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화.
시호가 조용히 하라는 듯 재혁을 흘겨보았다.
“어제도 밥을 같이 먹었다고? 아, 민주 씨야?”
- 선배.
윤기가 다시 그녀를 불렀다.
방금보다 더 가라앉아 있는 음성. 아무래도 재혁의 목소리를 들은 듯하다.
“예전에 좀 알던 사람이랑 있어. 15분 후에 갈게. 이따 봐.”
시호는 우선 전화를 끊었다.
재혁의 반응이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뭐? 예전에 좀 알던 사람? 서시호, 너 어떻게 나를 그렇게 말할 수가 있어?”
재혁이 목소리를 높였다.
“딱히 틀린 말도 아니잖아.”
“민주 씨 아니구나. 그렇지, 민주 씨는 나 알잖아. 누구야? 누군데 이틀 연속으로 만나서 밥을 먹어?”
시호는 재혁의 말을 무시하고는 다시 휴대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곽 비서님, 어디쯤 오셨어요?”
재혁은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곽 비서가 왜 나와?
- 40분 후쯤 도착할 것 같습니다, 사모님.
“그렇군요. 제 전화 끊은 이후로는 재혁 씨와 통화하세요. 근처 카페에 있겠다네요.”
“내가 언제 카페에 있겠다고……!”
“그리고 다시는 통화할 일 없을 거라 생각해서 말씀 안 드리려고 했는데. 저 이제 사모님 아닙니다.”
- 아…….
“그럼 끊겠습니다. 고생 많으셨어요.”
휴대폰을 후드 티 주머니에 넣은 시호가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던 봉투에서 숙취 해소제를 꺼내 놓았다.
“나 나갈 거야.”
“어디 가는데.”
“알려 줄 의무 없어. 이거 가지고 가.”
“하. 이 집에 나 혼자 있으라고?”
“미쳤어?”
시호에게서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험한 말에 재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주인도 없는 집에서 혼자 뭐 하려고? 빨리 나와. 단지 앞에 카페 있으니까 거기서 곽 비서님 기다려. 40분 후에 오신대.”
그 전에도 애교가 많거나 나긋나긋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차가운 사람도 아니었다.
시호에게 지금 자신은 그저 ‘예전에 좀 알던 사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듯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어떻게.
나는 여전히 널 그리며 잠이 들고 깨는데.
“시호야, 정 떼려고 일부러 이러는 거라면, 그러지 마.”
“일부러 뗄 정도 없어.”
담담한 시호의 목소리에 갑자기 울컥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재혁은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놔.”
“내 얼굴 똑바로 보고 얘기해.”
“놓으라고 했어.”
대련 상대를 보는 듯 시호의 눈빛은 싸늘했다. 다정과 애정은 찾아볼 수 없는 아내의 시선에 입술을 깨문 재혁은 슬그머니 손목을 놓았다.
“……아프게 해서 미안.”
“아픈 게 아니라 불쾌해. 상대방 동의 없이 신체 접촉하지 마.”
하아. 피곤하다는 듯 시호가 한숨을 내쉬었다.
“재혁 씨, 우리 이제 남남이야. 아무런 상관도 없는 타인이라고. 이혼했으면 각자 갈 길 가자.”
“남남? 그래, 말 잘했어. 나 설명도, 이해도 부족한 상태에서 도장 찍었다. 네가 답답하다니까, 이혼 안 해 주면 네가 죽겠다니까!”
“…….”
“부모님도 노발대발하시고, 하루라도 빨리 이혼 안 하면 양쪽에서 다 죽겠다고 난리를 피우니까 우선 찍은 거야.”
시호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다 나왔다.
이야, 이혼한 사유 중에 어이없는 거로는 어디에서도 지지 않겠네.
“네 숨통부터 틔워 주는 게 우선이라 생각했어. 네가 시들어 가는 꼴은 못 보겠으니까. 그만큼 내가 너를 사랑하니까.”
소모적인 논쟁을 시작하면 15분은 금방 지나갈 것이다. 시계를 본 시호는 봉투를 들고 현관으로 향했다.
“서시호, 지금 나 말하고 있잖아!”
“이혼한 전처를 너무 사랑하지만 성욕을 이길 수는 없었나 봐.”
재혁이 미간을 찌푸렸다.
“내 숨통을 틔워 주려는 게 아니라 본인 숨통을 틔우려고 한 거겠지.”
“그게 무슨 말이야?”
“다른 여자랑 관계 시도했는데 안 됐다면서.”
차 키가 어디 있더라. 여기 있네. 밥 먹고 공사 현장 가서 살펴봐야겠다. 수전 교체 논의도 해야 하고.
