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화
연교시청 체육관이 수도 시설 문제로 급작스럽게 공사에 들어가서, 선수단은 아쉬운 대로 구청 체육관을 대관했다.
그것도 오후 2시까지만 가능해서, 본의 아니게 휴가를 얻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1차 대련이 끝나고 잠시 쉬는 시간.
물을 마시던 윤기의 곁으로 슥 다가온 태홍이 눈을 가늘게 뜨고 수상쩍다는 듯 보았다.
“어이. 기윤기.”
“……왜.”
“너 무슨 일 있지.”
윤기는 대답 없이 다시 물을 한 컵 받아 마셨다.
“평소에도 앞뒤 안 가리고 전력을 다하긴 했는데 오늘은 뭐랄까…….”
태홍은 머리를 긁적였다.
시간이 흘렀다고는 하지만 윤기의 앞에서 시호의 이름을 꺼내는 것은 여전히 조심스러웠다.
오늘의 윤기는 몇 년 전 시호의 결혼 소식을 들었을 때와 비슷했다.
정제되지 않은 거친 움직임은 맹렬하고 격렬했다.
상대에게도, 그리고 스스로에게도 무언가를 떠올릴 겨를을 요만큼도 주지 않겠다는 듯.
검도는 정중동(靜中動), 동중정(動中靜)의 무예다.
표면적으로는 조용하지만 속으로는 부단히 상대의 움직임을 읽고, 또한 겉으로 강하게 대치하는 듯하면서 내면으로는 조화를 추구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거세게 몰아붙이기만 하는 운동이 아니었다.
상대와 시선을 맞추고 호흡을 맞추며, 순간 흐트러지는 틈을 놓치지 않는다.
누구보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윤기가 흐트러진 적이 딱 두 번이었다.
그날.
그리고 오늘.
윤기는 태홍과 함께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배웠던 ‘30분 습관’을 그대로 이어 오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훈련을 하기 전, 아침에 20분은 스트레칭을 하고, 10분은 눈을 감고 명상으로 정신 수양을 하고 호흡을 다스린다.
그렇게 길러진 집중력과 판단력을 기반으로,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계속되는 훈련에도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 언제나 일정한 강도와 주기를 유지하며 스스로 컨디션을 조절했다.
때문에 저렇게 몸을 혹사하다시피 운동을 하는 것은 무척이나 드물었고, 원인은 하나뿐이었다.
‘혹시 시호 선배에 대해서 뭐 들은 거 있나?’
태홍이 머뭇거리는 사이, 윤기는 컵을 내려놓고 타월로 대강 땀을 닦았다.
그리고 다시 죽도를 잡았다.
윤기는 쉬지 않고 타격대를 가격했다.
“야, 기윤기 뭐야? 왜 저래?”
화장실에 다녀온 수원이 묻자 태홍이 어깨를 으쓱했다.
“낸들 아냐.”
“1초라도 쉬면 몸 썩는 병 걸린 것 같은데? 아까 대련하다가 팔 부러지는 줄 알았다. 새끼, 숨 돌릴 틈도 안 주던데.”
확실히 오늘 기윤기는 이상하다.
말을 걸어도 대꾸도 안 하고.
표정은 내내 굳어 있고.
“야. 혹시…….”
수원이 말끝을 흐리자 태홍이 눈을 크게 떴다.
“야, 너두? 야, 나두.”
“4년 전 에스 결혼 때랑.”
“똑같아. 완전히.”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며 손뼉을 짝 쳤다.
“저놈도 짝사랑 지독하다, 진짜.”
태홍과 수원은 초등학생일 때부터 함께한 사이로 모두 우이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우이고 검도부 놈들 중엔 시호를 좋아하지 않은 사람이 드물었다. 태홍과 수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사랑이라기보다는 동경에 더 가까웠다.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데도, 시호는 ‘선배’라는 말에 걸맞은 위엄과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었다.
더욱이 그들이 신입생으로 입부했을 때 시호는 주장이었으므로, 그녀가 더욱 크게 느껴졌다.
하지만 시호가 졸업하고 그들도 대학생이 되었을 때, 다들 짝사랑을 끝내고 각자 연애를 시작했다.
게다가 발목 부상을 당한 후. 시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검도부와 연락을 끊어 버렸다.
누구도 그녀와 연락이 되는 사람이 없었다. 존경하는 선배가 저희를 버렸다는 배신감과 분노에 모두 치를 떨며 그들도 시호를 끊어 냈다.
한 사람만 빼고. 그게 윤기였다.
어떻게든 시호에게 연락을 시도하려 했지만 닿지 않았다.
시간이 지난 후.
군 복무 중 시호의 결혼 소식을 들은 윤기는 제대한 순간부터 미친 듯이 운동에 집중했다.
