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윤기의 눈동자가 화살처럼 와서 박혔다.
추궁하는 것 같기도 하고, 반대로 매달리는 것 같기도 한.
아주 묘-한 눈빛이었다.
“부족하다니. 뭐가?”
“저 하나로는 부족하신지 물었습니다.”
그가 시호의 손을 살짝 붙잡았다.
“저는…… 재미없으십니까?”
흑표범에서 별안간에 시무룩한 새끼 고양이가 되어 버린 윤기의 모습에 시호는 손등으로 입을 가렸다.
세상에…… 사람을 뭐 이렇게 홀리나…….
“정말 다채로운 매력이 있는 아이였구나.”
그녀가 작게 중얼거렸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윤기가 상체를 훅 숙여 시호의 입가에 제 귀를 가져다 댔다.
“잘 안 들립니다, 선배.”
“헉…….”
“다시 한 번만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두 번 중얼거렸다간 심장이 남아나질 않겠다.
“아냐. 그냥 쓸데없는 혼잣말이야.”
“그래도 말씀해 주시면 안 됩니까?”
손끝을 붙잡은 힘이 조금 더 강해진다.
“선배가 하는 말은 다 듣고 싶습니다. 아주 사소한 것도.”
전부 다.
낮은 속삭임에 시호의 몸에 짜릿한 전류가 흘렀다.
은은하고 청초했던 비누 향기가, 가까워지니 마치 매혹적인 흑장미의 향처럼 느껴졌다.
“배가 고프단 얘기였어. 들어가면 될까?”
이런. 미간을 좁힌 윤기가 그녀의 손을 붙잡은 채 다이닝룸으로 이끌었다.
점심 때 먹었던 반찬들에 뜨끈한 콩나물국과 맥주, 그리고 유리컵이 더해졌다.
“콩나물국은 언제 끓였어? 힘들었겠다.”
“금방 했습니다. 간단하고.”
“이거 먹어도 되는 건지 모르겠네.”
말과는 다르게 테이블에 빠르게 착석하는 시호를 보고 윤기는 픽 웃었다.
결코 웃음이 헤픈 편이 아닌데, 시호와 함께 있으면 자꾸만 입꼬리가 들썩인다.
그녀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이 미치게 사랑스럽다.
윤기가 맞은편에 앉자, 시호가 두 손을 가슴께에 모았다.
“잘 먹겠습니다.”
국을 한 수저 뜬 시호의 눈이 커졌다.
“기윤기, 요리도 잘해?”
“독립하기 전에 어머니께 배웠습니다. 간단한 건 할 줄 알아야 한다고.”
“바람직한 어머니시다. 너무 맛있어.”
남이 해 준, 그것도 아주 잘 만든 음식은 천국의 양식과도 같았다.
그렇게 숨 쉬는 것조차 잊고 열심히 손을 움직이는데, 밥 위에 반찬이 곱게 놓였다.
눈동자를 도르륵 위로 굴리니 윤기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어, 고마워. 내가 할게.”
“올려 드릴 테니 천천히 드세요. 체하시겠습니다.”
너무 게걸스럽게 먹었나.
머쓱해진 시호는 윤기가 올려 준 반찬과 밥을 그대로 입 안에 넣었다.
간만이다. 식사 시간이 즐거운 건.
“아. 잘 먹었다.”
“괜찮으셨습니까?”
“응.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엄청 훌륭했어. 너무 행복해.”
그릇을 치우려던 윤기의 손이 멈칫했다.
“행복…… 하셨습니까?”
“완전. 진짜 오랜만이다. 이런 충만한 기분.”
시호가 그릇을 들고 일어났다.
“제가 하겠습니다.”
“됐어. 조금이라도 덜 몰염치한 선배가 돼야지. 이미 늦은 것 같지만.”
시호는 싱크대 안에 그릇을 넣고 물을 틀었다. 그 사이, 윤기는 맥주 캔을 따서 유리컵 안에 따랐다.
“선배.”
“아, 고마워. 너는?”
“탄산수로 대신하겠습니다.”
“좋아. 저쪽에서 먹어도 돼? 야경 보면서 마시고 싶은데. 좀 불편하려나?”
“좋습니다.”
……선배와 함께라면 어디든 다 괜찮아요. 길거리에 나앉아도 상관없어.
윤기는 치미는 환희를 꾹 삼켰다.
두 사람은 베란다 앞에 있는 커다란 우드슬랩으로 향했다.
“나도 이런 거 하나 놓을까 봐. 분위기 되게 좋아 보인다.”
“지인이 공방을 하고 있습니다.”
조금의 틈을 두고 윤기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함께…… 가 보시겠습니까?”
권유하는 그의 눈빛이 뜨거워서 시호는 혀로 입술을 축였다.
윤기의 동공이 아래로 슥 내려갔다.
