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르쳐 주세요 선배-11화 (11/81)

제11화

“기윤기? 청신동 유원 바람채?!”

민주가 침울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미리는 ‘어머, 어머’를 연발했다.

“위자료 많이 받긴 했나 보다. 연교에서 제일 비싼 아파트에 혼자서 살다니. 하긴, 준재벌가니까.”

하아아. 미리가 한숨을 내쉬었다.

“서시호, 위자료 재테크 완전 성공했네. 운도 좋지. 나도 이혼녀 딱지 달아도 좋으니까 돈 좀 많이 받았으면.”

인생 진짜 불공평하다. 미리가 중얼거릴 때였다.

“애들아~! 나 왔어. 뭐 시켰어?”

소연이 겉옷을 의자 등받이에 걸며 자리에 앉았다.

“아휴, 배고프다. 육아가 보통이 아니다, 정말. 애들 체력이 왜 이렇게 좋은지 몰라.”

소연은 스물아홉에 벌써 아이가 둘이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CC였던 지금의 남편과 결혼하여 현재는 주부로 살고 있다.

“오늘 엄마가 애들 봐 주신다고 했거든. 나 늦게까지 놀아도 돼.”

“김쏘, 서시호 연교로 이사 왔대.”

그 말에 안 그래도 동그란 소연의 눈이 더욱 동그래졌다.

“서시호? 그 RS그룹으로 시집간? 왜? 여기서 사업이라도 한대?”

“휴우, 나도 그런 줄 알았더니.”

미리가 민주의 눈치를 보았다.

소연이 그 미묘한 기류를 읽고 재촉했다.

“왜에, 뭔데! 나한테만 비밀 만들 거야?”

“민주야, 소연이한테는 괜찮잖아. 응?”

소연도 미리 못지않게 입이 가벼웠다. 지금은 육아 스트레스를 푼다는 핑계로 온갖 사람들을 평가하고 다녔지만, 아이를 갖기 전에도 똑같았다.

“그럼 진짜 소연까지만 알고 있는 거다?”

“그럼, 그럼. 당연하지. 김쏘, 서시호 이혼했대. 한 달 전에.”

소연이 입을 쩌억 벌렸다. 방금 전까지 미리가 그랬던 것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남편이 바람이 났다나 봐. 그래서 위자료도 빵빵하게 받고.”

미리는 자신이 내린 결론이 마치 진실이라도 되는 양 말했다.

민주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운발은 진짜 장난 아니지 않냐? 남편이 첫눈에 반해서 결혼 밀어붙여, 이혼 사유도 남편한테 있어서 위자료 빵빵하게 받아. 걔 유원 바람채에 산대.”

유원 바람채는 소연이 이사 가고 싶어서 안달이 난 곳이었다.

역시나 소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참나. 왜 하필 거기야? 짜증 나.”

“연교에서 제일 좋은 아파트잖아. 싸모님 짬밥이 있는데 그 정도는 살아 줘야 된다는 거겠지. 차도 새로 뽑았대. 가방도 C사 신상.”

민주는 애가 탔다. 자신이 강조하고 싶은 것은 ‘하필 윤기가 사는 곳으로 이사를 왔다’는 것인데 초점이 자꾸만 빗나갔다.

“돈지랄하고 있네. 아아, 나도 어릴 때 검도나 할 걸. 우리 애들이나 시켜 볼까?”

기회를 포착한 민주가 얼른 입을 열었다.

“시호 말이야. 연교에서 검도장을 운영할 생각인가 봐.”

놀랄 소식이 더 있었어?!

소연과 미리는 서로 마주 보며 입을 벌렸다.

“검도장? 진짜로?”

“응. 지금 리모델링 중이라던데.”

“그럼 서시호 관장 되는 거야?”

시호가 만들려는 것은 검도장이 아니라 검도 선수단으로, 프로 선수들이 소속된 실업팀이다.

민주도 그를 잘 알고 있었다.

시호가 ‘기윤기를 첫 선수로 영입하겠다’라고까지 했으니.

하지만 이들에게 그 차이를 설명해 봤자 자기네 좋을 대로 생각할 것이 빤했다.

또한…… 이편이 나중에 논란이 되기에 충분하니까. 이로 인해 시호가 다시 연교를 떠났으면 하는 바람이 저도 모르게 튀어나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야 윤기와 다시 멀어질 테니.

“어머, 위자료를 그렇게 막 많이 받은 건 아닌가 봐? 생계 수단으로 검도장 차리는 거 보면.”

“그러게? 아파트 살 정도만 됐나 보다. 혹시 알아? 그 집도 전세나 월세일지.”

“하긴. 재벌가가 어디 그렇게 호락호락하니? 솔직히 서시호한테 선수 경력 빼고 뭐 있어.”

먹잇감을 하나 던져 주면 참 잘도 물어뜯고 씹어 대는 친구들이었다.

여태껏 눈치 없는 척, 순진한 척하며 시호의 소식을 나르지 않았더라면, 자신 역시 공중분해 되었으리라고 민주는 확신했다.