국내 대회란 대회는 죄다 휩쓸어 공중파와 인터뷰도 하고, 체육관 앞에 팬이라는 사람들이 꽃다발과 몸에 좋다는 온갖 음식을 들고 몰려온 적도 있었다.
하지만 윤기는 감흥 없다는 듯 무심한 낯이었다.
주변에서 난리를 쳐 대도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다는 듯, 오로지 연습 또 연습이었다.
그래도 저희가 농담을 건네면 픽 웃기는 했던 녀석이 그날을 기점으로 바뀌었다.
의젓한 대형견에서, 고독함을 알아 버린 늑대가 되어 버렸다고나 할까.
“뭐 들은 거 있나?”
“그러게. 근데 저 자식 앞에서 에스 이름을 꺼낼 수가 있어야지.”
그들은 시호를 ‘에스(S)’로 칭했다.
그들 사이에선 거의 해리포터의 ‘볼드모트’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이름을 입에 담는 것조차 꺼려질 정도로 잔악하고 무도한 배신자였다. 그만큼 시호의 존재감이 컸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은 그런 마음이 많이 풀어졌다.
그땐 워낙 어렸고, 검도부가 인간관계의 전부였던 시절이었다.
그 울타리를 벗어나면 낙오자, 아니면 배신자인 줄 알았다.
“아직도 에스 좋아하는 거지? 저 자식.”
“그렇지. 안 그럼 자기 좋다는 애들 다 마다하고, 저 외모 저 스펙에 혼자일 리가 없지.”
“뭐 들은 거라도 있나? 결혼 소식 들었을 때 저렇게 홱 돌았었으니까, 이번엔 뭐 이혼 소식이라도 들었나.”
태홍과 수원은 서로 마주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설마?”
“근데 왜 저래. 좋아해야 하는 거 아냐?”
“음……. 아, 그거지. ‘내가 어떤 심정으로 널 보냈는데…… 행복하게 살아도 모자랄 판에 그렇게 아픈 결말을 맞이해?’ 뭐 이런 거 아닐까.”
“너 요즘 소설 쓰냐?”
“요새 저녁에 엄마랑 일일드라마를 같이 봤더니. 그새 일취월장했네. 들어는 봤나? 사블인블.”
“그게 뭐야? 제목 요상하네.”
“사랑은 테러블, 인생은 호러블.”
“듣기만 해도 세상 끝장나는 것 같다, 야.”
농담도 잠시, 그들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윤기를 보았다.
뭐에 쫓기는 듯, 혹은 뭐를 쫓는 듯 다급하고 갈급한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았다.
“집합!”
감독의 말에 쉬고 있던 선수들이 일어나 자신을 정비하고 다시 모여 일렬로 섰다.
“로테이션으로 돈다. 시계 반대 방향으로.”
태홍이 윽, 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첫 타부터 기윤기랑 대련이라니.
이러다 오늘 실신하는 거 아냐?
“야, 긴기. 너 혼자만 뭐 첩보 들은 거 있냐? 내일 국가대표 선발전이 돌발적으로 열리기라도 한대?”
윤기는 대꾸하지 않고 태홍의 맞은편으로 걸어가 정좌하고 앉았다.
면수건을 반듯이 접어 머리에 쓰고 그 위로 호면을 뒤집어쓴 윤기의 눈빛은 살벌할 정도로 번뜩였다.
‘긴장을 늦추면 안 돼.’
조금이라도 틈을 주면, 간밤 시호와의 키스가 떠올라 말 그대로 딱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호면의 끈을 꽉 잡아당겨 묶는 윤기의 손등에 굵은 핏줄이 팟 솟았다.
어젯밤 이 손으로 그녀를 어루만졌다. 가는 허리를 감싸며 위아래로 매만지면 마치 도자기를 빚는 듯 유려한 곡선이 그려졌다.
시호는 백자 같았다.
희고 깨끗하며 굽이친 곡선이 가려(佳麗)하였고, 청아함 속에선 은근한 매혹이 천박하지 않게 흘렀다.
전부터 아름답다고 늘 생각했었다.
‘젠장.’
윤기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를 떠올리니 몸이 반응하려 했다.
얼른 호면의 끈을 매듭짓고 일어난 그는 세 걸음 앞으로 나가, 아직 호면을 쓰고 있는 태홍의 앞에 재촉하듯 버티고 섰다.
‘저 새끼가 오늘 왜 저래, 진짜?’
그들과 멀리 떨어져 선 수원도 이쪽을 보았다.
아무래도 오늘 윤기가 이상하다.
정말로 안 좋은 소식이라도 들은 것일까?
어쩌면 시호의 결혼 소식을 들었을 때보다 증세가 더 심한 듯했다.
오늘 오후 출근해서 지금껏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계속해서, 뛰거나 휘두르거나 그도 아니면 뛰면서 휘둘렀다.
