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시호는 한숨을 쉬었다.
“많이 취했네.”
“나 안 취했어. 멀쩡하다고.”
재혁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시호는 일단 그를 부축하여 안으로 들어오게 해서 소파에 앉혔다.
“으…….”
“박 기사님 부를 동안 정신 차리고 있어.”
시호는 재혁의 운전기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박 기사를 왜 불러. 여기서 자고 갈 건데. 내 와이프랑 잘 거야.”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재혁은 비틀거리다가 다시 푹 주저앉았다.
시호는 고개를 내저었다.
“여보세요? 박 기사님, 저 서시호입니다. 잘 지내셨죠. 죄송하지만 재혁 씨 좀 부축해 주셔야겠어요. 영 정신을 못 차리네요.”
- 예에? 전무님, 어디에 계시는데요?
“함께 오신 거 아니었어요? 제 집인데요. 연교에 있는.”
- 연교요? 전무님이 연교까지 가셨습니까? 이번 주는 직접 운전하신다고 휴가를 주셨거든요. 지금 고향에 내려와 있는데, 이를 어쩌나.
이런. 어쩐다. 시호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 저어, 곽 비서님께 연락을 드려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알겠습니다. 밤에 죄송했어요.”
- 어이쿠! 아닙니다, 사모님.
여전히 자신을 사모님이라 부르는 박 기사의 말에 시호는 쓴웃음을 지었다.
전화를 끊은 그녀는 재혁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저 서시호입니다.”
- 예, 사모님. 어쩐 일로…….
“지금 재혁 씨가 저희 집에 와 있거든요. 만취해서 정신을 못 차리는데, 박 기사님은 휴가 중이시라고 하시네요.”
- 네, 이번 주는 직접 운전하시겠다고 하셔서요.
“혹시 지금 연교로 와 주실 수 있으실까요?”
곽 비서가 난감하다는 듯 말했다.
- 제가 전무님 지시로 현재 지방에 와 있습니다. 내일 오후에나 서울에 올라갈 듯한데.
“재혁 씨 데리고 갈 사람이 한 명도 없을까요?”
- 사모님, 정말 죄송하지만…… 하룻밤만 전무님을 재워 주실 수 없을까요? 요즘 진행하는 프로젝트가 하도 많아서 제대로 쉬신 적이 없으십니다.
비서는 재혁이 미리 일러둔 대로 답했다.
시호와 단둘이 있을 땐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데리러 오지 말고, 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어떻게든 둘러대라고 했었다.
- 무의식중에 가장 마음 편한 곳으로 가신 것 같은데, 죄송하지만 제가 내일 정오까지 모시러 가겠습니다.
“…….”
- 회사에도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전무님 없이는 돌아가지 않는 프로젝트들이라서……. 그렇게 조금이라도 쉬게 해 드리고 싶습니다.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사모님.
하아. 난감하네, 정말.
“곽 비서님, 전 더 이상 이 사람이 어떤 상황에 처했든 신경 써 줄 관계가 아닙니다.”
- 예, 잘 알고 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사모님. 앞으로 이런 일 없도록 제가 잘 보좌하겠습니다. 제가 지금 자리를 비우면 일정이 다 어그러져서 여태껏 진행했던 것이 모두 수포로…….
곽 비서는 거의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로 애타게 말했다.
시호는 넥타이를 풀기 위해 끙끙대는 재혁을 쳐다보다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는 이런 일 없었으면 합니다. 내일 되도록 빨리 와 주세요.”
-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사모님!
전화를 끊은 시호는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는 재혁에게 다가가 넥타이를 느슨히 풀어 주었다.
전부터 술에 취하면 넥타이를 못 풀어 안달이던 사람이다.
하아. 왜 이렇게 됐지.
방금까지 달콤한 솜사탕을 먹는 기분이었는데.
한순간에 사막으로 떨어진 기분이다.
그렇다고 이 늦은 밤, 전 시부모에게 전화를 걸어 아들을 데려가라 할 수도 없는 일.
재혁의 운전기사와 수행 비서 외에 시호가 알고 있는 직원의 번호는 없었다.
오늘은 이대로 재우고, 내일 아침에 확실히 못을 박자. 다시는 찾아오지 못하도록.
그와 다람쥐 쳇바퀴 돌듯 쉽사리 끝나지 않을 얘기를 할 생각을 하니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속이 답답해졌다.
‘곽 비서님을 비롯한 RS그룹의 수많은 직원들과 그 가족들의 생계를 구한다는 마음으로 참자.’
물이라도 한 잔 주려고 부엌으로 가려는데.
