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화
휴대폰을 건네받은 윤기는 무표정으로 화면을 보았다. 정황상 관장은 시호를 가리키는 게 맞지만.
“네가 그렇게 동요하는 건 에스랑 관련됐을 때밖에 없잖아.”
“그러다 내가 맘카페 들어가서 우연히 그걸 클릭했더니.”
“견적이 딱 나온 거지.”
“아. 에스가 연교로 돌아왔구나.”
태홍과 수원이 만담 콤비처럼 주거니 받거니 잘도 말했다.
스마트폰에 시선을 고정하며 윤기가 서늘히 내뱉었다.
“에스라고 멋대로 지어 부르는 거. 선배 앞에선 절대 하지 마.”
수원과 태홍이 눈빛을 교환했다.
“혹시 시호 선배 만났어?”
“…….”
만났다마다. 바로 위층에 살고 있을뿐더러 이들이 오기 전까지는 입술을 겹치고 있었다.
원수 같은 친구 놈들이 방해만 안 했더라도 지금쯤 시호와 달콤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텐데.
캡처 화면을 자신에게 전송한 윤기가 태홍에게 휴대폰을 돌려주었다.
“선배 정말로 검도장 관장 하려고 다시 내려온 거야?”
“그럼 남편은? 회사 서울이잖아. 엄청 높은 사람이 자리 비워도 되나?”
“연교에도 뭐 지점 하나 세운대?”
입을 열면 열수록 지옥행 급행열차 탑승권을 손에 쥐게 되는 것도 모르고, 트러블 메이트들은 잘도 떠들어 댔다.
“선배 사정은 선배가 말할 때까지 캐묻지 마. 절대로.”
“야, 우리가 그 정도 눈치도 없……기는 하지. 알았어.”
사실 시호의 얼굴을 보자마자 물어보려고 했던 그들은 뜨끔한 얼굴로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딩동.
벨이 울리자 그들은 벌떡 일어나 현관에 서서 차렷 자세로 대기했다.
운동부는 위계질서가 엄격했고, 고등학교와 대학을 졸업한 지금도 깍듯이 대기하다 인사하는 버릇이 남아 있었다.
윤기가 현관으로 나가 문을 열었다.
“안녕.”
시호가 다소 수줍은 얼굴로 서 있었다. 윤기는 뻐근한 가슴을 누르며 그녀가 들어올 수 있도록 몸을 비켰다.
“애들은?”
“안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편하게 있어도 되는데. 괜히 와서 불편하게 하나?”
“불편한 사람이 나가면 그만입니다.”
저를 대할 때와는 달리 가차 없는 말에 시호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작게 웃었다.
“……웃지 마십시오. 당장 안고 싶은 거 참느라 죽겠으니까.”
윤기가 고개를 숙여 귓가에 작게 속삭이자 시호의 뺨이 붉어졌다.
“저기. 애들한테는…….”
“선배가 원하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늘 저를 우선으로 생각해 주는 윤기에게 고마웠다. 시호는 그의 손을 살짝 잡았다 놓았다.
윤기의 눈동자가 짙어졌다.
“자꾸 자극하지 마세요.”
“엇, 미안. 그런 의미가 아니라.”
“이따가. 둘만 있을 때 듣겠습니다.”
그의 목소리에 담겨 있는 노골적인 욕망에 시호는 몸이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읽히는 사랑스러운 여자를 내려다보던 윤기는 치미는 욕구를 꾹 누르고 시호를 안으로 안내했다.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부동자세로 서 있던 태홍과 수원은 시호를 보자마자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오랜만이야. 잘들 지냈어?”
“예!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우면서 지냈습니다!”
씩씩한 대답에 시호는 작게 웃었다. 변함없는 후배들의 모습에 순식간에 고등학생으로 돌아간 듯했다.
“격식 그만 차리고 앉자.”
“옙!”
시호가 바닥에 앉기 전, 윤기가 푹신한 방석을 가져와 깔았다.
“……고마워.”
“별말씀을.”
수원과 태홍이 입을 떡 벌렸다.
저 얼음처럼 뻣뻣한 놈이 지금 뭘 가져다주고, 뭘 말하고 웃는 거야?
사랑의 힘은 이토록 위대하고 또 무서운 것이었다.
적응 안 되는 윤기를 어색하게 보며, 그들도 자리를 잡았다.
“정말 오랜만이다. 행사 참여했을 때 시합하는 거 봤었어. 아주 멀리서이긴 했지만.”
