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화
여태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농밀한 침묵에 짓눌려 숨이 막혔다.
시호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윤기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어떤 표정일까. 어떤 마음일까.
가장 두려운 것은 윤기의 대답이었다. 어느 쪽이든 감당하기 벅찰 것만 같았다.
그래도 솔직하게 말해야 했다.
결혼 생활을 종료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이 바로 상대에게 솔직하지 못했기 때문이니까.
재혁은 저를 사랑하기에 결혼을 결심했다고 말했지만 자신은 아니었기에 그저 미소만 지었다.
시작부터 삐걱거린 것이다.
윤기와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재혁과 그랬던 것처럼 허무한 끝을 맞이할 거라면, 차라리 시작하지 않는 것이 나았다.
자신에게도, 그리고 윤기에게도.
“사랑합니다.”
시호는 놀라 고개를 치켜들었다.
“선배가 나를 몰랐던 시간에도, 나를 알고 지냈던 시간에도, 나를 잊고 있었던 시간에도.”
윤기가 손을 들어 시호의 얼굴을 감쌌다.
“계속 사랑해 왔습니다.”
말에서, 눈빛에서,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지는 손길에서 그간 꾹꾹 눌러 왔던 밀밀한 감정이 흘러나왔다.
“내가 싫어서가 아니라 그저 두려워서 그런 것뿐이라면.”
커다란 손이 시호의 눈을 가렸다.
“눈 감고. 귀 막고. 그냥 내 품에만 안겨 있어요. 내가 다 막아 줄 테니.”
시야는 캄캄했으나, 빛 아래에 서 있는 것보다 더욱 밝고 따뜻했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시호는 입술을 깨물었다.
눈을 가렸던 손을 거둬 다시 뺨을 감싼 윤기의 엄지가 시호의 아랫입술을 살짝 눌러 아래로 내렸다.
“불안할 때. 마음을 숨기고 싶을 때. 자기 입술 깨물지 말고 내 입술을 물어요.”
“아…….”
“다 내어 줄 테니까.”
눈길이 이리저리 뒤엉켰다.
윤기의 고요한 응시에 시호의 속은 들끓었다.
내가 이런 사랑을 받아도 될까?
윤기마저 구렁텅이로 끌어당기게 되는 것은 아닐까. 나랑 엮여서 좋을 게 없을 텐데.
차라리 나이가 어렸으면 좋겠다. 그럼 내 감정만 생각하고 철부지처럼 행동해도 어느 정도 참작이 될 거 아닌가.
알 거 다 아는 나이에다 이혼까지 했으니, 고백 받는 달콤한 순간에도 고려해야 할 것들이 수십 개는 떠오른다.
가족, 평판, 계획, 책임…….
순수하고 올곧은 윤기의 마음을 받을 자격이 이런 내게 있을까.
흔들리는 시호의 마음이 느껴졌는지, 윤기가 그녀의 두 뺨을 감싸 제게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흔들려도 돼요. 내 품에 안겨서 마음껏 흔들리고, 불안해해요. 그럴 때마다 꽉 잡아 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너무 미안해서…….”
“미안할 거 없습니다. 나는 내 선택을 하는 것뿐이고, 그 책임도 내가 집니다.”
확신에 찬 강한 음성이 잡념과 상념을 흐트러뜨렸다.
“피하고 도망치는 건 선배와 어울리지 않습니다.”
윤기의 말이 시호를 건드렸다.
‘그래, 피하고 도망친다고 일이 해결된 적은 없었다.’
이혼 또한 마찬가지. 계속 참고 피했다면 여전히 감옥 같은 결혼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부모님을 핑계 삼아 피하려고 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자신이 언제까지고 도망만 다니는 것을 좋아하실 것 같지는 않았다.
도망친다고 해서 자신과 가족을 나쁘게 말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변할 것 같지도 않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하든 욕할 사람은 욕하겠지.
‘내 감정에 솔직해지자.’
이혼할 때 스스로와 했던 약속이 떠오르자 시호는 망설임 없이 그에게 손을 뻗었다.
기왕 욕먹는 거,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자. 윤기의 목을 휘감고 입술을 겹쳤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단단한 팔이 허리를 감아 왔다.
