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르쳐 주세요 선배-23화 (23/81)

제23화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지만 달라진 것은 별로 없어서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저렇게 윤기와 나란히 있으니 고등학생일 적과 똑같았다.

아이들의 손을 뿌리친 소연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 최대한으로 확대한 뒤 서로 마주 보며 웃는 윤기와 시호를 찍었다.

“대박! 어머, 어머, 웬일이니.”

그들은 소연의 목적지와 같은 <바람채 도시락 전문점>으로 들어갔다.

저녁을 만들기 귀찮은 터에, 맘카페에서 새로 생긴 도시락집 맛이 아주 괜찮다는 얘기를 들어서 이곳까지 산책 겸 왔는데 대어를 건졌다.

“엄마아, 왜 안 가.”

“응, 아진아. 아정이랑 잠깐 손잡고 있어. 엄마 이것만 쓰고.”

소연이 친구들이 있는 단톡방에 사진을 올렸다.

[나 지금 유원채 앞에 있는 도시락집 가는 길에 서시호 발견. 옆에는 기윤기]

얼마 지나지 않아 미리가 미친 듯이 메시지를 보내왔다.

[어머머머머 세상에! 진짜로? 대박!!!!!]

[둘이 뭐야??? 사귀는 거야?]

[기윤기 웃는 거 첨 봐. 어머머.]

[서시호 진짜 노리고 이사 왔나 봐!]

[사진 또 없어?]

소연이 엄지로 화면을 꾹꾹 눌렀다.

[응, 이거밖에. 도시락집 들어가더라. 둘이 저녁 먹으러 왔나 봐.]

[대박대박 둘이 뭐야? 동거야? 백퍼 커플이잖아, 저 모습은!]

“엄마! 나 배고파아!”

아진이 소연의 치마를 세게 붙잡아 당겼다.

“으응. 가자, 가자.”

[일단 나 도시락 사 가지고 올게. 애들이 보챈다.]

소연은 혹여 그들이 가 버릴까, 아이들의 손을 붙잡고 빠르게 걸으려 했다.

“엄마, 다리 아파. 업어 줘.”

“아정아, 우리 저기 빨리 걸어가자. 잠깐이면 돼.”

아정이 다리에 힘을 주며 버텼다.

“싫어어! 아정이 다리 아프다고!”

“얘가 정말 왜 이래? 아휴.”

소연이 아정을 업자, 이번엔 아진이 떼를 썼다.

“엄마, 나도! 왜 맨날 아정이만 업어 줘?”

“아진아, 엄마 너무 힘들어. 우리 빨리 가서 도시락 고르자. 응? 거기 가면 콩순이 도시락 있대.”

“진짜아? 콩순이 있어?”

“응, 빨리 안 가면 다 팔려서 없대. 얼른 가자.”

그들이 잠깐의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준비된 도시락을 가지고 가기만 하면 되었던 윤기와 시호는 금세 가게를 나와 아파트 단지 안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아휴, 사진을 더 찍었어야 했는데!”

“누구? 콩순이?”

“아냐. 얼른 가자.”

소연은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도시락 전문점으로 향했다. 주머니에서는 휴대폰 알림 진동이 드르륵, 드르륵, 계속 울렸다.

“하여튼 미리 지지배는 톡 확인도 무지하게 빨라.”

빨리 톡으로 수다를 떨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서 소연은 얼른 걸음을 옮겼다.

그 시각, 민주는 퇴근을 하고 차에 올라탄 후에야 휴대폰을 확인했다.

단톡방에는 읽지 않은 메시지가 65개나 와 있었다. 보나 마나 미리 아니면 소연일 것이다.

두 사람은 누가 궁금해하지도 않는 자신들의 아주 사소한 일상까지 모조리 공유했다.

미리는 지금 먹고 있는 음식 사진, 카페 방문 사진, 새로 받은 네일 사진을 모두 올렸다. 심지어 자신이 키우는 다육 식물의 하루하루 성장 일기를 단톡방에 썼다.

