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화
시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윤기는 그녀를 끌어안았다.
“후우…….”
그러고는 깊은 숨을 내쉬었다.
“왜 그래?”
“힘들었습니다.”
안고 싶어서.
자신의 목덜미를 파고들며 속삭이는 윤기의 낮은 음성이 시호의 감각을 간지럽혔다.
“우리 이제 연인인 겁니까?”
입매에 힘을 주며 버티던 시호는 이내 부드럽게 허물어지며 그의 허리를 살짝 감쌌다.
“그 말…… 되게 부끄럽다.”
시호의 마음이 두근거렸다.
연인이라는 단어의 설렘을 느낄 새도 없이 곧바로 시댁에서 결혼 생활을 시작해서 그런지, 이런 사소한 말과 행동에도 속이 간질거렸다.
결혼까지 했던 사람이 웬 주책이람, 하며 넘겨 보려 해도 심장 박동은 점점 거세지기만 할 뿐이었다.
“허락하신 겁니까?”
상체를 일으킨 윤기가 눈을 지그시 맞춰 왔다.
강렬한 시선에 시호의 몸이 긴장되었다.
“말로 대답해 주시겠습니까. 아니면…….”
그의 눈동자가 붉은 입술로 슥 내려갔다.
“다른 것으로 대신하시겠습니까?”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만 같은 윤기의 눈빛에 시호는 숨을 흡 들이마셨다.
몸이 젤리처럼 흐물흐물해지는 기분이었다.
망설이던 그녀는 쪽, 하고 발끝을 들어 그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자, 대답.”
윤기의 미간에 힘이 잔뜩 들어가더니 마주 보며 서 있던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간신히 꺄악, 하며 큰 소리를 내는 것은 막았지만 놀란 마음을 진정시킬 수는 없었다.
“내일까지 같이 있겠다고 하셨습니다.”
시호의 허벅지를 단단히 받쳐 안은 윤기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여기서 안 된다고 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그의 너른 어깨를 꼭 붙잡고 있던 시호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응, 그랬어.”
윤기의 손에 힘이 꾹 들어갔다.
“무거우니까 얼른 내려 줘.”
“하나도 안 무겁습니다.”
“거짓말.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데.”
“이건 무거워서가 아니라…….”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감정을 참아 내느라 온몸에 힘을 준 윤기의 몸이 떨리고 있었다.
“선수가 몸을 소중히 생각해야지. 이러다 손목이나 허리라도 나가면 어쩌려고 그래. 마음 아프게.”
“마음이…… 아프십니까?”
“당연하지. 이제 곧 내 선수 될 사람인데. 꼭 그게 아니더라도 네가 다치는 건 국가적인 손실이고.”
시호가 그의 눈을 슬쩍 피했다.
“또…… 이젠 아무 사이 아니기도 하고.”
부끄러워하는 시호의 모습에, 윤기는 낮게 으르렁거리며 소파로 향했다.
시호를 마주 안은 채로 소파에 앉은 윤기의 눈은 욕망으로 일렁였다.
“이제 됐습니까?”
“……응.”
금방이라도 사납게 달려들 것 같은 기세와는 다르게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는 손길은 조심스러웠다.
“선배가 다칠까 봐 겁이 납니다.”
시호를 오래도록 짝사랑해 왔던 윤기는 혹여 그녀를 조금이라도 다치게 할까, 그래서 자신을 떠나기라도 할까 봐 겁이 났다.
“내가 그렇게 약해 보여? 왜 이래, 나 운동했던 여자야.”
시호의 너스레에도 윤기의 표정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하나. 잠깐 생각하던 시호는 그의 이마에 천천히 입술을 내렸다.
“선배?”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윤기의 눈가에 쪽쪽 입을 맞추었다.
“어제 나 울 때. 네가 이렇게 해 주니까 무척 안심이 되더라. 너도 그랬으면 싶어서.”
어제 윤기의 상냥한 키스가 얼마나 위로가 되었는지 그에게 제대로 전하고 싶었다.
“오랜만이었어. 그렇게 따뜻하고 진정 어린 위로는. 고마워, 너 아니었으면 계속 도망가고 있었을 거야.”
또한, 누군가에게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열어 보이는 것도 참 오랜만이었다.
가족에게는 자신이 기둥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에 언제나 의연한 모습만을 보여 왔는데.
