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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쳐 주세요 선배-24화 (24/81)

제24화

시간이 멈춘 듯했다.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는 윤기의 눈빛에 시호는 간신히 씹고 있던 것을 삼켰다.

‘어휴, 하마터면 체할 뻔했어.’

시호가 물을 찾자, 윤기가 얼른 뚜껑을 열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고마워.”

물을 마시고 다시 뚜껑을 닫아 마루 위에 내려놓을 때까지 윤기의 시선은 거둬지지 않았다.

“얼굴이 뚫어질 것 같네. 하하.”

“요 며칠 바빠서 못 보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계속 그렇게 나 보면서 먹겠다고?”

“안 됩니까?”

안 될 거야 없지만…….

키스하고 싶다는 말을 들은 후라 그런지 야릇한 긴장감에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먹는 거 추해. 앞에 봐.”

“하나도 안 추합니다. 예쁘기만 한데요.”

차라리 장난기라도 섞여 있다면 좀 나을 것 같은데, 윤기의 목소리가 한없이 진지해서 더 민망했다.

“그렇게 쳐다보니까 체할 것 같아.”

그 말에 미간을 좁힌 윤기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석양이 하늘 끄트머리를 물들였다.

어디선가 이른 풀벌레 소리가 들려와 적막을 깨뜨렸다.

식사를 마친 그들은 도시락 용기를 다시 비닐봉지에 넣어 잘 정리했다.

“별채에 들어가 봐도 됩니까?”

“아, 그럴래? 그러자. 거기 일회용 세면도구도 있거든. 이 닦고 싶으면 닦아도…….”

말을 하던 시호가 입술을 안으로 말았다.

‘꼭 키스하고 싶어 안달 난 사람 같잖아!’

“저기, 난 그런 의도가 아니라.”

“어떤 의도 말입니까?”

윤기의 눈빛과 목소리에는 장난기가 어려 있었다. 아까 찾을 때는 없더니, 꼭 무안할 때만 이런다.

“그냥, 밥 먹으면 당연히 이는 닦는 거니까. 그런 말이었어.”

“저도 그렇게 알아들었는데. 선배에게는 다른 의도가 있는 것처럼 들리는군요.”

그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입꼬리를 올렸다.

‘왜 기윤기는 장난을 쳐도 섹시한 거야.’

자꾸만 달아오르는 얼굴을 석양의 탓으로 돌리며, 시호는 앞서 걸었다.

“싫으면 말든가.”

“싫다고 한 적은 없는데.”

윤기가 얼른 그녀를 따라잡아 손을 붙잡고 깍지를 꼈다.

“먼저 가지 말아 주십시오.”

장난기를 지운 윤기가 시호의 손등에 입술을 깊이 묻었다.

“평생 선배의 뒷모습만 좇았던지라, 다시 혼자만 짝사랑하던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아서. 심장이 멈출 것 같습니다.”

그 말에 도리어 시호의 심장이 멈출 것 같았다.

그의 절절한 마음이 선명히 닿아 왔다.

“응. 안 그럴게.”

그제야 안심한 듯 입가를 늘어뜨리는 윤기를 보니 가슴이 벅차오른다.

내가 누군가의 세상의 날씨가 될 수도 있구나. 세찬 비를 내리게 할 수도, 매서운 바람을 불게 할 수도, 따뜻한 햇볕을 내리쬐게 할 수도 있구나.

손을 꼭 잡고 별채에 들어선 그들은 나란히 서서 거울을 보며 이를 닦았다.

꼭 신혼부부가 된 기분에 시호의 뺨을 물들인 색이 옅어질 줄을 몰랐다.

정말 신혼부부였던 때도 있었으면서 말이다. 그때도 지금만큼 설레고 떨렸었나, 생각해 봤지만 잘 떠오르지 않았다.

안 떠오르면 뭐 어떤가. 지금이 중요하지.

입안이 상쾌해지자 기분도 상쾌해졌다.

“이불이 있군요.”

예쁘게 개어 놨어야 했는데 펼쳐 놓은 그대로라 시호는 다소 민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응, 그간 여기서 잤거든. 구석구석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많아서 아예 여기서 한 달 살았지. 덕분에 아파트가 텅텅 비었지 뭐야.”

윤기의 미간이 구겨졌다.

“위험하지 않습니까.”

“아니야. 괜찮았어. 안에서 대문 잠그면 밖에선 절대 못 열어. 담장도 높고.”

그래도 아직 공사 중인 건물에서 혼자 자다니. 직원들도 오가는데.

“위험한 적 한 번도 없었네요. 그러니까 표정 풀어.”