“얘들아, 말이 좀 심하다. 그래도 너희는 안정적인 가정에서 보호받고 있지만, 시호는 버림받아 혼자잖아.”

“인민주 진짜. 착한 것 좀 봐.”

“알았어. 그래도 너랑 친한 친구니까. 우리랑 동창이기도 하고.”

“다행히 윤기랑 같은 아파트라서 마음이 놓여.”

“맞다, 그건 또 뭐야? 서시호, 설마 일부러 그 아파트 간 거야?”

그제야 상황이 민주가 원하는 쪽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걔 고딩 때부터 기윤기랑 친한 척 장난 아니었잖아. 우리가 민주 통해서 자리 좀 만들어 달라는 것도 매번 무시하고.”

“설마…… 남편이 바람피운 게 아니라 서시호가?”

민주가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냐, 윤기는 운동에만 전념하기도 바쁜 애야. 둘이 연락 안 한 지도 오래돼서 이사 왔다는 것도 모를걸.”

미리가 눈을 가늘게 뜨고 민주를 보았다.

“오올, 인민주우~! 기윤기랑 무슨 사이야. 보면 은근히 친한 것 같다?”

소연도 거들었다.

“그러게. 저번에 동문회 때 보니까 기윤기가 은근히 민주 근처에만 앉더라고. 너희 무슨 사이야?”

“그, 그런 거 아니야. 그냥 윤기랑 나 둘 다 시호랑 친했으니까…….”

“친했으니까 뭐? 오호, 둘이 뭐 있지!”

민주는 배시시 웃으며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여기까지만 해 놔도 소연과 미리는 제가 원하는 상황을 잘 만들어 갈 것임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너 서시호 조심해. 걔 은근히 고딩 때부터 너 무시하는 것 같아.”

“에이, 시호 안 그래.”

“어허. 걔 이혼까지 했어. 너처럼 순진한 애는 그렇게 풍파 다 겪은 애 절대 못 이겨.”

“내 말이. 기윤기가 ‘연교 도련님’이잖아. 재벌가는 자기한테 너무 과분하다고 생각해서 지역 유지한테 접근할 수도 있어. 어디 보통 유지야? RS그룹이 재계면 윤기는 정계 쪽이라 할 수 있지. 큰아버지가 국회의원 4선인가, 5선인가.”

민주는 속으로 그들을 비웃었다.

어쩌면 이렇게 조종하기가 쉬울까.

서시호가 이들의 반의반만 닮았더라도 제 인생이 좀 더 쉽게 풀렸을 텐데.

“아무리 그래도. 이혼녀가 설마 앞길 창창한 청년을 꼬시겠어? 민주야, 걱정 마. 만약 그런 일 있으면 내가 도와줄게. 나 연교 맘카페 임원이잖아.”

“맞아, 거기 화력이면 서시호 검도장 망하는 건 시간문제지.”

“무서운 소리 하지 마, 얘들아.”

친구들은 민주가 윤기를 짝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윤기가 워낙 닿기 높은 존재이기도 하고, 또한 민주의 소심한 성격상 당당하게 고백을 하지도 못한 채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 버렸다.

그 시간 동안 자연스럽게 민주와 윤기는 한 세트로 엮였고, 어느새 친구들은 민주와 윤기가 썸이라도 타고 있는 마냥 얘기하며 응원했다.

그 기저에는 ‘혹시나?’ 하는 마음이 깔려 있었다.

시작은 고등학생일 때 어느 비 오는 날, 무뚝뚝하고 차갑기로 유명한 윤기가 민주에게 우산을 건넨 것이었다.

처음 그 얘기를 들었을 때는 믿을 수 없었지만 그 우산은 윤기의 것이 맞았다. 또한 그들 사이에는 서시호라는 연결고리가 있었다.

혹시 민주가 윤기와 이어지게 된다면 단숨에 ‘연교 사모님’이 된다. 그때 저희들에게 떨어지게 될 콩고물을 생각하니, 민주를 응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문한 음식이 서빙되었다.

각자의 생각을 감춘 채 그들은 식사를 시작했다.

***

“……에취.”

시호는 팔로 입을 가렸다.

설마 감기는 아니겠지. 머리가 좀 어지러운 것 같기도 한데.

하지만 샤워를 하고 나오면 간혹 이럴 때가 있어서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리던 시호는 문득 얼굴이 빨개졌다.

[선배를 안고 싶습니다.]

걔는 왜 그런 중의적인 말을 해선, 사람을 혼란스럽게 한담.

왜 이렇게 떨리는지 모르겠다.

그러다 시호는 픽 웃었다.

“결혼까지 했었는데 말이지.”

그만큼 윤기의 눈빛은 쉬이 벗어날 수 없는 강한 매혹을 담고 있었다.

재혁은 어땠더라. 그의 앞에서 이렇게 떨려 본 적이 도대체 언제였던가.

프러포즈를 받았을 때?

결혼식장에 들어설 때?

첫날밤이었던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신혼여행을 다녀온 다음 날부터 일주일에 두어 번 겨우 볼까 말까 할 정도로 바빴으니까.

