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화
놀라 굳은 시호를 윤기는 더욱 깊이 끌어안았다.
“윤……기야?”
그는 대답 대신 시호의 머리를 감싸 제 어깨에 폭 기대게 했다.
커다란 손이 여린 등을 덮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두드렸다.
“잘 버텼어요, 선배.”
귓가에 포근히 내리는 음성이 시호의 마음을 어루만졌다.
처음이었다.
재벌가에 시집가서 다 누리고 사는데 뭐가 힘드냐는 말이 아니라.
헤어질 때 그만한 위자료를 받다니 나도 이혼녀가 되고 싶다는 말이 아니라.
“아주 잘 버텼습니다.”
진심이 담긴 위로를 받는 것은.
눈시울이 뜨거워져서 시호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혹여 들킬까 봐 혼자 있어도 마음 편히 울어 본 적 없었다.
눈이 부을지도 모르고, 귀가 시간이 일정하지 않은 남편이 언제 들어올지 몰랐으니까.
그리고 이따금 가사도우미가 살며시 방문을 열어 보는 때도 있었다.
시모의 지시로 자신을 감시했던 것이다.
친구나 친정과 쓸데없는 전화 통화로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편하게 늘어져 RS그룹 며느리의 위신을 무너뜨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뭘 훔치거나 숨기는 것은 아닌지.
수용소에 갇힌 죄수나 다름없었다.
하나 자신이 선택한 길이었으므로 홀로 인내하는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절대적인 자유라 부를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스스로가 선택하고 스스로가 책임지는 것뿐일 테니까 말이다.
“선배는 마녀 따위가 아니고. 그저 그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살았던 겁니다. 누구나 기회가 오면 놓치고 싶지 않을 테니까.”
그리 말하며, 윤기는 뼈저리게 후회했다.
당시 시호가 안고 있던 고민과 고통은 제가 충분히 덜어 줄 수 있는 것이었다.
일찍 마음을 드러냈다면.
그래서 다가갔다면 시호가 그 힘든 시간을 겪지 않아도 됐을 텐데.
시호는 여자로서도, 검도인으로서도 너무 높은 곳에 있었다.
그녀에게 어울리는 남자가 되려면 이 정도는 부족하다 여겼다.
더 정진해서, 더 높은 곳으로 가야 했다.
짝사랑에 빠지면 상대에 비해 스스로가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지는 법이다.
윤기는 일단 시호가 수상했던 대회를 섭렵한 후에, 그녀가 아직 입상하지 못했던 대회에서 먼저 최고의 자리에 오르자고 다짐했다.
게다가 군대 문제도 있었다.
섣불리 고백했다가 군대에 가 버리면 이도 저도 아니게 되어 버린다.
다행히 시호는 연애할 생각은 없다고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 동기 중 하나가 시호에게 대학에 들어가면 어떤 타입과 사귀고 싶으냐고 질문을 했었다.
[당분간 검도랑만 사귈 거야. 목표 이루기 전까지는 안 만나.]
그 말에만 기대어 윤기는 검도에만 전념했다. 시호는 한 번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렇게 군대에 갔고.
시호는 결혼했다.
그녀의 결혼 소식을 들었던 날이 아직도 선명하다.
윤기의 인생에서 그렇게 절망한 날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었다.
남자 친구가 생겼다는 말을 들어도 타격이 컸을 텐데, 남편이라니.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다. 아니, 어쩌면 그날 한 번 죽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반쯤은 죽은 채로 지내던 나날.
기회가 찾아왔다.
윤기는 그 시기의 시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악착같이 기회를 물어서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았을 테지.
지금 내 마음처럼.
윤기는 시호를 안은 팔에 더 힘을 주어 당겨 안았다.
“선배.”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생각하며.
“울어도 됩니다.”
그 말이 신호였던 듯, 시호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윤기의 앞에선 무너져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꽉 안고 있는 단단한 팔 때문일까. 아니면 등을 토닥이는 커다란 손 때문일까.
눈물을 보이면 약한 거라고 배웠다. 남에게 약점을 내보이면 안 된다고 배웠는데.
지금껏 헛살았고, 헛배웠나 보다.
“흑…….”
시호는 입술을 깨물었지만 울음 한 조각이 새어 나가고 말았다.
울 때조차 스스로를 통제하는 그녀를 보는 윤기의 표정은 안쓰러움과 분노가 뒤섞였다.
남편이라는 새끼는 도대체 무얼 하고 있었나.
나는 또 뭘 하고 있었고.
그러나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기에, 윤기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시호의 등을 쓸어 주는 것뿐이었다.