그 찰나의 움직임이 묘하게 색스러워, 시호는 입술을 안으로 말았다.
그러나 역효과였다.
숨어 버린 입술을 찾느라 그의 응시가 더욱 집요해졌다.
“나중에 시간 되면.”
애매한 대답에 껄끄러운 긴장감의 농도가 더 짙어졌다.
“연락해 둬야겠습니다. 조만간 함께 찾아간다고.”
그녀와의 약속을 절대로 날려 버리지 않겠단 듯 윤기의 목소리가 짙게 깔렸다.
시선을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돌린 시호가 맥주를 한 모금 입에 털어 넣었다.
시원한 액체가 들어가자 달아올랐던 속이 조금 진정되는 듯도 싶다.
그렇게 몇 번 들이켜니 금세 한 캔을 다 마셨다.
“하나 더 하시겠습니까?”
“내가 가져올게.”
윤기는 대답 없이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더 꺼내 왔다.
따닥. 캔 따는 소리가 경쾌했다.
“평화롭다.”
바깥에 펼쳐진 네온사인과 좌우로 오가는 헤드라이트의 불빛을 눈으로 좇던 시호가 나른한 숨을 내뱉었다.
“늘 긴장 속에 살았는데. 이런 날도 오네.”
이 시간에 후배와 맥주를 마시다니.
시호의 짧은 말에 그간의 고단함이 농축되어 있었다.
“예전엔 술 한 잔도 입에 못 댔는데. 요즘은 나도 보통은 해. 맥주 세 캔까지는 멀쩡하게 보일 수 있어.”
“이혼…… 때문입니까?”
시호가 어이없다는 듯 짧은 숨을 뱉었다.
“준비운동도 안 하고 갑자기 목 찌르기야?”
“아…….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인 윤기를 보던 시호가 가볍게 웃었다.
“맞아. 이혼 후 하고 싶은 버킷리스트에 포함되어 있었거든. 내 맘대로 술 마시기.”
“버킷리스트…….”
“몰래 그거 작성하는 재미로 버텼어. 웃기지.”
전혀 웃기지 않은 말을 시호는 웃으면서 했다.
“발목 부상으로 갑자기 선수 생활이 끝나 버리니까. 너무 허무하고 무섭고, 또 두렵더라. 끝나 버린 내 미래가. 그리고 집에서 내게 투자했던 만큼 돌려 드릴 수 없다는 게.”
처음 들어 보는 시호의 속내에 윤기는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녀의 옆모습이 너무 선명해서 도리어 꿈만 같았다.
‘선배가 내 옆에 있다니.’
밤을 눈에 담고 있는 시호의 눈동자는 반짝거리는 동시에 쓸쓸함이 묻어 있었다.
그녀가 홀로 외로워했을 시간을 떠올리니 가슴이 무척 아팠다.
“우리 집은 정말로 평범했거든. 그땐 아빠 다니시던 회사가 경영난을 겪고 있어서 평범에서 좀 더 아래였다고나 할까. 그런 집에서 아이에게 예체능을 시킨다는 건 정말 큰 용기야.”
다행인지 불행인지 시호는 검도에 재능이 있었다. 팔다리가 길어서 타격하기에 유리했고, 기선을 제압하는 배포도 출중했으며, 상대의 수를 읽고 틈을 발견해 내는 눈이 좋았다.
대한민국에서 검도 선수는 솔직히 그리 전도가 유망한 직업이 아니었다.
올림픽 종목으로 채택되지 않아 군입대나 경찰 지원 시에도 다른 종목보다 가산점 부분에서 제약이 따른다.
국군 체육 부대나 경찰청 소속팀도 없어서, 검도 유단자로 특수 부대에 입대하지 않는 이상 군대에 간 2년 동안은 눈칫밥을 먹으며 죽도를 잡아야 했다.
세계선수권대회에서도 종주국인 일본에 유리한 판정이 나올 때가 많아서 불합리한 일을 경험하는 선수도 많았다.
게다가 여자로서 검도 선수가 되기란 더욱 어려웠다.
대학에서는 검도 특기자로 남자만을 선발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은 시호가 검도를 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었다.
초등학교 시절 ‘시호가 대한민국 검도의 미래입니다’라며 무릎까지 꿇었던 검도부 감독님의 읍소도 있었거니와, 무엇보다도 딸이 간절히 바라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여유롭지 않은 형편을 잘 알고 있기에 이를 악물고 최고가 되는 수밖에 없었어. 한 번 삐끗하는 순간 검도를 그만두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날벼락처럼 발목 부상이 찾아왔다.
전날 몰래 술을 마시고 밤을 새운 신입생이 비몽사몽하며 대련을 하다가 그만 죽도를 놓쳐 버렸고, 옆에서 대련을 하고 있던 시호는 굴러 온 죽도를 밟아 버리고 말았다.