“그, 그게 무슨……! 곽 비서야? 곽 비서가 그래?”
“아니. 어제 당신 입으로 직접.”
차 키도 후드 티 주머니에 넣은 시호는 신발을 신고 재혁을 돌아봤다.
“계속 그렇게 넋 놓고 있을 거야? 나 나가야 돼. 약속 시간 다 됐어.”
핏기가 사라진 재혁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보였다. 이내 그는 손으로 입을 막았다.
숙취에 약한 사람이 아침부터 목소리를 높였으니 오죽할까.
“시호야, 나 속이…….”
하아. 정말 가지가지 한다.
“저 문이 화장실이야.”
재혁은 화장실 문을 열자마자 변기에 쓰러지듯 엎드려 구토하기 시작했다.
“욱, 우욱…….”
인생이 어디 내 맘대로 흘러간 적이 있던가. 정중동. 동중정.
심호흡한 시호는 봉투를 현관에 내려놓고 다시 안으로 들어와 냉장고에서 생수병을 꺼냈다.
“물 마시고 숙취 해소제 마셔. 내가 줄 수 있는 건 이거뿐이야.”
입을 헹구고 손을 씻고 나온 재혁의 안색이 창백했다. 요즘 제대로 쉰 적이 없다더니 거짓말은 아닌가 보다.
저 상태로는 카페에서 버티기 힘들 테다. 이대로 내쫓기에는…… 한 올의 양심이 걸렸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사람을 도와주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하물며 4년을 한집에 살았던 전남편이니.
시호가 물을 건네자 얌전히 받아 마신 재혁은 다시 그녀가 건네는 숙취 해소제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뭐 해? 안 받고.”
“……당신밖에 없다. 고마워.”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도리일 뿐이야. 마시고 소파에 좀 누워 있어.”
숙취 해소제를 단번에 비운 재혁은 비틀거리며 소파로 향했고, 이내 옆으로 털썩 드러누워 숨을 가쁘게 내쉬었다.
그를 말없이 보던 시호는 서재로 들어가 윤기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딱 한 번 울렸는데 목소리가 들렸다.
- 전화하려던 참이었습니다. 거의 다 왔는데, 지금 내려오시겠습니까?
“윤기야, 미안한데 나 30분 정도 후에 가도 될까?”
잠깐의 정적.
그리고 숨처럼 낮은 목소리.
- ……그 사람입니까?
시호는 입술을 안으로 말았다. 그러다 이내 결심한 듯 말했다.
“응. 어젯밤에 술 취해서 비몽사몽한 채로 찾아왔더라. 시간도 너무 늦고, 데리고 갈 사람도 없어서 소파에서 재웠어.”
윤기의 침묵이 길어졌다.
시호의 불안도 점점 커졌다.
아무리 그래도 바로 어제까지 키스한 여자가 전남편을 제 집에서 재워 줬다면.
‘당연히 기분 나쁘겠지.’
자신의 의사가 전혀 반영되지 않은 상황이나, 어쨌든 사실이므로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그렇게 단두대에 목을 내맡긴 심정으로 기다리고 있는데.
- 30분이면 되겠습니까?
단비처럼 내린 윤기의 목소리가 메말라 있던 시호를 적셨다.
- 정확히 30분 후에 올라가겠습니다.
“아냐. 내가 내려가면 돼.”
- 데리러 가겠습니다.
물러서지 않겠단 듯 단단한 음성에 시호는 가슴께를 꼭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30분 후에 봐.”
- 선배.
전화를 끊으려는데.
- 흔들려도 상관없습니다.
그의 말이 심장을 뒤흔들었다.
- 내가 꽉 붙잡으면 되니까.
“…….”
- 자신 있습니다. 그러니 흔들려도 발을 떼지만 말아요. 기다리고 있으면 반드시 데리러 갈 테니.
시간이 멈추는 것 같다는 게 바로 이런 걸까. 귓가를 파고든 윤기의 음성에 온몸이 녹는 듯하다.
겨우 하루 만에 제 마음을 점령하고야 만 건방진 후배가 무척 보고 싶어졌다.
“……운전 조심해서 와.”
그녀의 대답에 윤기가 곧장 예, 하고 답했다.
통화를 마친 시호는 소란스레 들끓는 마음을 간신히 진정시키고 거실로 나갔다.
소파에 누워 손등으로 눈을 가리고 있던 재혁이 그녀가 나오는 기척에 움찔하며 일어섰다.
“재혁 씨.”
“……응.”
“다신 이렇게 불쑥 찾아오지 마.”
대답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무는 재혁이 어린애처럼 보였다.