그리고 단 한마디도 섞지 않았다.
저렇게 무서운 눈빛으로 말이지.
‘뭔가 터질 것 같은데.’
끝나고 술이라도 한잔 하자고 할까? 목 축이는 정도로만 가볍게.
하지만 받아들이지 않을 것 같다.
차갑게 얼어붙은 눈동자엔 언뜻언뜻 초조한 기색이 비쳤기 때문이다.
집에 꿀단지라도 숨겨 놨나.
‘흐음, 오랜만에 긴기 집이나 쳐들어갈까?’
***
“긴기, 우리 점심에 냉면 때리고 너네 집 가서 놀다가 저녁 먹으면서 맥주 500밀리 셋이 나눠 먹…….”
“간다.”
훈련이 끝나자마자, 미처 말을 붙이기도 전에 윤기는 쌩하니 그들을 지나쳤다.
“저 새끼 오늘 처음 말한 거지?”
“그래. 그게 무려 ‘간다’ 두 글자나 되시겠다.”
어이없다는 친구들을 뒤로하고 나선 윤기는 정말 뭐에 쫓기는, 혹은 뭐를 쫓는 이처럼 다급하게 움직였다.
설렘과 흥분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녀의 집이 자신과 같은 아파트, 그것도 윗집이란 것에, 돌아가면 시호를 볼 수 있단 현실에, 오늘 그녀와 하루 종일 지낼 수 있단 생각에…….
스포츠 브랜드의 로고가 크게 박힌 더플백을 모로 멘 윤기는 근처 대형 마트에 들어가 곧장 카트를 끌고 생각했던 재료를 빠르게 담기 시작했다.
시호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몰라서, 일단 가장 자신 있는 요리를 해 줄 생각이었다.
바로 냉이된장국.
지금껏 실패한 적이 없는 그 메뉴는, 봄만 되면 태홍과 수원이 윤기의 집으로 그토록 쳐들어오려는 이유 중 하나였다.
‘선배가 좋아하려나.’
냉이도 손질해야 하고, 밥도 지어야 하고. 아, 냉이무침도 해 줘야겠다.
대학 때는 기숙사에 있었고, 졸업하고 나서는 줄곧 혼자 살았던 윤기는 웬만한 요리는 다 만들었다.
어찌 보면 시호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고등학교 때 지역 방송에서 검도부 취재를 온 적이 있었는데, 그때 어떤 음식을 가장 좋아하느냐는 리포터의 질문에 그녀가 ‘집밥’이라고 대답했었다.
그때부터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집에서 가사를 도와주시는 이모님께 요리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아이스크림과 과자도 샀다. 시호가 은근히 군것질을 좋아한다는 것을 윤기는 알고 있었다.
훈련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 종종 학교 앞 문구점에 들러 이런저런 주전부리를 사 가던 것을 보았었다.
그때 그녀의 얼굴에 떠올랐던 행복한 미소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지나치게 귀여운 모습에 그대로 심장을 부여잡고 한참을 서 있었었다.
계산을 끝마친 윤기는 차에 타자마자 시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 안녕. 좋은 오후.
시호의 목소리에 가슴이 뻐근해졌다.
“잘 주무셨습니까?”
- 음, 뭐. 그럭저럭.
윤기가 반듯한 미간을 좁혔다.
“나쁜 꿈이라도 꾸셨습니까?”
- 나쁜 꿈…… 아니. 안 꿨어.
시호의 말 사이의 공백이 신경 쓰였다. 아직 적응하지 못해서 잠자리가 불편하기라도 했던 건가.
자신이 옆에서 챙겨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불편하지 않도록 하나부터 열까지 세심히 살필 자신이 있는데.
“지금 운동 끝나고 집으로 가고 있습니다.”
- 고생 많았어. 생각보다 일찍 끝났네. 체육관 공사한다면서 어디서 했어?
“구청 체육관 오전 대여가 가능하다고 해서 그곳에 있었습니다.”
- 그랬구나. 몇 분이나 걸려?
“15분 후면 도착할 것 같습니다.”
오늘따라 신호도 잘 받아서 쾌속 질주를 하던 중이었다.
- 밥, 같이 먹는 거지?
시호의 물음에 마음 한편이 따뜻해지다가 이내 뜨겁게 달아올랐다.
“먹고 싶은 음식 있으십니까? 제가 할 수 있는 거라면…….”
순간 윤기의 기민한 청각이 반응했다.
시호의 목소리 뒤로 희미하게 남자의 목소리가 겹쳐 들리는 듯했다.
- 난 어제 먹은 것도 괜찮아. 집밥, 되게 오랜만이었거든.
- 누구랑 통화하는 거야?
핸들을 쥔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손등에 핏줄이 불거졌다.
남자의 목소리가 보다 선명하게 들렸다.
“선배, 지금 누구와 같이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