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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쳐 주세요 선배-10화 (10/81)

제10화

시호는 하마터면 브레이크를 밟을 뻔했다.

“너, 너 지금, 방금 뭐라고…….”

“안고 싶습니다.”

대낮……은 아니지만 해가 넘어가려는 오후에 도대체 무슨 소리야?

“내가 생각해 보겠다고 했지, 받아 준다고 말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

“예, 잘 알고 있습니다.”

“좀 지나친 말 같지 않아?”

“잠깐 손잡는 것까지 허락하셔서, 포옹하고 싶다는 말까지는 괜찮은 줄 알았습니다.”

“포옹……?”

그제야 윤기의 말을 오해했다는 것을 깨달은 시호의 얼굴이 붉어졌다.

결혼 생활을 겪으며 웬만한 일에는 당황하지 않게 된 줄 알았는데.

지금은 홍조를 숨길 수가 없었다.

“선배?”

“앞에 봐.”

하얀 볼이 연한 색으로 물든 것을 확인한 윤기의 눈이 커졌다.

그러다 이내 그의 얼굴에 천천히 번지는 환한 빛.

때마침 신호에 걸린 차가 멈춰 섰다.

여전히 자신을 보고 있는 윤기의 시선에 뭐라고 하려고 고개를 돌린 찰나.

시호의 심장이 또 한 번 쿵, 떨어졌다.

조각이 웃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귀한 것을 보고 있는 양, 부드럽게.

“아, 앞에 보랬지.”

추워서 떨 때를 빼고는 말도 더듬지 않았는데. 오늘은 바보같이 몇 번이나 더듬고 말았다.

그만큼 윤기의 시선이 따스했다. 낯이 간지러울 정도로.

“선배. 참 귀엽습니다.”

“입 다물어.”

“안고 싶을 만큼.”

“너!”

눈에 힘을 주고 노려보아도 윤기는 미소를 거두긴커녕 오히려 입꼬리가 더 올라갔다.

그 모습이 찬란해서 눈이 부셨다.

평소에 잘 안 웃는 이유가, 사람을 마구잡이로 홀리기 때문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차갑고 도도한 흑표범에서 순식간에 강아지상으로 변하는 얼굴이 무척 매력적이었다.

도무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빠앙!

그때 뒤에 서 있던 차가 클랙슨을 울렸다.

황급히 정신을 차린 시호가 윤기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액셀을 밟았다.

옆에서 피식,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조용히 하라고 했다.”

“예.”

“너 선배를 비웃어? 우이고 검도부 위계가 아주 엉망이 됐구나.”

“죄송합니다.”

전혀 죄송한 말투가 아니었다.

웃음기 섞인 목소리는 어린아이와 장단을 맞춰 주는 어른의 그것이었다.

167센티미터의 키에, 차분하고 서늘한 인상을 가진 시호는 빈말로도 귀엽다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쩐지 저를 보는 윤기의 눈빛을 보고 있노라면 막 유치원에 들어간 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그의 눈에서는 그만큼 달콤하고 달달한 감정이 뚝뚝 흘러내렸다.

집까지 오는 내내 윤기는 피식거렸고, 시호는 제 속을 진정시키느라 몇 번이고 심호흡을 했다.

“제발 아무도 안 타야 할 텐데.”

주차를 마치고 엘리베이터로 향하던 시호가 중얼거렸다.

조금 마르긴 했지만 둘 다 여전히 젖어 있는 머리카락과 옷.

게다가 윤기는 상의를 탈의한 채 타월을 몸에 두르고 있다.

냇가에서 물놀이를 한 꼴이다.

“이사 오자마자 이상한 사람으로 낙인찍히겠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시호가 그를 곱게 흘겨보았다.

그마저도 예쁘게 보여서, 윤기는 마른세수를 했다.

정말…… 안아 버리고 싶다.

“이제 보니 기윤기, 한없이 가벼운 입을 가진 남자였네.”

윤기의 표정이 대번에 굳어졌다.

“빈말 아닙니다. 정말 책임지겠습니다.”

“어떻게 책임질 거냐고는 안 물을게.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말이 나올 것 같아.”

“…….”

시호의 말이 맞다. 그녀가 감당하기엔 아직 벅찬 말들이 목까지 차 있었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다시는 어디도 보내지 않을 겁니다. 내 눈 닿는 곳에만 있어요.

제 여자가 되어 주십시오.