아마 지금도 자신 같은 건 새까맣게 잊고 일에 매진하고 있을 것이다.

섭섭한 것은 아니다.

다만, 조금 허무할 뿐.

드라이어를 끄자 정적이 찾아왔다.

가뜩이나 텅 비어 있는 공간이 더욱 공허하게 보인다.

내일은 별채에 있는 짐들을 아파트로 가져와야겠다.

“맞다. 수전 이상 있다고 연락해야지.”

인테리어를 맡은 국 소장에게 메시지를 보낸 시호는 윤기에게 전화를 하려다 망설였다.

당사자가 허락하긴 했지만…….

그래도 고백까지 받은 마당에 걔네 집에서 밥을 먹어도 되는 건가?

술자리까지 갖는다고 했잖아.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지금 말하기엔 늦었나. 벌써 다 준비했을 것 같은데.”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어야 했는데. 겨우 한 달 사이에 긴장이 다 풀려 버렸나 보다.

통화 기록을 보니 이름을 저장하지 않은 번호가 나왔다.

윤기의 번호다.

망설이던 시호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가 얼마 가지 않아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 선배.

휴대폰을 통해 들려온 목소리에 시호는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 선배, 듣고 계십니까?

기윤기는 전화 목소리도 참 심장 떨리게 좋네.

낮고, 진하다.

“……응. 듣고 있어.”

- 다 끝나셨습니까?

“방금 머리 다 말리고 이제 내려가려던 참인데.”

시호가 머뭇거렸다.

- 내려가려던 참에. 왜 안 오십니까?

“정말 가도 되나 싶어서. 날 이성으로 보는 이성의 집에 놀러 가서 밥이랑 술은 좀…….”

- 후배 집에 놀러 간다고 생각해 주세요. 불편하시지 않게 하겠습니다.

언뜻 무심한 그의 목소리 끝엔 채 숨기지 못한 갈급함이 묻어났다.

- 선배로만 대하겠습니다. 오늘은.

‘오늘은’이란다. 뺨이 붉어진 시호가 고개를 숙이고 작게 웃었다.

“집 방문 선물은 다음에 크게 쏠게. 지금은 뭐가 없네.”

- 괜찮습니다. 선배만 와 주시면 됩니다.

열렬한 마음을 애써 꾹 누르는 듯한 목소리가 마음을 계속 흔들어서.

결국 발걸음을 옮기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 내려갈게.”

시호는 계단을 내려갔다. 벨을 누르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선배.”

씻고 나온 기윤기는 파괴적이었다.

향기로운 비누 냄새가 확 끼쳤다.

검게 젖은 머리카락. 보송한 피부.

커다란 몸 위로 걸친 흰 티셔츠는 정결한 동시에 야릇했다.

“들어오십시오.”

천국인지 지옥인지 모를 곳을 향해 시호는 걸어 들어갔다.

등 뒤로 문이 탁 닫혔다.

“맥주 괜찮으십니까?”

“좋지. 맥주가 있었구나.”

“가수원이 사다 놨습니다.”

“가수원?”

시호의 입에서 친구의 이름이 나오자 윤기의 미간에 살짝 금이 갔다.

“나랑 대련할 때 넘어졌던 그?”

시호와 처음 대련하게 된 날, 수원은 긴장한 나머지 제 발에 꼬여 넘어지고 말았다.

그날 이후로 ‘꽈당 수원’에서 한 글자 더 줄인 ‘꽈수원’이 별명이 되었다. 단순히 이름 때문에 지어진 별명인 ‘과수원’보다 파괴력이 컸다.

“꽈수원. 맞지.”

“……예.”

저와 있을 때 시호가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것이 싫었다.

윤기의 눈빛이 가라앉은 것도 모르고, 시호는 작게 웃었다.

“수원이는 잘 지내? 여전히 웃긴가?”

“…….”

“너랑 붙어 다녔던 애 한 명 더 있었잖아. 윤……태형이든가?”

말해 주기 싫었지만.

시호가 알고 싶어 하니 말할 수밖에.

“……윤태홍입니다.”

“맞다. 윤태홍. 이름 들은 지 정말 오래됐다.”

얼른 저녁을 먹자고 말을 돌리려고 했지만.

“다들 어떻게 지내려나.”

시호가 즐거이 중얼거렸다.

윤기의 눈 밑이 미세하게 떨렸다.

“보고…… 싶으십니까?”

“응. 걔네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들이 1학년으로 입학했을 당시, 3학년이었던 시호는 주장이었다.

단아한 외모는 물론, 남자와 겨뤄도 실력 면에서는 절대 뒤지지 않았다.

체격과 힘의 차이 등 물리적인 부분은 어쩔 수 없었지만, 수 싸움과 기선 제압, 기술적인 측면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해서, 당시 우이고 검도부 1, 2학년에게 시호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수원과 태홍도 당연히 시호를 보고 싶어 할 것이다.

지금 부르면 당장이라도 날아오겠지.

그러나 윤기는 시호와의 시간을 방해받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선배. 저로는 부족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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