게다가 그녀의 발목이 꺾임과 동시에 비틀거리던 신입생이 그 위를 콱 밟아 버렸다.
의사는 수술과 재활을 거치면 일상생활을 하는 데는 지장이 없을 정도로 회복은 되겠지만, 선수 생활은 할 수 없다고 했다.
사실상 은퇴 선고였다.
참 허무한 끝이었다.
“그때가 스물셋이었어. 대학도 검도로 들어갔고, 평생 검도만 하면서 살아가려고 했었거든. 나름대로 배수의 진을 치고 최선을 다해 왔는데.”
그게 독이 될 줄은.
아무런 자격증도 없었고, 그 흔한 토익 시험 한 번 준비한 적도 없었다.
당장 내년 2월 졸업인데 시호는 갖추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기업에선 재학생을 선호한다고 얼핏 들은 것 같은데. 이제 와서 휴학 신청은 안 된다.
된다 한들, 무엇을 얼마나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몰랐다.
설상가상 아빠가 다니던 회사는 부도가 나 버리고 말았다.
눈앞이 아득해졌다.
그간 쌓아 온 인내심은 현실 앞에서 눈 녹듯 사라졌다. 자신의 정신력이 이토록 약한 줄 그때 처음 알았다.
얼른 털고 일어나 뭐라도 시작해야 하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검도가 아닌 일을 하는 제 모습이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간 바쳐 온 시간과 노력이 헛되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자신뿐만 아니라 부모님의 시간, 노력, 사랑까지도 허사가 돼 버렸다.
부모님은 괜찮다 웃어 보였지만, 어른이 된 시호는 그것이 정말로 괜찮은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도와줄 친척도, 그 누구도 없었다.
어찌어찌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고 토익 학원에 다녔지만 집중은 되지 않았다.
깊은 절망에 빠진 그때.
손을 내민 것이 재혁이었다.
스무 살이 되어 처음 대회에 나갔을 때 팬이라며 다가왔던 재혁은 대회에 나갈 때마다 시호를 응원하러 왔고, 그렇게 가까워졌다.
졸업 후 서울특별시장기대회에 참여하지 않은 시호에게 연락을 한 재혁은 자초지종을 듣자마자 달려왔다.
그리고 말했다.
[나랑 결혼합시다. 첫눈에 반한 순간부터 결심했습니다. 서시호 씨, 평생 내 곁에 두겠다고.]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고 해도 재혁은 괜찮다고 했다.
자기가 다 알아서 한다고.
나만 믿으라고.
그의 말에 매달리고 싶었다.
재혁에 대해 잘 모르지만 저를 보는 눈빛이나 말에서는 온기가 느껴졌다.
그거 하나에만 기댔다.
지나치게 차이 나는 조건이 결국 불행을 가져다줄 것을 알면서도, 시호는 눈을 감고 그에게 뛰어들었다.
현대판 신데렐라, 취집 성공녀, 검도를 발판 삼아 재벌가에 시집간, 제갈공명도 울고 갈 계략의 달인 등등.
제게 붙는 말은 다 부정적이었다.
하나 사실이었으므로 시호는 묵묵히 제가 선택한 길을 걸었다.
“사람들한텐 다 변명으로 들리겠지. 결과적으로 나는 어마어마한 위자료까지 받아 낸 세기의 마녀니까.”
시호가 힘없이 웃었다.
그때 그녀가 느꼈던 절망, 상실감, 공포, 두려움, 좌절엔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그녀 자신 말고는.
세상은 결과를 중시했고, 오직 결과만이 그 사람을 나타내는 전부였다.
어느새 시호는 성품 좋고 검도를 즐겨 하는 RS그룹 외아들을 꼬시기 위해, 검도를 배워 접근한 여자가 되어 있었다.
“그렇담 난 무려 초등학교 때부터 계획을 세운 거야. 재혁 씨와 결혼하려고.”
그녀를 이해해 주는 사람은 오직 부모님뿐이었다.
“아. 한 명 있구나. 민주. 가족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날 걱정해 준 사람이야.”
윤기는 미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 말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동문회에서 언뜻 본 민주는 뭐랄까. 웃는 얼굴로 꼬인 속내를 숨긴 사람처럼 불안정해 보였다.
“가족 빼고 그런 사람이 한 명뿐이라니. 물론 한 사람이라도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는 걸 알지만…… 그땐 좀 헛살았다고 생각했어.”
워낙에 속을 털어놓지 않는 성격이라 그런지 시호 자신에게 쉽게 다가오는 이가 별로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술술술 잘도 말하고 있다.
술의 힘인가.
아니면…… 기윤기의 힘인가.
“선배.”
“응?”
“위로 좀 하겠습니다.”
다음 순간, 시호는 순식간에 단단하고 너른 품에 갇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