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화.
곽 비서는 입술을 달싹였지만 목소리가 쉽게 나오지 않았다.
차갑게 굳은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남자에게선 그간 재혁을 따라다니며 숱하게 보았던 CEO나 연예인과는 다른 위압감이 흘렀다.
떡 벌어진 어깨와 탄탄한 가슴팍을 보아하니 운동깨나 한 모양이다.
얼음을 깎아 놓은 조각처럼 잘생긴 얼굴보다도 몸에 먼저 눈이 갔다.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낮은 음성은 맹수가 으르렁거리며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는 소리처럼 들렸다.
저도 모르게 긴장으로 몸에 힘이 들어간 곽 비서가 미소를 지으며 분위기를 풀어 보려 했다.
“저는 이 댁 사시는 서시호 씨 부군의 비서입니다. 실례지만, 선생님께서는 누구신지…….”
부군이라는 말에 윤기의 표정이 더욱 살벌히 굳었다.
곽 비서의 말끝이 흐려지는 그 순간.
“서시호, 너 지금 제정신이야?”
안에서 다시 한 번 큰 소리가 났다.
곽 비서가 들어가려던 찰나, 몸이 순간 붕 뜨더니 뒤로 밀렸다.
정신을 차리니 자신은 문밖에 있고 커다란 남자는 빠르게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곽 비서가 황급히 뒤를 쫓았다.
“전무님……!”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간 윤기는 시호를 붙잡으려 뻗은 재혁의 손목을 틀어쥐고 그녀의 앞을 보호하듯 막았다.
너른 등판을 본 시호의 눈이 놀람으로 커졌다
“기윤기?”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낯선 남자의 이름에 재혁의 눈동자에 노기가 돌았다.
그러다 이내 멈칫했다.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데.
“다친 데는 없으십니까?”
“으응…….”
“당신 뭐야, 이거 안 놔?!”
재혁이 윤기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별 타격 없다는 듯 그를 슥 훑은 윤기가 시호에게로 몸을 돌렸다.
“정말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벌써 30분이 지났어?”
“……10분 정도 남았습니다.”
윤기가 조금의 여백을 두고 말했다. 남은 10분조차 기다릴 수 없다는 듯 자리를 박차고 나온 것처럼 보여서, 시호는 때 없이 설렜다.
재혁에게서 자신을 보호하려는 듯 든든히 막아선 그의 뒷모습을 보는 순간 무척 안심이 되었다.
그의 시선이 시호의 손목에 닿자마자 더욱 차갑게 굳어졌다. 그녀는 괜찮다는 듯이 그의 단단한 팔을 살짝 두드렸다.
“당신 누구야. 뭔데 날 막아!”
여전히 시호의 앞을 막아선 채 윤기가 몸을 반쯤 돌려 재혁을 보았다.
윤기와 시선이 마주치자 재혁의 미간이 설핏 꿈틀거렸다.
사냥하기 직전, 몸을 한껏 낮춘 검은 맹수 같은 분위기를 내뿜는 남자였다.
자신에게 달려들지 않는 건 오로지 시호가 원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기운이 강하게 느껴졌다.
‘왠지 낯이 익어.’
눈을 가늘게 뜨던 재혁이 아! 하며 손으로 윤기를 가리켰다.
“설마, 우이고 기윤기 선수?”
윤기는 침묵하며 그를 싸늘히 응시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어디서 많이 봤다 했더니…….”
재혁도 한때 검도를 했었다. 취미였지만 꽤 애정을 가졌었다.
검도를 하는 사람이라면 ‘천재형 선수 기윤기’를 모를 수가 없었다.
당연히 재혁도 그를 알았으나 윤기가 고등학생이던 때까지만 기억했다.
스물넷, 본격적으로 경영 수업을 받으며 자연스레 검도와 멀어졌던 당시 시호는 스물하나였고 윤기는 열아홉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입사한 후에는 시호의 경기 장면만 챙겨 보았기에, 윤기가 성인이 된 모습을 보는 것은 지금이 처음이다.
고등학생일 때의 모습이 희미하게 남아 있기는 하지만, 그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체격은 더 커졌고 압도적인 위압감은 더 강해졌다.