소연은 자기 딸들 사진과 동영상을 경쟁하듯 올렸다. 어쩌다 거한 저녁상을 차리거나 남편이 뭐라도 사 오는 날이면 다양한 각도에서 사진을 찍어 올려서 휴대폰이 울음을 그칠 날이 없었다.

단톡방의 다른 멤버인 윤진이야 워낙 반응이 없는 친구라 ‘ㅎㅎㅎ 예쁘네’ 하나만 보내도 그러려니 했지만.

‘착하고 순하며 나를 우러러보는’ 민주가 리액션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마음에 드는 반응이 나올 때까지 계속해서 사진과 메시지를 보냈다.

“에휴, 짜증 나. 오늘은 다육이에 꽃이라도 폈나. 평소보다 왜 이렇게 메시지가 많아?”

아아. 귀찮다. 이따가 집에서 보낼까. 그렇게 생각하는데 메시지가 띠링-또 울렸다.

민주는 단톡방을 클릭하지 않은 채 위에 뜨는 알람만 읽었다.

[진짜 기윤기랑 서시호 동거하나?]

“뭐어?!”

민주는 당장 단톡방을 클릭했다.

소연이 올린, 윤기와 시호가 마주 보고 있는 사진을 보는 순간.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이, 이게 뭐야……?”

***

한 번의 주말이 지난 후 월요일.

그간 윤기는 오후 2시까지의 공식적인 훈련이 끝난 후, 근처 대학 검도팀의 요청으로 연교시청 선수들과 함께 6시까지 합동 연습을 했다.

주말에도 쉬지 않고 검을 잡았다. 무영단에 들어가서 곧바로 성과를 내려면 하루라도 훈련을 게을리할 수 없었다.

시호는 회계를 맡아 줄 사람과, 여러 가지 상황에 대비하여 고문을 맡아 줄 변호사를 찾아가 계약을 맺었다.

또한 선수의 컨디션을 정기적으로 점검할 수 있도록 연교 시내에 있는 종합병원과도 협약을 맺었다.

그녀는 현존하는 최고의 선수단을 만들겠다는 목표에 한 계단, 한 계단, 차분히 다가가고 있었다.

시호와 윤기는 그렇게 바쁘게 지내다 간신히 여유 시간이 맞은 오늘, 밖에서 만나 저녁 식삿거리를 사서 함께 돌아가기로 했다.

그러다 수련관 현장이 궁금하다는 윤기의 말에 그들은 무영관을 찾았다.

한옥에 도착한 그들은 막 작업을 끝내고 나오는 <국만태 인테리어 연구소> 직원들과 마주쳤다.

“어라, 서 사장님?”

“안녕하세요, 소장님.”

만태가 시호의 옆에 서 있는 윤기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어! 기윤기 선수?!”

“안녕하십니까.”

“이야, 우리 연교의 자랑 아니십니까!”

만태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다가가 악수를 청했다.

“우와, 여기서 기 선수님을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우리 강아지들이 엄청 팬인데, 아, 아들놈 둘 다 검도를 하거든요! 매일 기 선수 영상 보면서 어찌나 열심인지. 하하.”

“감사합니다.”

만태가 두 손으로 제 손을 꼭 붙잡고 주물럭거리자 윤기가 슬쩍 손을 빼냈다. 시호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국만태 인테리어 연구소는 시호가 한옥 인테리어 시공 업체를 두고 고심하던 중, ‘윤미애의 남편이자 쌍둥이 아들의 아버지로서 양심적으로, 최선을 다해 시공합니다’라는 홈페이지 문구를 보고 직접 선택한 곳이었다.

턱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만태는 의리와 신의를 중시하는 호쾌한 성격으로 시호와도 금세 친해졌다.

“그런데 기 선수님하고 서 사장님이 나란히 어쩐 일이십니까? 어라, 설마 기 선수 이적하는 겁니까?!”