순간 시호는 민주를 떠올렸다.
윤기에게 민주를 ‘가족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나를 걱정하는 친구’라고 소개했었는데.
솔직히 말하면 지금은 모르겠다.
“선배, 무슨 생각 하십니까?”
윤기의 눈에 어린 희미한 불안을 읽은 시호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무것도.”
그러자 그의 눈에 어린 불안이 더 커져 갔다.
“제게는 얘기할 수 없는 겁니까?”
둘만의 달콤한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굳이 민주의 얘기를 꺼내서 그 시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잠깐 뭐 좀 생각했어.”
“그것까지 알고 싶다면…… 너무 집요하다 생각하십니까?”
자신의 아주 사소한 것까지 하나하나 전부 알아야 직성이 풀리겠다는 윤기의 눈빛에 시호는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아까 태홍이가 보여 준 캡처 화면 때문에.”
“그 친구 때문입니까?”
시호의 눈이 커졌다가 이내 원래대로 돌아왔다.
“알아챘구나. 하긴, 나 친구는 민주밖에 없다고 했었지.”
맘카페에 올라와 있던 글은 분명 수련관 건물과 자신을 말하는 것이다.
동창이 운영하는 검도장이라.
분명 민주인데. 하지만 닉네임이 ‘예쁜자매맘’인 것을 보니 올린 것은 민주가 아니다.
다른 사람한테 말했단 뜻인데…….
시호는 고등학생일 때부터 여전히 민주와 친하게 지낸다던 3인방을 떠올렸다.
처음엔 무척 잘해 주며 다가오더니, 어느 순간부터 저를 향한 눈빛에 날이 서 있었다.
그들 중 한 명일까.
저와의 얘기는 되도록 외부에 새어 나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에, 민주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었다.
이번에는 비밀로 해 달라고 말하지 않아서 친구들에게 말한 건가?
아이들이 다니는 검도장이라고 소문이 난 것은 말과 말이 전해질 때 생긴 오해이고?
정말 그런 걸까, 아니면 그저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 것일까.
“그 친구는 선배를 위로해 준 적 없습니까?”
많다. 하지만 마음을 포근히 감싸 준다거나 진심을 느낀 적은…… 별로 없던 것 같다.
언제부터인가 사이가 조금씩 어긋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시호는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스스로를 못됐다고 여겼다.
친구의 호의와 친절을 그렇게 받아들이면 안 된다고, 민주가 저를 얼마나 생각해 주는지 늘 고마워해야 한다고 자신을 타일렀다.
하지만 태홍이 보여 준 캡처 화면에 이어 윤기의 질문까지 들으니, 이번에는 그럴 수가 없었다.
“선배.”
“민주야 언제나 날 위로해 주지. 격려해 주고.”
“진심으로 말입니까?”
그렇다고 말해야 하는데 입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그럼. 당연하지.”
하지만 시호의 목소리는 스스로 느끼기에도 자신이 없었다.
민주는 제 옆에 남은 유일한 친구다. 그런 사람을 의심하거나 잃고 싶지 않은 마음이 강했다.
그렇지만 한번 생겨 버린 의혹의 얼룩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윤기의 말이 얼룩에 농도를 더했다.
“저는 선배가 그 사람을 믿지 않았으면 합니다.”
시호의 동공이 잘게 떨렸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아까 말씀하셨었죠. 하다 보면 감이 생긴다고.”
시호의 소식을 듣기 위해 참석한 동문회에서 민주를 볼 때마다 윤기는 어두운 곳에서 피어나는 검은 안개가 떠올랐다.
흑심을 품고 있는데 손에 잡히지도 않고, 제대로 집중하지 않으면 잘 보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고는 있다.
“보다 보니 감이 생겼습니다. 그 사람은 결코 선배에게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건방진 소리를 하는 후배였다. 시호는 애써 웃어넘기려 했다.
“윤기야, 민주 그런 애 아니야.”
“선배는 불안할 때마다 가볍게 웃어넘기려는 습관이 있습니다.”
4년을 함께한 남편도 알아채지 못한 자신을, 윤기는 단 하루 만에 파악했다.
“제 앞에서는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니, 그러지 말아 주십시오. 선배가 넘어지고 무너져도 제가 다 안을 테니.”
그리고 단 하루 만에 견고했던 시호의 마음도 물렁해졌다.