윤기의 표정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고민하던 시호가 그의 뺨을 감싸 내려 입을 쪽! 맞추었다.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 걱정하지 마.”

“……앞으로는 절대로 혼자 있지 마십시오.”

“알았어. 기윤기 엄청 귀찮게 해야지.”

“선배를 귀찮다고 생각할 날은 없을 겁니다.”

절대로. 낮게 중얼거리며 윤기는 시호의 입술을 베어 물었다.

같은 치약을 썼는데도 그녀에게선 훨씬 달콤한 맛이 났다.

말캉한 혀가 깨끗하게 씻긴 입 속을 다시 눅진하게 적셨다.

“으응…….”

시호의 신음이 벌어진 틈 사이로 흐르자, 그조차도 아깝다는 듯 윤기가 핥고 빨았다.

“선배.”

여전히 입술이 맞닿은 채로 윤기가 말했다.

“위험한지 아닌지 직접 확인해야겠습니다.”

하아. 시호는 느른한 숨을 내뱉으며 몽롱하니 풀린 동공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떻게……?”

그녀가 매달리듯 윤기의 어깨를 붙잡았다.

“자고 갈 거야?”

그가 포효하듯 낮게 신음하며 다시 입술을 겹치고 곧장 혀를 밀어 넣었다.

더운 숨결에 온몸이 잠식당한 것처럼 뜨거웠다. 윤기는 시호의 허리를 바짝 끌어안고 다소 거칠게 키스했다.

밀려오는 감정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시호를 사뿐히 안아 들어 침구 위에 눕혔다.

그나마 부드럽게 눕히는 것까지가 그의 이성이 할 수 있는 마지막이었다.

“가르쳐 주세요.”

“흣…….”

“이다음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욕망이 강렬히 번진 눈으로 저를 잡아먹을 듯 바라보는 윤기의 모습에, 시호의 예민한 곳이 젖어 들기 시작했다.

“안아 줘. 강하게. 빈틈없이.”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윤기가 몸을 겹쳐 왔다.

어느새 모두 벗어 던진 옷이 바닥에 마구잡이로 흩어졌다.

“목소리 듣고 싶어요, 선배.”

시호의 이마와 관자놀이에 쪽쪽, 차례로 키스하는 윤기의 몸짓이 점점 거세졌다.

그날, 윤기는 시호와 몇 번이나 사랑을 나누며 몸소 안전을 확인했다.

새벽이 올 때까지 그들을 방해하는 요소가 하나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윤기는 지친 시호를 안고 잠을 청했다.

“너…… 내일 운동 가야 하잖아…….”

다 쉬어 버린 시호의 목소리가 젖은 입술 틈으로 간신히 새어 나왔다.

“선배 데려다 드리고 갈 겁니다.”

“피곤해서 어쩌려고…….”

“안 피곤하니 걱정 말고 주무십시오. 아침엔 제가 알아서 안고 가겠습니다.”

윤기가 시호의 어깨와 이마에 쪽, 입을 맞추고 그녀를 깊이 안았다.

“너…… 그러다 팔이랑 허리 부러져. 우리 무영단 에이스인 귀하신 몸인데…….”

시호는 말을 잇지 못하고 기절하듯 까무룩 잠이 들었다.

윤기가 낮게 웃었다. 참 사랑스러운 사람.

다시 한 번 시호의 이마에 입을 맞춘 윤기는 시호를 단단히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

“야, 기윤기 방금 입꼬리 실룩거리는 거 봤어?”

“내 눈이 잘못된 게 아니었네? 난 내가 헛것을 본 줄.”

수원과 태홍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윤기를 보았다.

그는 어제처럼 쉬지 않고 계속해서 뛰거나 휘두르거나 혹은 뛰면서 휘둘렀다.

그러나 분위기는 판이했다.

어제의 그가 순도 백 퍼센트 얼음으로 만들어진 인간이었다면, 오늘은 지나치게 뜨거워 푸른빛으로 보이는 불의 인간이었다.

똑같이 차갑게 보여도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윤기와 아주 오랫동안 친구로 지내 온 그들은 알 수 있었다. 그의 기분이 얼마나 좋은지를.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미세하게 입꼬리가 올라가 있으며.

아침에 ‘우리 막내, 고기 먹고 힘 좀 나쪄요?’라는 말에 무시하지 않고 코웃음을 치며 ‘그래’라고 반응해 주기까지 했다.

“시호 선배가 대단하긴 하다. 저 얼음 인간을 단번에 녹여 버리고.”

“우리 주장이 좀 위대하냐. 솔직히 지금 시호 선배랑 대련해도 우리 못 이길지도 몰라.”