“국 소장님 눈치는 정말 못 따라가겠네요.”

“허억, 이거 아직 극비 사항이죠?”

“네. 비밀 지켜 주실 거죠?”

“그럼요! 저희 직원들 누구도 이곳을 수련관으로 리모델링하는 거 말 안 했습니다. 야, 작업 사항 외부에 말한 놈 없지?”

국 소장이 큰 소리로 묻자 직원들이 ‘예! 당연하죠!’라고 힘차게 외쳤다.

조금 가라앉은 표정으로 시호가 조용히 물었다.

“소장님, 정말로 외부에 말하지 않으셨죠?”

“아, 그럼요! 국만태 이름 석 자 걸고 절대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마누라한테도 안 했는걸요.”

시호는 아직 제대로 정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선수단 창단이 알려지면 크고 작은 잡음이 따를 것을 염려하여, 공사에 착수하기 전 국 소장에게 단단히 부탁을 했었다.

만태는 걱정 말라고 제 가슴을 쾅쾅 두드렸고, 실제로 공사에 착수한 지 한 달째가 되었는데도 외부로 새어 나간 적은 없었다.

그러나 지난주 민주에게 알려 주자마자 맘카페에 소식이 퍼졌다.

“왜 그러세요? 혹시 다른 사람이 알고 있습니까? 이상하네. 우리 애들도 정말로 믿을 만한 놈들이거든요. 입 나불거리는 새끼들은 애초에 다 잘라 버렸는데.”

민주가 거의 확실하다. 하지만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국 소장에게 한 번 더 물어본 거였다.

시호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서 사장님, 무슨 일 있으세요?”

“그냥. 연교 맘카페에 이곳에 관한 글이 올라와서요.”

만태도 덩달아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예에? 아니, 누가 그랬지? 일단 제가 직원들에게 물어보겠습니다.”

“아니에요. 그냥 혹시나 해서 여쭈어본 거였어요. 퇴근하시는 길이셨죠? 오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저희도 가볍게 둘러보고 가려고요.”

“예에……. 그럼 살펴보시고 이상 있으면 말씀해 주십쇼. 기 선수님, 오늘 아주 반가웠습니다!”

윤기가 고개를 조금 숙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멀찍이 떨어져 서 있는 직원들에게 향하려던 만태가 답지 않게 쭈뼛거리며 윤기를 보았다.

“저기…… 실례가 안 된다면 사인받을 수 있을까요? 우리 애들이 워낙 좋아해서.”

“와아. 기윤기 완전 스타네.”

시호가 웃자 윤기의 목덜미에 붉은 기운이 슬며시 퍼져 나갔다.

윤기가 고개를 끄덕이자 만태는 품에서 유성펜을 꺼내 건네고는, 등을 돌려 니트를 들어 올렸다.

“여기 티셔츠에 해 주십쇼! 표구해서 벽에 걸어 놓으렵니다.”

“그럴 필요까지는…….”

“한국 검도계의 호날두요 메시인 기윤기 선수 사인인데 당연하죠! 우리 애들은 손흥민보다 기윤기 선수를 더 존경합니다. 하하하.”

시호가 재미있다는 듯 쿡쿡거리자 윤기는 그녀를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어찌나 다정한지, 멀리 떨어진 직원들이 부럽다고 수군거릴 정도였다.

“이야, 남자가 봐도 멋있는데 여자들이 보면 기절하겠다.”

“안 그래도 지금 기절할 것 같아서 정신 꽉 붙들어 매고 있어요. 근데 서 사장님도 멋있어서 질투도 안 나. 너무 잘 어울리지 않아요?”

“그러게. 꼭 모델 커플 같네.”

“역시 그런 사이겠죠?”

“아무래도? 그래도 입조심하자고. 우리 소장님, 입 가벼운 사람 혐오하시잖아.”