겹쳐진 입술이 벌어지며 서로의 안으로 혀와 혀가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부드럽게 다가온 윤기는 천천히 입술을 머금다가 서서히 깊게 침입했다. 그러고는 이내 먹어 치울 듯 강하게 휘감고 시호의 입술을 탐닉했다.
“흐읏…….”
틈새로 새어 나간 신음까지 아깝다는 듯 한입에 집어삼킨 그는 시호를 밀어붙였고, 그녀의 등이 벽에 닿았다.
윤기의 품에 갇힌 시호는 쏟아지는 뜨거운 숨결을 벅차게 받아들였다.
그의 목을 감싼 손에 힘을 줘서 제게로 더 당기니, 윤기가 낮게 으르렁거리며 그녀의 허리를 위아래로 매만졌다.
후드 티 안으로 들어간 굵고 긴 손가락이 부드러운 살결에 닿았다.
“으응…….”
시호의 몸이 저도 모르게 움찔거렸다.
“……후.”
낮은 숨을 내뱉은 윤기가 더욱 갈증이 난다는 눈빛으로 시호를 보았다.
“사랑합니다, 선배.”
“읏…….”
“사랑하고 싶습니다.”
그의 손이 브래지어 호크에 닿은 순간.
Rrrrrrrrrr!
윤기의 휴대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
이제 막 달아오른 열기에 몸이 뜨거운 두 사람이었다.
허나 눈치도 없이 휴대폰은 계속해서 울어 댔다. 잠깐 끊겼나 싶더니 곧바로 귀가 따갑게 울렸다.
어제, 혹시나 시호의 연락을 놓칠까 싶어서 벨소리를 최대치로 키워 놓은 게 화근이었다.
볼이 연하게 달아오른 시호가 가쁜 숨을 내쉬며 부푼 입술을 움직였다.
“……받아 봐. 급한 전화일 수도 있잖아.”
미간을 좁힌 윤기가 그녀의 입술을 한 번 깊이 머금고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윤태홍]
……젠장. 윤기는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내일 대련에서 절대로 가만 안 둔다.
“용건.”
- 아, 새끼. 전화 받는 거 봐라. 정이 흘러넘친다, 아주.
“끊는다.”
- 야야야야야야야! 나 지금 꽈수원이랑 너네 집 다 왔어!
윤기가 작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 형님들이 고기 사 가니까 세팅 딱 해 놔라. 안! 뇽!
제 할 말만 하고 태홍은 전화를 끊어 버렸다. 자신이 거절할 기미가 보이면 늘 이렇게 전화를 끊어 버리고 받지 않으며 제가 나올 때까지 문을 두드리는 놈이었다.
“누군데 표정이 그래?”
“……윤태홍입니다. 고기 사서 오고 있다고.”
“음. 그럼 점심 같이 먹을까?”
시호의 말에 윤기는 노골적으로 싫은 표정을 지었다.
“싫…….”
“오랜만에 애들 보고 싶기도 하고. 고기 얘기 들으니까 먹고 싶기도 하고.”
고기를 먹고 싶다는 시호의 말에 윤기는 말을 도로 삼켰다.
전혀 내키지는 않지만, 그녀가 원한다면 들어줘야지…….
언짢은 표정의 윤기를 보니 시호는 웃음이 나왔다.
“윤기야.”
쪽. 그녀가 발을 들어 그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우리에게 시간은 많아.”
그 말이 다시금 윤기를 끓어오르게 했다. 이대로 시호를 안은 채 어디도 나가고 싶지 않았다.
“그런 말을 들었는데 어떻게 나갑니까.”
윤기가 손으로 하얀 목덜미를 지분거렸다.
그러다 발견했다.
자신이 남기지 않은 흔적을.
순식간에 날카로워진 눈동자가 그것을 꿰뚫을 듯 훑었다.
살결을 강하게 흡입했을 때 생기는 붉은 자국이었다.
“왜 그래?”
시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갑자기 딱딱하게 얼어 버린 윤기를 올려다보았다.
“어제 그 사람과 무슨 일 있었습니까?”
심상치 않은 목소리에 팽팽한 긴장감이 돌았다.
“술주정을 하길래 실랑이를 벌이긴 했는데…… 왜?”
“목에 자국이 있습니다.”
낮아진 윤기의 목소리는 주위를 얼려 버릴 듯 차가웠다.
