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르쳐 주세요 선배-18화 (18/81)

제18화

윤기가 시호를 처음 본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전국체전 고등부 경기를 관람하다가 그녀를 보았다.

경기 시작부터 끝까지 결코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으며 호흡을 유지하는 그녀의 모습에 시선이 갔다.

호면을 쓰고 있어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는데도 그랬다.

소속과 이름이 새겨진 명패를 끼운 갑상을 보았다.

- 우이고 서시호.

우이고라면 진학을 염두에 둔 학교들 중 한 곳이었다.

흥미를 가지고 경기를 지켜보았다.

시호는 다 이긴 시합이든 어려운 시합이든 최선을 다해 임했다.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접근하다, 틈이 보이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칼을 들이밀었다.

들고 있는 것은 대나무로 만든 죽도인데도, 마치 날카롭게 벼린 진검을 휘두르는 것으로 보일 만큼 날 선 움직임이었다.

“사냥하는 호랑이 같다, 야. 이름도 시호네. 호랑이 호인가.”

윤기의 생각은 친구와는 달랐다.

호랑이 호가 아니라 나비 호(蝴)였다. 우아하며…… 덧없는.

그녀의 동작은 절도 있었으나, 얼음판 위를 디딘 듯 어딘가 아슬아슬했다.

이대로 안개처럼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듯했다.

동중정(動中靜).

역동적인 공간 속에서 시호 혼자만 태풍의 눈 안에 있는 듯 고요했다.

그 묘한 분위기에 홀린 윤기는 시합이 끝나는 줄도 몰랐다.

3판 2승제에서 시호는 1승 1패를 기록 후, 마지막 시합에서 이겼다.

호면을 벗는 순간.

“와…… 저 사람 존, 아니, 진짜 예쁘다…….”

이번엔 친구의 생각과 같았다.

시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서늘하고 이지적인 눈매와 나붓이 솟은 코, 단정히 닫힌 입술.

머리에 썼던 면수건을 벗은 시호가 하얀 이마로 넘어온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는 순간.

말 그대로 뻑이 갔다.

“기윤기, 가자! 코치님이 부르신다.”

“응…….”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윤기는 진로를 정했다.

우이고등학교. 서시호의 옆.

그의 인생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여자가 각인된 순간이었다.

***

윤기가 시호를 마음에 담은 역사적인 날에 함께 있던 친구가 바로 수원이었다. 태홍은 배탈이 나서 그 대회에 출전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수원은 태홍과 현재 불알친구인 윤기의 기운을 북돋아 주는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투데이, 긴기가 이상해. 투나잇, 나는 그 이상 해.”

“어, 그래? 어그뤼. 야 너두? 야 나두.”

두 사람은 삼겹살과 목살, 항정살 등 고기를 바리바리 사 들고 윤기의 집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마치 갱스터라도 되는 양 힙합을 크게 틀어 놓고 고개를 까딱이며 운전하는 태홍과 수원의 랩 배틀을 가장한 대화 내용은 지극히 건전했다.

“친구 좋다는 게 뭐냐. 말 못 할 고민이 있을 때 눈치 딱 까고 알아채 주는 거 아니겠냐.”

“고렇지. 진정한 프렌드십이란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지.”

“힘들 때 우는 건 삼류. 웃는 건 일류. 먹는 건 육류.”

“근데 대체 무슨 고민인데 저러지? 진짜 에스랑 관련된 건가? 너 뭐 소식 들은 거 없어?”

조수석에 앉은 태홍은 단체 톡방과 커뮤니티에도 들어가 봤지만 시호와 관련된 내용은 찾을 수 없었다.

“기사를 검색해 볼까? 작긴 했지만 에스 결혼할 때 완전 신기했잖아. 결혼할 때 기사가 나는 사람이 되다니.”

태홍은 포털 사이트 검색창에 시호의 이름과 RS그룹을 함께 쳐 봤지만 딱히 나오는 기삿거리는 없었다.

“도대체 긴기가 고민할 부분이 뭘까. 외모는 절대 아닐 거고. 커리어도 ‘갓윤기’ 소리 들을 정도로 탄탄하고. 앞날은 더 탄탄대로인데.”

이럴 땐 제 속내를 털어놓지 않는 윤기가 조금 원망스럽다. 좀 더 저희를 믿고 의지해도 될 텐데.

하지만 수원은 1초 만에 생각을 정정했다.

우리는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친구가 아니다.

여자 친구에게 차였을 땐 술이 떡이 되도록 마시다 대련 중간에 토한 적도 있고.

훈련이 힘들다고 감독님을 욕하는 노래를 만들어 부르다 걸려서, 종아리 근육이 터지기 직전까지 운동장을 뛴 적도 있다.

