보자마자 흠칫했다.

“왔어?”

샤워를 막 마치고 나온 시호의 머리카락은 젖어 있었고, 몸에서는 향기가 났다.

깨끗한 맨얼굴은 더운 수증기로 인해 뺨이 살짝 달아올라 있었다.

“무슨 일 있어? 급해 보이던데.”

“아…….”

마른세수를 한 윤기가 낮게 심호흡했다. 시호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설마 오다가 재혁과 마주친 건가?

이상한 소리를 한 건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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