시호는 눈을 크게 뜨고 손으로 입을 가렸다.
“…….”
어제 재혁이 뒤에서 끌어안았을 때 생긴 모양이었다. 아주 잠깐 입술이 닿은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왜인지 알겠다는 시호의 표정에 눈을 가늘게 뜬 윤기가 그녀의 목덜미를 베어 물었다.
“아……!”
이로 잘근잘근 씹었다가 입술로 강하게 빨아들였다.
“하읏, 윤기야……!”
옷을 옆으로 제친 윤기는 그녀의 몸을 결박하듯 끌어안고 계속해서 자국을 남겼다.
재혁이 남긴 자국 위를 자신의 흔적으로 덮은 것으로도 모자라 그 옆에도, 반대쪽에도 낙인을 새겼다.
살결이 빨릴 때마다 아찔한 감각이 발끝까지 퍼져서 시호는 매달리듯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허락하지 마세요. 저 이외에는.”
“어제는…… 갑작스럽게…… 사고처럼…….”
목덜미를 따라 쪽쪽, 입을 맞추며 올라간 윤기가 다시 부푼 입술을 빨아들였다.
“내일까지 같이 있어도 됩니까?”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휘감으며 윤기가 지그시 물었다.
“떨어지고 싶지 않아요.”
***
딩동.
수원이 벨을 누르자 문이 열렸다.
윤기가 노골적으로 귀찮은 눈으로 현관에 서 있었다.
“브라더. 형님들이 너를 위해 피로 회복에 좋은 고기를 사 왔다.”
수원과 태홍이 양손 가득 든 봉투를 흔들어 보였다.
“오늘따라 더 꼴 보기 싫다는 눈이다?”
“알았으면 닥치고 들어와.”
“야, 방금 기윤기 말하는 거 들었어?”
“들었다. 운동 끝나고 한 ‘간다’보다 무려 5배나 길게 말했다.”
“그럼 오늘은 그거 기념하면서 먹자.”
“……미친놈들.”
윤기가 낮게 내뱉는 말에 수원과 태홍은 ‘긴기가 평소대로 돌아왔다!’며 킬킬거렸다.
“뭐야, 왜 세팅 안 해 놨어?”
“먹고 싶은 놈들이 해.”
“고기 사 온 사람한테 할 소리냐?”
“싫으면 나가.”
“당장 준비하겠습니다.”
마치 자기 집인 양, 태홍과 수원은 익숙하다는 듯이 거실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불판을 꺼내 와 깔았다.
“오늘 형님들이 돈 좀 썼다. 우리 막내 기운 차리게 하려고.”
윤기는 빠른년생이라 태홍과 수원은 그를 ‘막내’라고 불렀다. 물론 그럴 때마다 화살처럼 날아와 박히는 윤기의 시선은 애써 모른 척했다.
“오, 오늘따라 고기가 참 맛있게 보이네. 안 그런가, 친구?”
“그러게 말일세. 역시 고기는 긴기 집에서 먹을 때가 최고야.”
“맞다. 긴기, 너한테 보여 줄 거 있어.”
태홍은 맘카페 캡처 사진을 보여 주기 위해 휴대폰을 꺼냈다.
“나도 할 말 있다.”
수원과 태홍이 동시에 고개를 쳐들고 윤기를 보았다.
“조금 이따 선배 올 거야.”
그리고 두 사람은 동시에 외쳤다.
“헐! 대박!”
“진짜냐?!”
윤기가 미간을 찌푸렸다.
어떤 선배인 줄 알고 난리야.
평소에도 그들은 말을 다 듣지도 않고 ‘헐, 대박, 걔가 나빴네.’라고 반응하며 장난을 치고는 했다.
이번에도 그런 장난이라 생각하며 입을 떼려는데.
“진짜 서시호 선배님 연교로 돌아온 거야?!”
“야, 태홍, 맘카페 진짜 장난 아니다. 무슨 소식이 이렇게 빨라?”
호들갑을 떠는 그들과 다르게 윤기는 낮게 가라앉았다.
지나가다 선배를 보기라도 한 건가?
“니들이 그걸 어떻게 알아?”
태홍이 자신의 스마트폰 화면을 윤기에게 들이밀었다.
“이거 봐봐. 여기서 말하는 한옥 검도장 관장이 시호 선배 맞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