그럴 때마다 윤기는-비록 시리도록 차갑고 한심한 눈빛으로 쳐다보았지만-묵묵히 마무리를 해 주었다.

트러블 메이트로 불리는 수원과 태홍이 그나마 사람 행세를 하고 사는 것은 그렇게 윤기가 이끌어 주기 때문이었다.

“나 지금 의문이 생겼다.”

“뭔데. 너까지 무슨 고민인데.”

“긴기는 왜 우리랑 친구를 해 주는 걸까?”

“그러게?”

쩜쩜쩜. 잠깐의 정적 후.

“헐. 나 방금 답을 안 것 같아. 이것이 바로 ‘사블인블’ 애청자의 내공인 것이다.”

“뭔데, 뭔데? 당장 말해 봐.”

“바로 에스를 이성으로 좋아하지 않은 유일한 인물들이기 때문이지.”

그들도 시호를 좋아하긴 했지만, 이성으로서가 아니라 선배를 향한 동경에 더 가까웠다.

“생각해 봐. 그때 시호 선배한테 고백하려고 마음먹었던 놈들이 한둘이었냐? 대놓고 티 내든, 은근히 티 내든, 주위 사람들이 다 알아챌 수 있을 정도였지.”

지금 생각하면 딱히 사랑이라기보다는 저희들처럼 그들도 동경에 더 가까운 마음이었을 거다.

손을 잡거나 입을 맞추고 싶다기보단, 시호에게 인정받고 싶어 했으니까.

그래도 윤기의 눈에는 거슬렸겠지.

“우리는 ‘선배님 사랑합니다’가 아니라 ‘선배님 존경합니다’였잖아. 그러니까 긴기가 우리를 친구로 탁! 낙점한 거지.”

……어라? 수원과 태홍은 동시에 깨달음을 얻고 서로를 보았다.

“기윤기가 우리를 친구로 두는 이유가 정말 그거뿐?”

“오, 쉣……. 그냥 묻어 뒀어야 할 상자를 열어 버린 기분이야. 우리 가치 레알 그 정도밖에 안 됨?”

“응응.”

쩜쩜쩜.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우정의 의미와 깊이에 대한 고찰이 이루어지려는 찰나.

“야. 근데 고기 가져가면 완전 좋아하겠지?”

“당연하지. 누가 싫어함?”

“고기 가져가는 친구가 최고 아니냐? 결론은 우리는 친구 자격이 있다.”

“인정. 어? 근데 이게 뭐지?”

수원이 태홍의 스마트폰 화면을 슬쩍 보았다.

“뭐야? 연교 맘카페? 너 그런 데도 가입했어?”

“울 누나 임신해서 집에 와 있거든. 매형은 외국 출장 가 있고. 그래서 내가 저녁마다 맘카페 새로 올라온 글 읽어 주면서 태교시켜 준다.”

“와우. 태어나서 처음 들어 보는 태교 방법이야.”

“첨엔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었거든? 이게 은근히 재밌데?”

태홍이 신난 듯 말했다.

“여기 들어가면 연교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다 파악할 수 있어. 장난감 물물교환에 반찬 무료 나눔도 얼마나 많은데. 완전 핫플레이스.”

“네 조카는 어린이집에서 여론 파악하고, 장난감 중고 거래는 기가 막히게 하겠다, 야.”

홍홍홍. 오늘은 또 어떤 게시글이 올라왔을까나.

태홍은 목록 중 눈에 띈 것을 클릭했다.

[제목: 폐가 한옥 무슨 공사하는지 아시는 분?]

- 내용: 어제 올만에 남편이랑 드라이브 하다 보니까 그 폐가 한옥 공사하더라고요! 거기 뭐 생기나요? 카페일 것 같은데, 누구 자세히 아시는 분~~!

“오호. 야, 너 그 폐가 알지. 우리 담력 훈련하려고 갔다가 문 잠겨서 못 들어갔었잖아.”

“어. 기억남.”

“거기 지금 공사하고 있대. 카페 생길 거 같다는데?”

그때 댓글이 달렸다.

- 예쁜자매맘: 친구가 그러는데 검도장 생길 거라네요~~ 관장될 사람이 여자인데 제 고교 동창이라는~~^^

- 시연서연맘: 어머, 한옥 검도장이라니… 운치 있겠네요… 우리 애들 검도 시키려는데 문의 넣어 볼까요…

- 유준하준맘: 예쁜자매맘님~~ 역시 임원이시라 그런지 소식이 엄청 빠르셔요 :) 최고최고! 예쁜자매맘님 소개받고 왔다 하면 할인 같은 거 받을 수 있을까요?ㅋㅋ

- 예쁜자매맘: 친구한테 물어볼게요~~ 동창이랑 직접적으로 친한 건 아니라;; 힘 좀 써 보겠습니다..ㅎㅎ

- 연년생은제발낳지맘: 어머, 저도 줄 서도 될까요? 형제만 키우는데 에너지가 어찌나 넘치는지ㅠㅠ 태권도는 싫다네요… 검도장이나 보낼까 봐요. 한옥 구경은 덤으루^^

“헐, 방금 댓글 달렸는데. 카페가 아니라 검도장이라네?”