나였다면 절대로 선배를 혼자 울게 만들지 않았을 텐데.
내가 남편이었다면, 호적에 아내로 올리기까지 한 이 사람을 외롭게 내버려 두지 않았을 텐데.
……그래서 기회가 생겼지만.
시호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던 윤기는 이내 살포시 입술을 내렸다.
위로하듯 시호의 머리에 입맞춤을 한 윤기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 내고 다시 그 자리에 입을 맞추었다.
포근히 내려앉는 감촉에 흐느끼던 시호가 놀란 듯 보았다.
“위로. 허락하셨잖습니까.”
눈물로 범벅이 된 모습마저 아름다웠다. 윤기는 양손으로 그녀의 눈가를 닦아 냈다.
“제 앞에서만 우십시오.”
담담히 내려앉는 목소리에 시호는 가슴 부근이 간지러웠고, 또 무거웠다.
“언제든지 안아 드릴 테니.”
하얀 이마에, 다시 양 눈가에 입술이 내려왔다.
욕망이 담기지 않은 순수한 위로의 접촉이었다.
“선배로만…….”
새어 나온 작은 목소리에 윤기가 온 신경을 집중했다.
“대하겠다면서.”
“예. 그랬습니다.”
“선배가 울면 이런 식으로 위로해?”
붉게 짓무른 눈가. 아직 속눈썹 끝에 매달린 눈물방울. 벌어진 입술.
시호는 우는 모습도 자극적이었다.
“선배만.”
윤기는 욕망으로 흐려지려는 정신을 다잡았다.
“서시호 선배님만 이런 식으로 위로합니다.”
시선이 맞물렸다.
젖은 숨결이 농밀히 섞였다.
야릇한 긴장감에 몸이 떨려 왔다.
짙어진 눈빛으로 시호를 바라보던 윤기가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쪽. 입술이 아주 살짝 맞닿았다.
그러다 아슬아슬한 거리를 두고 떨어진 윤기가 허락을 구하듯 시호를 보았다.
“선배.”
갈망이 덕지덕지 묻은 눈동자가 자신의 입술을 잡아먹을 듯 보자, 시호는 아랫배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허락해 주십시오.”
시호는 망설였다.
아직 우리는 어떤 사이도 아니다.
이래도 되나. 왜 키스를 하나.
왜…… 거부할 맘이 안 드는 건가.
시호의 떨리는 손끝이 윤기의 입술을 매만졌다.
“윽…….”
그의 뜨거운 숨결이 손가락을 뱀처럼 얽었다.
“술에 취한 것 같아.”
시호가 그와 눈을 맞췄다.
“속아 줄래?”
“기꺼이.”
윤기가 거칠게 입술을 겹쳤다.
벌어진 틈으로 곧장 혀를 밀어 넣은 윤기는 그녀의 혀를 농밀히 휘감았다.
회식이 아니면 입에 대지 않는 알코올의 알싸한 맛이 그녀의 혀를 통해 느껴졌다. 어디서도 마셔 보지 못한 달콤한 술이었다.
“응…….”
살짝 떨어진 틈으로 시호의 신음이 흘렀다. 그마저도 아깝다는 듯 윤기는 입술을 강하게 핥고 빨아들였다.
티셔츠 위로 느껴지는 그의 단단한 근육에 시호의 발가락이 곱아들었다.
윤기의 팔이 자신의 허리를 감아 당기더니 이내 손으로 부드럽게 살살 쓸었다.
“흐읏…….”
윤기가 고개를 틀며 더 깊이 다가왔고, 시호 역시 열렬히 응했다.
숨이 어지러이 뒤엉켰다.
서서히 차오른 숨이 한계치까지 도달했을 무렵.
시호는 그의 어깨를 밀어내며 입술을 뗐다.
“하아, 하…….”
가파르게 오르내리는 가슴과 가슴이 맞닿았다.
숨을 토해 내는 시호를, 윤기는 여전히 갈증에 시달리는 눈빛으로 응시했다.
저로 인해 부풀고 젖은 시호의 입술이 탐스러운 과일 같아서 탐이 났다.
“선배.”
그저 불리기만 했을 뿐인데. 시호는 등줄기가 짜릿했다.
“이제 아무 사이도 아니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아……. 윤기야…….”
“키스까지 했으니 단순한 선후배로는 못 돌아갑니다.”
윤기가 엄지로 시호의 입술을 닦아 주며 낮게, 그러나 선명히 속삭였다.
“술에서 깬 선배가 잊어도, 나는 절대로 안 잊을 거니까.”