하지만 시호가 시간을 달라고 했으므로, 얌전히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땡.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시호가 먼저 탔고 윤기가 뒤따랐다. 이대로 쭉 올라가기를 바랐건만.

엘리베이터는 로비층에서 멈춰 서고 말았다.

“나리네가 연교로 이사 갈 줄은 몰랐네.”

“그러게? 신축이라 그런지 아파트도 엄청 좋……고…….”

학부모로 보이는 여자 둘은 엘리베이터 안에 먼저 타 있는 두 사람을 보고 말을 멈췄다.

정확히는, 윤기를 보고서다.

커다란 타월을 두르기는 했지만 미처 가려지지 못한 어마어마한 복근이 보였다.

인간의 피부가 저렇게 딱딱하고 깊게 파일 수도 있는 것인가?

키는 또 얼마나 크고, 어깨는 또 얼마나 넓으며. 살벌한 눈빛에 감도는 묘한 색기까지.

냉혹하리만치 무감정한 눈과 마주친 순간.

두 여자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며 시선을 교환했다.

시호는 입가에 힘을 주었다.

윤기야, 제발 나 부르지 마.

저 사람들 내릴 때까지 제발.

“선…….”

시호가 눈을 부릅떴다.

다행히 윤기는 텔레파시를 읽은 것인지 입을 다물었다.

더 다행인 것은, 여자들이 저희들보다 먼저 내렸다는 것이다.

혹시나 그들이 나중에 내렸다면, 16층에서 윤기가 먼저 내리고 저 혼자 남았을 때, 여자들의 시선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12층에서 내린 그들은 문이 닫힐 때까지 윤기를 뚫어지게 보았다.

둘이서 어떤 얘기를 나눌지 안 봐도 훤했다.

재혁과 다닐 때도 느낀 거지만, 외형이 뛰어난 남자와 함께 다니면 무척이나 피곤하다.

이목이 집중될 뿐만 아니라 평가를 당하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보다 더 심하게.

윤기를 보던 그들의 눈빛이 슬쩍슬쩍 제게 향하는 것을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선배.”

낮고 무거운 음성에 시호가 고개를 들었다.

“씻고 바로 오실 겁니까?”

“전화할게. 너도 준비할 시간 필요할 테니까.”

윤기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기뻐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아주 가까이에 있는 사람만이 눈치챌 수 있을 정도였다.

저렇게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는 애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지금껏 내가 알던 기윤기는 껍데기도 아니고, 껍데기를 싼 포장지 정도였구나 싶다.

“그럼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씻고 따뜻한 물이라도 마시고 있어. 바로 준비하지 말고.”

“예. 전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희미한 미소를 지은 윤기가 16층에서 내렸다. 그러고는 문이 닫힐 때까지 시호를 보고 있었다.

“……하. 눈빛이 너무 선정적이야, 기윤기.”

오늘 하루에만 심장이 몇 번이나 떨어졌는지 모르겠다.

***

“인민주!”

먼저 앉아 있던 미리가 손을 들었다.

“빨리 왔네?”

“차가 안 막혀서 좀 일찍 도착했어. 소연이도 15분 정도 후면 온대. 윤진이는 회식이라 못 오고.”

민주가 맞은편에 착석하자마자 미리가 제 의자를 당겨 앉았다.

“오늘 서시호 만났다며.”

“응. <가배>에서.”

“뭐? 서시호 연교까지 왔어?”

“아예 내려왔대. 이제부터 여기서 살 모양이더라고.”

미리가 입을 떡 벌렸다.

“어머, 왜? 연교에서 뭐, 사업한대?”

“휴우. 이걸 말해도 되는지 모르겠다. 어차피 이 주 후면 기사 나갈 거긴 한데…….”

민주가 뜸을 들이자 미리가 답답하다는 듯 재촉했다.

“왜, 뭔데? 응? 숨넘어가겠어.”

“너니까 믿고 얘기하는 거다? 절대로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 알았지?”

“그러엄! 얘는 날 뭘로 보고. 입에 자물쇠 꾹 채울 테니까 걱정 마.”

미리는 이름값을 톡톡히 하는 사람이었다. 그녀에게 말하면 무엇이든 미리 새어 나갔다.

남들의 소식이 궁금할 땐 한없이 가까이하되, 내가 묻고 싶은 비밀이 있을 땐 절대 만나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시호 이혼했어. 한 달 전에.”

“뭐? 이혼?!”

“쉬! 미리야, 목소리 좀 낮춰!”

미리가 재빨리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고는 소리를 낮췄다. 눈은 튀어나올 듯 커진 채였다.