수원의 말에 태홍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주 점심을 먹다가 ‘역시 천재는 다르네요’라고 말했을 때, 저희를 쳐다보던 시호의 눈빛은 여전히 상대를 위축되게 만들었다.

태홍과 수원은 잠시 침묵하다가 이내 서로 마주 보았다.

“야, 너두?”

“응, 나두.”

집으로 돌아간 그들은 자신들에게 검도가 무엇인지, 왜 이것을 계속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조차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간 타성에 젖어 의무적으로 죽도를 휘두르기만 했었는데, 시호 덕분에 진지하게 앞날을 생각하게 되었다.

“나 이번에 계약 끝나면 시호 선배 무영단 지원하려고.”

“통했네. 나도 마찬가지다.”

시호의 밑에서라면 검도로 평생 살아가겠다고 다짐했던 그때의 열정도 도로 찾고, 권태에 젖어 도태될 지경에 이른 지금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듣고 웃어라. 나 기윤기 넘어설 거다. 죽도록 연습할 거야.”

“안 웃어. 나도 그럴 거거든.”

어쨌든 같은 팀에 소속된 프로 선수라는 것은 동일하니까, 그렇게 허황된 꿈은 아닐지도 모른다.

시호처럼 한계를 넘어서려 발버둥을 치다 보면 뭐라도 얻어걸릴지도 모르지, 라는 생각도 들었다.

“맞다. 그 전에 긴기한테 할 말 있어.”

태홍이 윤기에게 향하자 수원도 자석처럼 따라갔다.

“긴기.”

훈련을 방해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윤기는 미간을 찌푸리거나 언짢은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역시, 시호 선배는 위대하다. 저 기윤기를 이토록 온순하게 길들이다니.

“집에 가서 생각해 봤는데. 나 시호 선배 선수단에 입단하고 싶어.”

태홍의 말에 수원이 황급히 덧붙였다.

“나, 나도! 윤태홍, 너 선전포고하러 온 거였어?!”

“아니, 진짜 할 말은 이거. 어제 맘카페에 글 올라온 거 말야. 그거 바로잡아야 하지 않을까?”

윤기의 눈빛이 서늘하게 변했다.

아무리 친구지만 이럴 때 기윤기는 솔직히 좀 무섭다. 태홍은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는 말을 이었다.

“댓글이 계속 달리고 있거든. 오늘 아침에 카페 임원이라는 ‘예쁜자매맘’이 아예 선착순으로 할인 받게 해 준다고 댓글 단 이후로 지금까지 댓글 폭발이야.”

라커룸에 휴대폰을 집어넣기 전까지 확인한 바로는 52개까지 달렸다.

“이대로 놔두면 잡음이 일 것 같은데, 우리 누나 아이디로 내가 댓글 달면 어때? 애들 가르치는 도장 아니라고.”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이대로 두었다간 아이들을 가르치는 검도장으로 소문이 날 거고, 시호가 귀찮은 일에 휘말리게 될지도 모른다.

윤기는 미간을 구겼다.

그 이상한 여자 때문에 시호가 괴로울 거라 생각하니 속이 콱 막혔다.

‘……감히.’

그가 서늘히 내뱉었다.

“선배한테 먼저 논의해 보고.”

“그래. 최대한 빨리 수습을 해야 할 것 같아. 지금도 댓글 계속 달리고 있을걸.”

시호와 아침까지 함께 있어서 하늘 꼭대기까지 올라간 기분이 단숨에 추락했다.

수원이 태홍의 옆구리를 툭툭 쳤다.

“야. 훈련 끝나고 말하는 게 낫지 않았겠냐?”

“응. 지금 후회하는 중이다.”

“하아. 오늘도 죽어 났구나.”

그들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윤기는 평소보다 훨씬 더 무시무시한 기세로 달려들었다. 대련이 아니라 전쟁이라 해도 무방했다.

“다음에 또 훈련 전에 긴기한테 시호 선배 얘기하는 자가 있다면 내가 반드시 죽이리…….”

지쳐 쓰러진 팀원들을 뒤로하고, 윤기는 빠르게 아파트로 향했다.

차에 타자마자 시호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아침에 함께 아파트로 올 때까지만 해도 오늘은 별다른 일정이 없다고 했었다.

‘다시 잠드신 건가?’

그래, 그런가 보다. 윤기는 왠지 모를 불안을 애써 누르며 액셀을 밟았다.

***

- 딩동.

아직 윤기가 돌아오려면 좀 이른 시간.

“운동이 일찍 끝났나?”

시호는 설렌 마음을 끌어안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인터폰을 보는 순간.

그녀의 표정이 굳었다.

- 시호야, 나야.

슈트를 말끔히 차려입은 재혁이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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