분명히 떨어져 있는데 여전히 입술이 먹히는 기분이었다.
“이제 그만…… 가 볼게……. 가야 할 것 같아.”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시호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혼자 갈게. 그러고 싶어.”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보이는 복잡한 얼굴에 윤기는 뜻을 물렸다.
“……그러시다면.”
“가 볼게. 나오지 마.”
그래도 윤기는 현관까지 따라 나왔다.
“내일은 오전에 운동이 있습니다. 끝나고 바로 전화 드릴 테니 꼭 받아 주십시오.”
“……응.”
시호는 윤기의 얼굴을 차마 더는 보지 못하고, 빠르게 그의 집을 빠져나와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그리고 위로 올라가 도어록에 숫자를 입력하고 문을 닫은 순간.
문에 등을 기대고 스르르 내려앉았다.
시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취기가 돌아 어지러웠다.
아니, 이건 취기가 아니라…….
“하아.”
긴 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윤기의 품에 안겨 있는 기분이었다.
‘미쳤구나, 서시호.’
마지막에 정신을 차리지 않았다면, 지금쯤 윤기와 어떻게 되었을지 알 수 없다.
분위기에 휩쓸리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잘 알고 있으면서. 또 실수를 할 뻔했다.
“……아직은 너무 일러.”
아직은 너무 빠르다.
누군가를 받아들이기엔.
재혁에게 예의를 지킨다거나 마음이 남아 있어서가 아니었다.
가족 때문이다.
저를 욕하는 것은 참을 수 있다.
시호가 힘들었던 건, 가족까지 싸잡아 욕을 하는 시선들 때문이었다.
재혁과 이혼한 지 한 달 만에 후배와 연애를 한다는 소문이 나게 된다면, 이번에도 다치는 건 저 혼자뿐만이 아닐 터.
“그런데 왜 거부를 못 한 거야.”
머릿속이 복잡하게 뒤엉켰다.
방금 전 무참히 뒤엉키던 윤기와 제 혀처럼.
잦아드는가 싶던 심장 박동이 다시금 세차게 울렸다.
심호흡을 한 시호는 힘겹게 일어나 안으로 가다가 다시 소파 위로 픽 쓰러졌다.
온몸이 다 뜨겁다.
그 정도로 강하고 거센 키스였다.
윤기의 감정이 얼마나 깊고 짙은지 단번에 전달되었다.
“기윤기…….”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이런 일은 상상조차 못 했는데.
인생은 참 한 치 앞을 알 수 없다.
격한 키스의 잔상에 잠식당한 시호는 그렇게 소파에 얼마간 누워 있었다.
몸이 노곤노곤 풀어지고 눈꺼풀이 스르르 밀려 내려왔다.
아무것도 안 덮으면 감기 걸리는데. 일어나기 귀찮았다.
그냥 이대로 자 버릴까.
그런 생각을 하며 눈을 감았을 때.
딩동!
벨이 울렸다.
“누구지?”
윤기인가? 그럼 오기 전에 전화를 했을 텐데.
택배도 배달도 안 시켰다. 광고인가, 잘못 누른 건가.
딩동, 딩동!
“뭐지……?”
시호가 무거운 몸을 일으켜 인터폰으로 다가갔다.
쾅쾅쾅.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 시호야……. 서시호!
그녀의 눈이 커졌다.
화면에는 눈이 풀린 전남편이 서 있었다.
“재혁 씨? 여긴 왜…….”
- 시호야, 문 좀 열어 봐. 응?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큰 소리는 아니었지만, 계속 저렇게 놔두면 민폐가 될 것이었다.
가뜩이나 머리 복잡해 죽겠는데.
하아. 손으로 이마를 짚은 시호는 일단 문을 열어 주었다.
그녀를 보자마자 재혁이 눈을 곱게 접었다.
“시호야. 우리 와이프. 남편 왔어.”
술 냄새가 훅 끼쳐 와서 시호는 미간을 조금 찌푸렸다.
“재혁 씨, 여긴 어쩐 일이야? 술은 왜 이렇게 마셨고.”
집 주소를 알려 준 적은 없지만 아마 남편에게는 자신이 어디에 거주하는지, 무엇을 구입하고 팔았는지 보고가 들어갔을 것이다.
“어쩐 일이긴. 남편이 아내 있는 곳에 오는 게 당연하지.”
“당신 이제 내 남편 아니야. 나도 당신 아내 아니고.”
순간 재혁의 눈이 돌았다.
“아니. 넌 여전히 내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