이 애의 앞에선 울고 넘어지는 추한 모습을 보여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려워. 하나 있는 친구를 의심하는 게. 그냥 눈 감고 귀 막고 내가 좋을 대로 생각하고 싶어.”
윤기가 두 손으로 시호의 뺨을 감싸며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부딪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것도 있습니다.”
그렇……지. 피한다고 피해질 문제가 아니지. 일단 검도장이라는 오해를 바로잡아야 훗날 탈이 없을 듯싶다.
“강요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이제 선배 곁에는 제가 있다는 것만 잊지 마십시오. 선배가 어떤 선택을 하든 무조건 따를 테니.”
그 말을 들으니 불안이 가시고 마음이 든든해졌다. 시호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 기윤기를 백으로 두니까 엄청난 용기가 생기는걸.”
장난스럽지만 안심한 듯 말하는 시호가 사랑스러웠다.
그녀의 뺨을 감싼 채 하얀 이마에 키스한 윤기는 그대로 내려와 시호의 입술을 머금었다.
모로 겹쳐진 입술과 입술이 완벽하게 맞물린 틈으로 혀가 얽혔다. 위로하듯 부드럽던 키스가 점점 과감해졌다.
후드 티 안으로 들어간 커다란 손이 그녀가 놀라지 않도록 천천히 허리를 감싸 느릿하게 매만졌다.
간지럽고 아찔한 감각에 시호의 몸이 움찔거리자, 윤기가 낮게 신음하며 그녀를 제게로 더 당겨 안았다.
맞닿은 곳에서 요요한 열기가 번져 나갔다.
“선배, 벗어도 됩니까?”
더운 숨결을 토해 내는 윤기가 강렬한 눈빛으로 시호를 보며 말했다.
가쁘게 호흡하던 시호가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아니.”
윤기의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흥분을 가라앉혀야 하는데 입술이 젖은 시호를 보고 있자니 도무지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내가 벗겨 줄게.”
시호가 윤기의 티셔츠를 단번에 벗겨 냈다.
탄탄한 상체가 드러나자 저도 모르게 눈이 커졌다.
어제도 봤지만…… 정말 가공할 위력이다. 익숙해질 날이 올까? 이 근육으로 단련된 완벽한 비율의 몸이.
시호가 손으로 그의 가슴팍을 어루만졌다.
“윽…….”
그러자 이를 악문 윤기의 몸에 잔뜩 힘이 들어갔고, 근육이 터질 듯 딱딱해졌다.
“미안. 기분 나빴어?”
악문 잇새로 낮게 쉰 목소리가 흘렀다.
“……그럴 리가요.”
“어제부터 꼭 한 번 만져 보고 싶었거든.”
시호의 말에 윤기는 더더욱 힘겨운 표정을 지었다. 근육에 꽂힌 시호는 그를 보지 못했다.
와아. 진짜 대단하다. 몸이 이 정도 되려면 도대체 얼마나 단련을 해야 하는 걸까?
윤기의 강한 의지와 근성이 고스란히 남은 흔적은 존경심마저 불러일으켰다.
섹슈얼한 의도 없이, 정말로 순수하게 감탄을 마지않던 시호는 그의 가슴팍이 크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고 고개를 들었다.
“왜 그래?”
“몰라서 물으십니까?”
눈가가 붉어진 그는 무척이나 힘겨워 보였다. 그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은 시호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미안, 난 정말 그런 의도가 아니었는데.”
“……후.”
“그렇지만 책임은 질게.”
시호의 말이 끝나는 순간, 몸이 쑥 들렸다.
윤기는 시호를 안아 든 채 침실로 향했고, 그녀를 침대 위에 조심스레 눕혔다.
“내일까지 일정 있으십니까?”
정염으로 물든 윤기의 얼굴은 무척이나 야하고 자극적이었다.
“음, 하나 있긴 한데.”
시호가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매만지며 느른히 말했다.
“잠옷 사러 가려고 했거든. 네 티셔츠랑 똑같은 사이즈로.”
“하…….”
“어제 입어 보니까 편하더라.”
물에 젖은 시호가 자신의 티셔츠를 입고 있던 모습을 떠올리자 윤기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졌다.
“제 옷 드리겠습니다. 뭐든 마음껏 가져가세요.”
그의 커다란 몸이 시호를 덮었다.
“저도 마음껏 가져갈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