“영광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들을 물끄러미 보던 시호가 입가를 늘어뜨렸다.
“편하게 대해도 돼. 졸업한 지도 오래됐고. 난 더 이상 현역도 아니고.”
슬금슬금 눈치를 보던 그들은 윤기가 눈을 가늘게 뜨자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겠습니다! 시, 시호 누나!”
정적이 흘렀다.
윤기의 얼굴을 보는 순간.
수원은 눈을 꽉 감았다.
‘난 이제 죽었다. 내일 기윤기랑 대련하면 맞아 죽을 거야.’
시호가 편하게 대해 달라고 해서 분위기도 풀 겸 좀 오버했는데.
내 인생이 오버당하게 생겼다.
“뭐…… 그렇게 부르고 싶어?”
윤기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아닙니다! 실언했습니다!”
“여전히 엉뚱하구나, 꽈수원.”
시호가 별명을 부르며 환하게 웃었다.
그 모습에 세 사람은 넋이 나갔다. 두 사람은 처음 보는 선배의 웃는 얼굴에 놀라서.
한 사람은 심장이 멈출 것 같아서.
“미안, 너무 크게 웃었나?”
태홍과 수원은 얼른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 아니요, 아닙니다.”
“뭔가…… 선배가 이렇게 웃는 걸 처음 봐서요. 늘 요만큼 미소만 지었는데. 그치, 긴기?”
윤기는 여전히 시호에게 시선이 붙박인 채 굳어 있었다.
“……기윤기.”
시호의 목소리에 움찔한 윤기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왜 그러느냐는 듯 저를 바라보는 투명한 눈동자에 그는 마른세수를 하며 고개를 돌렸다.
‘저 새끼…… 선배한테 단단히 미쳤네.’
태홍은 속으로 기함하며 고개를 저었다.
근황을 묻는 것을 시작으로 얘기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치지직, 불판 위에 올려놓은 고기가 익을수록 대화도 무르익었다.
“저 항상 궁금했는데요. 도대체 선배는 어떻게 그렇게 틈을 잘 보셨던 거예요? 진짜 신기했어요.”
“음, 글쎄. 연습밖에는 없는 것 같아. 하다 보면 감이 생기거든. 아, 이때 들어가야겠구나, 하는.”
“크으. 역시 천재형들은 다른 건가. 그 감을 도무지 모르겠단 말이죠.”
천재라. 시호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수원의 눈을 응시했다.
그러자 느슨하던 분위기가 갑자기 팽팽하게 당겨졌다.
수원은 저도 모르게 몸을 바로 세우며 침을 삼켰다.
“그런 말을 들으니 좀 억울한데.”
시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고등학생 때 정해진 훈련 시간 외에 연습 얼마나 했어?”
“예? 아, 그게……. 저희가 워낙 훈련량이 많았다 보니까…….”
우이고는 훈련량이 월등히 많기로 유명했다. 다들 선발되어 들어온 특기자였지만, 고된 훈련을 견디지 못하고 나가떨어지는 사람이 많아서 학년이 올라갈수록 수는 점점 줄었다.
“아침 훈련 가기 전 새벽에 우이산 정상에 올라가서 머리, 손목, 허리치기 각 300번씩 뛰고 내려왔어. 손목 발목에 모래주머니 찬 상태로.”
그들의 눈이 커졌다. 우이산은 고등학교 뒤편에 있는 꽤 높은 산이었다.
“훈련 끝난 후 저녁에는 우이산 중턱에 있는 공터에서 다시 각 200번씩 뛰고 내려왔고. 그걸 초등학생 때부터 은퇴하기 전까지 매일 지켰어.”
타고난 재능만으로는 프로의 세계에서 버틸 수 없었다. 아니, 그런 건 처음부터 없다고 생각하고 노력해야 했다.
저만큼의 재능을 지닌 사람은 널려 있었고, 하루라도 훈련을 게을리하면 곧바로 처지는 게 몸으로 느껴졌다.
시호가 독하게 마음을 먹을 수 있던 데는 윤기의 영향도 컸다.
우이고 신입생으로 들어온 그의 경기를 보며 천재는 저런 애를 두고 말하는 거구나, 싶었다.
분했다. 저는 아등바등 노력해야 겨우 저만큼 움직일 수 있는데, 윤기는 뭐든 쉽고 빠르게 해냈다.