“손안에 있을 땐 거들떠도 안 보다가 손을 떠나니까 아쉽게 느껴지는 그거. 난 당신한테 사랑이 아니라 계륵이야.”
“내가 다른 여자랑 자려고 해서 이래? 응? 그래서 화난 거야?”
전남편은 말이 통하지 않았다. 전에도 이렇게 어린애처럼 굴었던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술이 덜 깼거나, 원래 이랬는데 제가 몰랐던 거거나. 둘 중 하나였다. 어쨌거나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당신이 다른 여자를 만나서 뭘 하든 상관없어.”
이젠 입이 다 아플 지경이다. 시호는 그에게 일일이 반응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윤기를 떠올렸다.
당분간 요리를 하지 않기로 했던 결심을 철회하고 아침에 일어나 식재료를 좀 샀다.
대접을 받았으니 보답을 해야지.
이왕 슈퍼에 간 김에 숙취 해소제도 산 거였다. 재혁이 빨리 정신을 차려야 빨리 내보낼 수 있으니까.
이 정도는 해 줄 수 있었다.
딱 이 정도만.
‘배추된장국 좋아하려나.’
어제 윤기가 차려 준 음식들은 하나같이 맛있었다. 웬만큼 잘 만들지 않으면 괜히 민폐만 될 것 같은데.
시호는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리며 다시 한 번 제가 사 온 식재료들을 살폈다.
그런 그녀를 보는 재혁의 속은 복잡했다.
왠지 시호가 설레 보인다.
볼이 연하게 물들었고 눈가가 살짝 접혔다.
저런 얼굴을 도대체 얼마 만에 본 건지.
‘……4년 전 신혼여행이 마지막이었던 것 같은데.’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무심했었는지를 깨달았다.
시호가 티를 내지 않아서 괜찮다고만 생각했다. 재미는 없지만, 안정적인 생활을 꾸려 간다고 여겼는데.
며느리와 잘 지낸다는 부모님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일에 집중했다.
회사는 키웠지만 사랑은 시들었다.
내 사랑은 시들었는데, 시호의 사랑은 이제 막 시작되는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시호는 누구를 만나는 걸까.
어제도, 오늘도 함께 밥을 먹을 사람이 누굴까. 그녀는 식사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
‘……남자일까?’
시호가 다른 남자를 만나는 상상을 하자 숨통이 꽉 조여 왔다.
차가워진 손끝을 안으로 말아 쥐며 재혁이 무거운 입을 열었다.
“혹시 남자 생겼니?”
배추된장국 시뮬레이션을 끝내고, 집들이 선물로 뭘 사 줘야 하나 생각하던 시호의 얼굴이 굳었다.
“하. 질문 참 불쾌하다. 선 넘지 마.”
“그런 거야? 너 남자 생겼어?”
“그러든 아니든 당신하고는 상관없어.”
“왜 상관이 없어, 나는 네……!”
딩동.
때맞춰 초인종이 울렸다. 화면을 보니 곽 비서였다.
재혁은 화를 삭이려는 듯 후우, 하고 긴 숨을 내쉬었고, 시호는 그런 그를 지나쳐 문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사…….”
‘사모님’이라고 말하려던 곽 비서는 머쓱하게 입을 닫았다.
“오랜만이에요. 일찍 오셨네요.”
“예, 최대한 빨리 마무리하고 올라왔습니다. 전무님은 어디에……?”
현관에서는 거실이 바로 보이지 않았다. 시호는 곽 비서에게 잠깐 서 있으라 말하고 재혁에게 향했다.
“이제 가.”
“아직 얘기 안 끝났어.”
“그래서. 안 가겠다고? 정말 경찰에 신고해?”
“서시호!”
재혁이 큰 소리를 내자 곽 비서가 놀라 눈을 크게 뜨며 현관 안으로 성큼 들어갔다.
차마 신발을 벗고 들어가지는 못하고, 팔을 뻗어 문을 붙잡은 다음 목을 쭉 빼서 상황을 살피려 애썼다.
재혁은 이따금 어린아이처럼 고집을 피울 때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여유롭고 온화한 성향이라 소리를 치거나 격하게 화를 내지 않았다.
그런데 이혼을 한 후부턴 별것도 아닌 일에 짜증이 늘었다.
“심각한 상황인가? 이거 안으로 들어가 봐야 하나…….”
중얼거리며 곽 비서가 천천히 문을 닫는데 누군가 턱 붙잡았다.
깜짝 놀라 뒤를 도니 커다랗고 압도적인 체격과 눈빛을 지닌 남자가 차갑게 노려보고 있었다.
“당신 뭡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