“어휴, 당연하죠!”

오늘도 바람채 도시락 전문점의 도시락을 들고 있던 윤기는 이로 유성펜의 뚜껑을 빼서 그대로 문 채, 만채의 등 위에 사인을 했다.

그 모습조차 화보 같아서 직원들이 또 한 번 감탄했다.

바로 옆에 서 있는 시호 역시 윤기의 옆모습을 보며 속으로 찬사를 보내는 중이었다.

집중하며 내리깐 눈과 우뚝 솟은 콧대와, 미끈한 턱선의 조합이 무척 훌륭해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운동선수가 아니라 배우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이런 남자가 나를 짝사랑했다니, 그것도 거의 10년 동안이나…….’

제게 사랑을 속삭이며 강하게 움직이던 침대에서의 윤기를 떠올리자, 시호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차분한 태도로 유명했던 서시호는 오늘부로 스러지고 없으리라.

민주로 인해 쓰렸던 감정도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아, 우리 아들놈들 이름이 국진서, 국한서거든요! 이름도 적어 주시면 아주아주 영광이겠습니다.”

한자로 제 이름을 휘갈기고 그 밑에 오늘 날짜를 적은 윤기는 그 옆에다 ‘국진서, 국한서에게.’라고 정갈한 글씨로 적은 뒤 유성펜의 뚜껑을 닫아 만태에게 돌려주었다.

“여기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저…… 사진까지는 안 되겠죠?”

만태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기회를 보고 있던 직원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저, 저희도 찍고 싶습니다!”

“사무소에 걸어 놔요, 소장님! 그보다 더한 걸작은 없을 것 같습니다!”

윤기의 소소한 팬미팅 현장이 되어 버린 광경을 보며 시호가 미소를 머금었다.

이렇게 밝고 유쾌한 분위기는 오랜만이다. 나, 정말 자유구나.

“…….”

사진 찍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윤기는 시호에게 시선을 돌렸다.

“선배도 같이 찍으면 찍겠습니다.”

“응? 나?”

만태를 비롯한 직원들이 반짝반짝한 눈빛으로 일제히 시호를 쳐다보았다.

황금 열쇠를 쥔 기분인데, 이거.

“그럼…… 기념으로 찍을까요?”

시호의 말에 환호성이 터졌다.

대문 앞에서 윤기를 중심으로 양옆에 두근두근한 마음을 품은 사람들이 수줍게 섰다.

“작업 과정 찍으려고 가져온 삼각대와 카메라가 이렇게 기특한 일에 쓰일 줄이야.”

“그러게 말이에요. 막내야, 빨리 와!”

사무소 막내 직원이 카메라 타이머를 맞추고 황급히 뛰어왔다.

셔터가 울리기 직전.

윤기가 무표정한 얼굴로 앞을 응시한 채 시호의 손을 꽉 잡았다.

그녀가 놀란 표정을 짓는 순간, 셔터음이 찰칵! 하고 울렸다.

“한 번만 더 찍겠습니다!”

막내가 얼른 달려가 다시 타이머를 맞추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시호는 윤기의 손을 꽉 맞잡으며 이번에는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사진 인화해서 두 분께도 드리겠습니다.”

인테리어 사무실 직원들이 돌아간 후.

시호와 윤기는 현장을 둘러보았다. 국 소장이 설명했던 과정대로 척척 잘 진행되고 있어 만족스러웠다.

그러고는 대청마루에 나란히 앉아 도시락을 먹었다.

“맛있다. 네가 해 준 요리만은 못하지만.”

그녀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며 윤기가 조용히 미소했다.

“밖에서는 되도록 그렇게 웃지 마.”

“이상했습니까?”

“아니. 너무 멋있어서. 다른 사람 눈에도 그렇게 보일 거 아냐.”

시호는 입을 오물거리며, 대답 없이 저를 빤히 바라보는 윤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왜?”

그의 입술이 열렸다.

“키스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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