언젠가 시호를 보러 갔다가 그의 경기를 직관한 적이 있었는데, 재혁은 그때 받았던 느낌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호면 너머로도 그의 눈빛이 얼마나 살벌하고 집요한지가 느껴졌다.
틈이 보이지 않으면, 상대를 몰아붙여 자신이 틈을 만들었다.
눈이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빠른 속도와 강한 타격감, 짐승이 포효하는 것 같은 기합 소리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고등학생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의 경기를 펼친 후에도, 아무런 동요 없이 묵묵히 다음 경기를 준비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때도 내뿜는 카리스마가 엄청났는데.
지금은 그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성장했다.
“기 선수가 어떻게 여기에?”
재혁의 말에 시호가 눈썹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예전에는 자신이 우이고를 졸업한 연도와 기수까지 외우던 사람이었다.
우이고등학교는 검도로 유명했고, 재혁은 검도부 주장이었던 시호를 자랑스레 여겼다.
그랬던 사람이 지금은 스스로 ‘우이고’라고까지 말했으면서 자신과 윤기의 연결 고리조차 생각지 못한다.
그러면서 사랑한다 부르짖으니.
우습기 짝이 없었다.
사랑하는데 무관심할 수는 없다.
“왜 우리 시호 옆에…….”
얼음판처럼 팽팽하던 윤기의 얼굴에 깊은 균열이 생겼다.
“우리 시호…….”
낮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살벌하게 들렸다.
“그만 묻고 제발 가. 곽 비서님도 기다리시잖아.”
이리로 서서히 다가오던 곽 비서가 시호의 말에 움찔거리다, 재혁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저, 이사님. 두원물산 최태주 대표님과의 미팅 시간에 맞추려면 이제 그만 출발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만.”
“기윤기 선수가 왜 여기에 있냐니까?”
윤기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럴 때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것에 울컥 화가 치밀었다.
하나 함부로 입을 열 수도 없었다. 혹여 시호에게 피해가 갈 수도 있기에.
“윤기 내 후배야. 당신은 기억도 못 하겠지만.”
그제야 재혁은 시호가 우이고 검도부였다는 사실을 제대로 기억해 냈으나, 여전히 표정은 펴지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의 기류가 단순한 선후배 사이의 그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입을 열어 확인할 용기는 생기지 않았다.
그들의 대답이 두려웠다. 대답을 듣고 나면 시호와의 사이를 영영 되돌릴 수 없을 것 같았다.
재혁은 제 마음이 편한 쪽을 택했다.
“곽 비서, 가지.”
시호와, 그녀의 앞을 막아선 윤기를 스쳐 지난 재혁은 입술 안쪽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 그럼.”
시호에게 고개를 숙인 곽 비서가 재혁의 뒤를 따랐다.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기 선수.”
문을 나가기 직전 멈춰 선 재혁이 고개를 반쯤 돌리고 말했다.
“좋지 못한 모습을 보였지만 시호를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말아 주세요. 다 내 잘못이니까.”
그대로 나가려는데.
“이상하게 안 봅니다.”
윤기의 낮은 음성에 재혁이 우뚝 멈춰 섰다.
“이성으로 봅니다.”
모두의 숨이 멈췄다.
숨을 멈추게 한 사람은 빼고.
재혁과 윤기의 눈이 맞부딪쳤다.
“그러니 괜한 걱정 말고 돌아가십시오.”
시호는 떨리는 심장을 느끼며 손으로 가슴께를 꾹 눌렀다.
뭐, 뭐라는 거야, 기윤기. 사람 놀라게 정말…….
볼이 붉어지는 시호를 보며 재혁은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도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의 것을 빼앗겼다는 상실감과 분노가 더욱 컸기에.
“……다음에 봅시다. 기회가 되면.”
곽 비서와 재혁이 나간 후.
마치 태풍이 휘몰아치고 간 자리에 남은 정적처럼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안 좋은 꼴 보였네.”
여전히 두근거리는 심장을 꾹 누르며 시호가 짐짓 태연한 척 말을 꺼냈다.
“술이 완전히 안 깼나 봐. 저런 모습은 나도 처음 봐.”
괜히 머리를 쓸어 올렸다가, 목덜미를 감싸도 보았다.
“미안해. 신경 쓰이게 해서.”
침묵.