“검도장? 진짜?”

“근데 관장이 여자래. 이 카페 임원 고등학교 동창이라는데?”

연교 맘카페 임원은 연교에서 7년 이상 살거나 연교 소재 학교를 나온 사람만이 가능했다.

연교에서 고등학교를 나온 여자 검도 관장.

“미친! 설마 이 한옥 검도장 관장이 에스 아니야?!”

신호에 걸린 수원이 브레이크를 밟으며 흥분한 듯 태홍의 어깨를 퍽퍽 쳤다.

“대박, 맞는 것 같아! 안 그럼 기윤기 그 새끼가 그렇게 복잡 미묘한 얼굴일 리가 없어.”

시호가 연교에 돌아왔다.

그것도 검도관 관장으로.

“아니, 근데 시호 선배 재벌가로 시집갔잖아. 재벌가 며느리가 검도장 관장을 한다고?”

“검도 선수를 며느리로 받는 재벌가도 있는데 뭘. RS에서 검도에 투자 엄청 하잖아. 최근엔 좀 시들시들한 것 같긴 하지만.”

“검도계를 아예 먹어 버리겠다는 건가. 스케일 지리네.”

태홍은 화면을 캡처했다. 기윤기 보여 줘야지.

“와. 진짜 대박이다. 만약에 진짜 그 관장이 시호 선배면 애들 완전 술렁이겠는데?”

“일단 기윤기 고기 먹이면서 에너지 좀 충전시키고 나서 얘기하자고.”

두 사람은 잔뜩 흥분한 마음을 그러안고 윤기의 아파트로 질주했다.

***

윤기는 시호의 어깨를 붙잡고 마주 보았다.

“선배에게는 급하게 느껴지겠지만.”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시호는 그 뒷말을 알 것 같기에 가만히 손을 붙잡았다.

“네게 끌려. 네 고백을 들었을 때 설렜고 지금도 떨려.”

윤기의 얼굴에 황홀이 충격처럼 번져 갔다. 그 모습에 가슴이 뛰었지만 곧 가라앉았다. 시호는 덤덤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혼했어. 요즘엔 이혼이 별거 아닌 흔한 걸로 치부되지만, 당사자나 가족에게는 그렇지 않아.”

저를 붙잡고 서럽게 울던 부모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너도 알다시피 나와 결혼했던 상대는 꽤 높은 사회적 위치를 갖고 있어. 헤어졌어도 ‘RS그룹 며느리였다’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니겠지. 내게도, 내 가족에게도.”

자식으로 돈 장사 한번 거하게 해 먹었다는 말을 처음 듣고 온 날, 아빠는 인사불성으로 취했고 엄마는 소리를 죽이고 울었다.

사치품, 작은 회사의 명의, 아파트 등 시댁이 제공하겠다는 향응 일체를 거부했음에도 사람들은 ‘딸 팔아 돈 번 사람들’이라고 욕을 했다. 뒤로는 욕하면서 앞에서는 아주 사소한 것부터 터무니없이 부담스러운 부탁을 요구하며 갖은 아부를 해 댔다.

모임에 나가면 그 많은 인원의 밥값은 당연히 제 부모님이 계산해야 했고, 매번 아주 비싼 곳으로만 갔다.

세상에 제게 그렇게 많은 친척이 있는 줄 그때 처음 알았다.

6촌 당숙이다, 8촌 고모의 사돈이다, 기가 막힌 사업 아이템이 있으니 투자해 달라, 생활이 어려워 그러니 한 핏줄 좀 도와 달라.

무언가를 하나 사도, 사지 않아도 주변에선 이러쿵저러쿵 떠들어 댔다.

옷차림, 말 한마디, 행동거지, 사소한 것 하나하나를 평가당했다.

선량하게만 살아오신 분들이었다. 자식이 원하는 것을 지지해 준 죄밖에 없는데.

깊은 상처를 입히고 말았다.

“너와 연애한다는 게 알려지면 내 부모님께 또 날아올 그 화살들이 나는 두려워.”

또다시 자신을 위한 선택으로 부모님께 상처를 줄 수는 없었다.

담담하게 말하고 있지만 시호의 속은 곪을 대로 곪아 있다는 걸 선명히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넙죽 네 마음을 받을 수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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