턱. 재혁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시호야.”
낮게 깔린 음성이 젖어 들었다.
“보고 싶었다.”
오늘 하루, 두 남자에게 같은 고백을 듣는다.
“우리 비록 이혼했지만. 서로가 싫어서가 아니잖아. 다만, 상황이 그렇게 만든 것뿐이지.”
주위 환경이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맞지만, 어쨌든 자신은 이혼을 요구했고 재혁은 동의했다.
시호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물 가져올게. 눈 감고 있어.”
손목을 빼내려는데 그대로 끌려갔다.
재혁은 시호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취해서 이러는 거 알겠는데. 그만 정신 차려. 우리 이제 남인데, 이런 행동 굉장히 위험해. 불쾌하고.”
“불쾌? 넌 내가 불쾌해?”
“응. 아주 많이.”
시호의 즉답에 재혁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지다 이내 힘없이 펴졌다.
“난 아직 너 사랑해.”
시호는 저도 모르게 하, 코웃음을 쳤다.
“철 지난 드라마도 아니고. 동영상으로 찍어서 RS그룹 홈페이지에 올리기 전에 입 다물고 쉬어.”
시호가 벗어나려 힘을 주었다. 그러나 술에 취한 남자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급소를 가격할 수도 없고.’
유단자는 폭력 행위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하던 감독님의 말을 떠올리며 그녀는 심호흡을 했다.
“한재혁 씨.”
“침대가 너무 크다, 시호야.”
너무 커. 네 빈자리가.
재혁이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자 늘 아내에게서 나던 그리운 향기가 맡아졌다.
시호가 쓰던 향수를 아무리 뿌려 보아도, 그녀의 체취와 뒤섞인 특유의 향기와는 달라서 짜증만 났었는데.
“진짜 당신 향기 난다.”
황홀과 슬픔이 뒤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린 재혁이 시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뭐 하는 거야!”
옥신각신한 끝에 시호가 재혁을 뿌리치고 일어났다.
그녀가 손으로 재혁의 입술이 닿았던 곳을 감싸고 숨을 가쁘게 내쉬었다.
윤기와 같은 말을 내뱉은 사람인데 참 다른 기분이다.
그 애와 있을 땐 속이 간지럽고 붕 뜨는 기분이었는데.
전남편과 함께 있는 지금은…… 두려웠다. 그 삭막했던 날들로 되돌아간 것 같아서.
“하고 싶어, 시호야.”
“……미쳤구나.”
“다른 여자랑 하려고 해 봤는데…… 네가 아니니까 안 되더라. 도저히 서질 않아. 안 믿기지. 나도 놀랐어.”
다른 사람과 시도는 했었구나.
어쩐지 기분이 오묘해진다.
뒤이어 허탈감이 덮쳐 왔다.
사람들은 재혁이 이혼한 지 하루가 됐든 한 달이 됐든, 그에게는 아무런 말도 못 한다.
RS그룹 자제이기 때문이다.
하나 자신은 이혼하고 시간이 지나더라도 조심, 또 조심해야 할 것이다.
자그마한 책을 잡혀도 RS그룹과 관련지어 생각할 테고, 가족에게도 불똥이 튈 것이기 때문이다.
저를 애원하듯 바라보는 재혁의 얼굴이 얄밉게 느껴졌다.
“얌전히 잠이나 자. 경찰에 신고하기 전에.”
“뭐? 경차알? 당신 지금 나 신고한다고 했어?”
“소리 낮춰. 정말 신고당해서 끌려가고 싶지 않으면.”
시호는 담요와 베개를 가져와 그의 옆에 놓아 주었다.
“재킷 벗고 자. 불편하다고 끙끙거리면서 사람 깨우지 말고.”
재혁은 이번에도 그녀를 붙잡으려 했지만, 시호는 쉽게 잡혀 주지 않았다.
“한 번만 더 내 몸에 함부로 손대기만 해. 유단자 윤리 생각해서 참는 것도 방금이 마지막이야.”
“유단자……? 응, 그래. 우리 시호 유단자였지. 엄청 멋있는 선수였지, 우리 와이프…….”
재혁이 옆으로 털썩 쓰러졌다.
그러고는 눈을 감고 얼마 안 있다 이내 색색거리며 잠이 들었다.
하. 시호는 어이가 없어 코웃음을 쳤다.
“가지가지 하네, 정말.”
그녀는 재혁의 머리 밑에 베개를 받쳐 주고 담요를 덮어 주었다.
그래도 4년간 같이 살았던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의리였다.