주장으로서 후배보다 뒤처지지 않으려 이를 악물고 버텼고, 결국 그해 전국 중·고등학교 검도대회에서 여자 개인전 금메달을 따내는 쾌거를 이루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보이더라. 저 사람이 흔들리고 있구나. 지금이 기회구나.”
시호의 얘기에 집중하느라 세 사람은 대답도 못 했다.
“왜냐하면 나도 그때쯤 돼서 흐트러졌으니까. 승부는 거기에서 판가름 나는 것 같아. 똑같이 지쳐 있을 때 누가 더 버티며 집중하느냐에 따라.”
언제나 장난기가 넘치던 태홍과 수원은 지금만큼은 무척 진지했다.
그들은 반성하는 중이었다.
윤기를 보면서 ‘쟤는 타고났으니까 잘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그를 넘어설 생각과 노력은 하지 않았던 것이다.
한데 시호는 그 한계를 넘어서려 자신을 혹독하게 몰아붙였다.
어떤 상황에서든 차분하고 담담한 겉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런 피나는 노력이 바탕이 되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너희들이 천재 아닐까? 나만큼 노력하지 않았는데도 프로 선수가 되었잖아.”
시호는 한 번 싱긋 웃고는 고기를 입에 넣었다.
“마저 먹자. 아직 많이 남았잖아.”
“아, 네, 넵.”
“요즘은 어떻게 훈련해? 예전이랑 많이 다른가?”
시호가 분위기를 다시 밝게 이끌었다. 화제는 금세 바뀌었지만 그녀의 말은 태홍과 수원, 그리고 윤기의 가슴속에 잔상을 남기며 깊이 스며들었다.
긴 점심 식사를 마친 후.
자리 정리가 끝나자, 윤기가 눈빛으로 태홍과 수원에게 어서 가라는 무언의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시호와 얘기를 더 나누고 싶었던 그들은 애써 못 본 척, 스마트폰을 들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맞다, 선배. 이거 선배 맞으시죠?”
맘카페 게시글 캡처 화면을 읽은 시호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음. 맞는 것 같긴 한데. 틀린 부분도 있네. 일반인 가르치는 검도장이 아니라 선수단 수련관이거든.”
“선수단요?”
시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검도 선수단 창단할 계획이야.”
“예에에에?!”
“그, 그럼 선배가 단장이에요?”
그녀가 미소로 긍정하자, 수원과 태홍이 또다시 집이 떠나가라 놀란 소리를 내질렀다.
“시끄러워.”
윤기의 말에 황급히 입을 다물긴 했지만 흥분을 감추긴 무리였다.
“혹시 입단 조건을 알 수 있을까요?”
“일단 스카우트 제안할 사람들 명단 추리는 중이거든. 그 외 인원은 지원자에 한해 심사를 거친 후 합격자를 선별할 생각이야.”
시호 선배가 단장인 선수단이라니.
지금 당장이라도 연교시청과의 계약을 끊고 나오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그녀의 실력과 리더십은 이미 검도부 주장이었을 때부터 입증된바.
대학 때까지 선수로 활동했으니, 그저 후원만 하는 스폰서보다는 선수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헤아릴 것이다.
현재 소속팀인 연교시청엔 그다지 미련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연교시청은 에이스인 윤기를 제외한 나머지 선수들에겐 큰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렇다고 윤기를 미워하는 건 아니다. 무조건적인 편애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이니.
검도 자체는 여전히 좋아하지만, 강하게 끌어 주고 믿어 주는 이가 없기에 정해진 훈련에 의무적으로 참가할 뿐이었다.
권태로움에 도태가 뒤섞이려 할 때 들려온 시호의 선수단 창단 소식은 단비나 다름없었다.
수원이 시호에게 말을 걸려 했다. 본능적으로 길어질 것을 직감한 윤기가 말을 가로챘다.
“선배, 약속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윤기의 시선의 의미를 알아챈 시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미안해, 얘들아. 자세한 얘기는 다음에 하자. 대신 비밀로 해 줄래? 아직 초기 단계라.”
“그럼요. 걱정 마세요.”
태홍과 수원은 아쉬워하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맞다. 선배 번호 좀…….”
“내가 나중에 알려 줄 테니까.”
제발 좀 가. 윤기는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뒷말을 이었다. 깨갱한 수원과 태홍은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간신히 발을 뗐다.
문이 닫힌 후.
살벌한 얼굴로 돌아오는 윤기를 보며 시호가 미소했다.
“드디어 둘만 남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