윤기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은 채 말없이 자신을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어쩌지? 화가 많이 났나? 구토를 하든지 말든지 빨리 내보냈어야 했나…….
길어지는 침묵에 시호의 고개가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나 같아도 기분 나쁠 거라 생각해. 내가 부른 건 아니지만, 어찌 됐든 어제…… 그렇게 헤어지고 나서 다른 사람하고 있었으니까.”
변명의 여지가 없다.
윤기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섣부르게 고백한 것을 후회하고 있을까? 아니면 혹…… 계약을 철회할 마음을 먹고 있을까.
어느 쪽이든 시호에겐 쓰린 결정이었다.
“선배.”
올 것이 왔구나. 입가에 힘을 주며 시호는 고개를 들었다.
의연히 받아들이자. 사실, 여기까지 온 것만도 기적이었잖아.
무려 기윤기에게 계약을 다 권해 보다니. 출발 직전 만난 행운이었다고 생각하자고.
“위로해 주십시오.”
“네 결정이 그렇다면…… 응?”
이상하네. 왜 이 애와 있으면 청력이 안 좋아지는 기분일까.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안겨도 됩니까?”
제대로 들은 게 맞나 보다. 갈망에 젖은 윤기의 눈동자를 보니.
“제가 위로가 필요한 상태라. 그런데 선배밖에는 못 하는 일이라서.”
그가 한 걸음 다가왔다. 아슬아슬하게 몸과 몸이 맞닿기 일보 직전이었다.
“안 해 주실 겁니까?”
불가능한 일이다. 이렇게 큰 사람이 어떻게 제 품에 안기나.
“무리야. 너 너무 커.”
윤기가 재혁의 손이 닿을 뻔했던 시호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붙잡고 눈으로 허락을 구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윤기는 가는 손목을 끌어 제 목에 두르게 하고 여린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이건 내가 안긴 것 같은데.”
윤기는 대답 없이 팔로 그녀의 허리를 감아 제게로 바싹 당겼다.
시원하고 포근한 향기가 자신의 몸을 휘감는 느낌에, 불안하게 뛰던 시호의 가슴이 조금씩 안정되었다.
망설이던 그녀는 천천히 손을 들어 딱딱하고 너른 등을 감쌌다.
윤기의 몸이 움찔하더니 이내 시호를 더 꽉 끌어안았다.
분명 자신이 안겨 있는데, 어쩐지 윤기를 안아 주고 있는 듯했다.
“불안했습니다. 늦은 걸까 봐.”
귓가에서 바로 들려오는 나직한 음성에 시호는 그의 옷자락을 세게 쥐었다.
상황에 맞지 않게 성적인 긴장감이 흘렀다. 드디어 내가 이상해진 걸까.
“말을 번복한 적은 없었는데. 기다리기 힘듭니다.”
강인하고 굵은 음성은 작은 투정조차 야릇하게 느껴지게 했다.
“선배와 어떤 사이냐고 물었을 때.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던 순간처럼 제 스스로가 무능하게 느껴진 적은.”
없었습니다, 라고 말할 줄 알았는데 이어지는 윤기의 말은 다른 것이었다.
“이번이 두 번째입니다.”
“네가 스스로 무능하다고 느낄 때도 있어?”
의외네. 뭐 하나 빠질 것 없는 사람이. 도대체 언제…….
“선배의 결혼 소식을 들었을 때. 그리고 지금입니다.”
시호는 뭐라도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목소리가 목구멍 안에서만 뱅뱅 맴돌았다.
“안아 주고 안기는 것이 당연한 사이가 되고 싶습니다.”
윤기는 시호의 머리카락을 느릿하게 손가락에 휘감았다.
그녀에게는 자신이 성급히 다가오는 것처럼 느껴질 것임을 안다.
그러나 실은 10년이 넘도록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같은 속도로 달려온 끝에 간신히 오늘에 다다른 것이다.
시호의 입장에서 생각하자고 다짐을 해 봐도, 그녀를 보면 조바심이 일고 만다.
눈에 보이지 않을 때보다 손에 닿는 지금이 훨씬 더 불안하고 초조했다.
달콤함을 한 번이라도 맛본 순간, 그것을 몰랐던 때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절대로 빼앗기지 않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