눈을 감고 있는 재혁의 모습은 참 오랜만에 본다.
결혼했을 땐 늘 자신만큼이나 일찍 일어났고, 이따금 더 일찍 일어나 출근했으며, 저보다 늦게 잠들었다.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손에 꼽을 정도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재혁은 자신에 대한 애정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표현하곤 했다.
그것으로 끝이라서 문제였지.
자기 감정만 토해 내곤, 시호가 겪는 외로움이나 불안감은 모른 척한 것인지, 정말 몰랐던 것인지, 어쨌든 살피지 않았다.
더 이상 시부모님과 한집에 살 마음도, 의지도 없다며 이혼을 요구했을 때.
재혁의 놀란 얼굴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 화목하게 잘 지냈잖아. 어머니 아버지가 당신을 딸처럼 얼마나 아끼시는데.]
다정하나 무관심했던 남편의 말은 이혼에 대한 마음을 더욱 확고하게 만들었다.
저렇게 말간 얼굴로 자고 있는 모습을 보니 이마라도 한 대 때려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시호는 때리는 대신 입을 열었다.
“나도 오늘 당신이 아닌, 다른 남자랑 키스했어.”
윤기를 떠올리자 순식간에 몸이 더워진다.
자신의 허리를 감싸던 강인한 팔.
머리와 등을 계속해서 쓸어내리던 긴 손가락.
부드럽게 핥고 빨아들이던 입술.
“당신은 나 아니면 안 된다지만.”
난 당신이 아니어도 될 것 같아.
그녀는 거실에 불을 끄고 침실로 들어갔다.
세안을 하고 로션을 바른 뒤 옷을 갈아입으려는데.
잠옷을 보니 또 울컥 무언가가 치밀었다.
여전히 성북동 그 저택에서 벗어나지 못한 느낌에 시호는 얼굴을 찡그리며 파자마를 도로 옷걸이에 걸었다.
하루아침에 무 자르듯 칼같이 잘라 낼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지만.
이럴 때마다 그때 느꼈던 무기력함과 외로움이 밀려와서 견딜 수가 없다.
속옷만 입은 그녀는 가지고 있는 옷 중에 가장 헐렁한 티셔츠와 바지를 입었다.
오늘은 이게 잠옷이다.
내일 꼭 사러 가야지. 윤기의 티셔츠와 똑같은 사이즈로.
……윤기는 자고 있을까. 그렇겠지.
이 방을 침실로 쓰고 있을까. 그렇다면 바로 아래층에 누워 있다는 건데.
시호는 괜히 목을 가다듬었다.
갑자기 막 긴장이 되네.
손으로 바닥을 똑똑 두드려 볼까 하다가, 그런 자신이 어이없어서 픽 웃고 말았다.
‘내일 오후에 전화한다고 했지.’
그때까지 시간이 무척 느리게 갈 것 같다고 생각하며 시호는 눈을 감았다.
***
눈꺼풀 위로 들이치는 햇살에 재혁은 찡그리며 잠에서 깨어났다.
늘 눕던 침대가 낯설게 느껴졌다.
시호가 옆에 없다는 심리적인 요인이 아니라, 물리적으로 낯설게 느껴졌다.
킹사이즈 침대에 비하면 지나치게 좁다. 눈을 번쩍 뜬 재혁은 상체를 일으켰다.
처음 보는 곳. 그런데 익숙한 향기에 마음은 진정되는 곳.
손바닥으로 이마를 문지르던 재혁은 문득 어제를 기억해 냈다.
거래처 대표와 미팅이 끝나고 술자리를 가졌다.
분명 가볍게 시작했는데 그가 ‘아내와 별거 중’이라며 울기 시작했고, 그에 공감하며 마셔 주다가 거하게 취해 버렸다.
바에서 불러 준 대리 기사에게 시호의 집 주소를 부르곤 그대로 잠들어 버린 기억이 났다.
그녀가 연교시로 이사했다는 보고서를 받았을 때 집 주소를 알아 놓았다.
외우는 것은 아주 쉬웠다. 시호가 사는 곳이니, 제게도 집이나 마찬가지인 곳이니까.
발을 바닥에 디디자, 덮고 있던 담요가 아래로 스르르 떨어졌다.
그것을 주워 품에 안은 재혁이 천천히 일어났다.
“시호야.”
그녀를 불렀으나 대답이 없었다.
전화를 해 봐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도어록이 눌리더니 곧 해제되며 문이 열렸다.
“……일어났네.”
마트 인장이 찍힌 봉투를 손에 쥔 시호가 막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