“정말이야? 서시호 이혼했어?”

“응. 다 정리하고 연교로 내려왔대. 내가 옆에서 잘 챙겨 주려고.”

“어머, 어머, 웬일이야, 세상에! 너 기억나지? 내가 그랬잖아. 걔 얼마 안 가서 이혼할 것 같다고.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네.”

시호가 RS그룹 외아들과 결혼한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미리를 비롯한 동창들은 다들 ‘얼마 못 가겠네.’라고 말했다.

평범한 집 딸내미가 재벌집으로 시집가서 적응이나 제대로 할 수 있겠냐고 말이다.

“사유가 뭐래? 남편이 바람이라도 피웠대? 맞지?”

민주가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도 자신의 예상이 적중했다 생각한 미리가 흥분했다.

“어머머,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재벌가 외아들이 시호로 만족하겠니? 그냥 그 순간 호기심에 혹한 거지.”

“에이, 미리야. 말이 좀 그렇다. 시호 예쁘잖아. 똑 부러지고.”

“야, 인민주. 순진한 너는 모르겠지만 이 언니 말이 현실이야.”

미리가 코웃음을 쳤다.

“솔직히 연교에서나 예쁜 축에 끼지, 연예인들도 행사 때 숱하게 봤을 걔 남편 눈에 서시호가 차기나 하겠어? 그 당시에는 검도 잘하는 여자가 드무니까 그냥 흥미 가진 거지. 남편 취미가 검도였다며.”

“으응, 그렇긴 하지만…….”

그건 그렇고, 하며 미리가 눈을 빛냈다.

“위자료 얼마나 받았대? 아무리 그래도 일반인들보다는 많이 받았겠지?”

“나도 잘은 몰라. 그런데 오늘 보니까 차 새로 뽑기는 했더라. 완전 눈에 띄는 새빨간 아유디. 가방도 C사 신상인 것 같고.”

“어머, 살판났네, 살판났어. 서시호 그렇게 안 봤는데, 완전 여우네? 이혼을 했으면 좀 자중해야 되는 거 아냐? 한 달밖에 안 됐다며.”

민주가 눈썹을 팔자로 만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남들 눈도 있고 해서 좀 그렇다고 생각은 하는데…… 어쩌겠어. 시호가 원래 한번 정하면 마음 안 바꾸거든.”

“어휴, 걔도 진짜. 주목받을 거 뻔히 알면서 왜 그런대? 걔 은근 관종기 있는 거 아냐?”

미리는 고등학교 2학년 때 민주와 같은 반이 된 친구였다.

민주는 2년 연속 시호와 같은 반이 되었지만, 시호는 운동 특기생이라서 평소에 같이 다닐 수 없었다.

그래서 시호가 운동 갔을 때 같이 다닐 친구로 포섭한 사람이 미리와 소연, 윤진이었다.

그들은 저와 마찬가지로 저희들처럼 평범하다 생각했던 시호가 어느 날 재벌가 며느리가 된 데 자격지심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미리는 시호와 비슷한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를 갖추고 있어서 속으로 은근히 라이벌 의식을 불태우고 있던 참이었다.

물론 미리도 한때는 민주를 통해서 시호와 친해지려 나름 노력했었다.

그런데 서시호는 매번 운동하느라 바쁘다는 핑계로 불러도 나오지 않았다.

[어쩌지? 시호 오늘 검도부 애들이랑 등산하기로 했다는데.]

[그거 하루 빠지면 안 돼? 솔직히 훈련이 아니라 남자애들이랑 있으니까 좋아서 그러는 거 아냐?]

[에이, 아닐 거야. 1학년 남자애랑 친하게 지내는 것 같기는 하지만…… 화 풀어, 미리야.]

매번 시호의 거절을 전달하며 미안해하는 민주를 볼 때마다 미리는 속에서 열이 뻗쳤다.

도대체 민주를 뭐로 생각하는 거야? 우리는 또 뭐로 생각하는 거고?

“난 아직도 네가 걔랑 친하게 지내는 게 이해가 안 돼.”

“챙겨 줄 사람이 나밖에 없는걸. 부모님도 귀농하시고.”

“아휴, 이거 착해 빠져 가지고.”

헤헤. 민주가 미소하자 미리는 답답하다는 듯 제 가슴을 쳤다.

“그래서, 서시호는 연교 어디에 산대?”

민주의 표정이 단박에 우울해졌다.

“윤기랑 같은 아파트로 이사 왔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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