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9화
빠져나갈 틈이 없었다.
“기다리는 건 자신 있습니다.”
윤기는 눈빛으로, 손끝을 붙잡은 미약한 힘으로 시호를 강하게 결박했다.
“윤기야. 난 이혼한 지도 얼마 안 됐고. 아직 너무 이른 것 같아. 일단 내 삶을 재정비한 후에…….”
“선배가 움직일 수 없다면. 그럼 제가 다가가도 됩니까?”
윤기가 시호의 손등에 입술을 깊이 묻었다.
“한 번도 잊은 적 없습니다. 결혼…… 소식을 들었을 때도.”
결혼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 윤기의 목소리가 조금 흔들렸다.
양가 식구들과 가까운 친척만 모시고 올린 비공개 결혼식이라 검도부 사람들은 참석하지 않았지만.
만약 공개 결혼식이었대도 윤기는 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걸릴 건 아무것도 없지 않습니까.”
윤기가 시호의 손등에서 천천히 입술을 뗐다.
“가르쳐 주세요. 선배의 마음을 얻는 방법.”
아주 간혹 윤기가 떠오르곤 했다. 하지만 이 애를 마음에 두어서라기보다는,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거였다.
아. 시호는 문득 깨달았다.
우이고 검도부 시절을 떠올리면 언제나 제 근처에 윤기가 있었다.
돌아보면 그는 항상 자신의 눈 닿는 곳에 서 있었다.
그게 이 애가 마음을 표현하는 방식이었던 거구나, 하고. 그녀는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솔직히 말하면.”
시호가 입술을 떼자 윤기의 눈 밑이 설핏 떨렸다.
“싫지 않아.”
그의 얼굴에 환희가 퍼져 가는 것이 눈에 띄게 선명해서, 시호는 뺨이 다 붉어지려 했다.
“생각지도 못한 말이라 당황스럽기는 하지만.”
당황스러운 것과 싫은 것은 확실히 다른 감정이다.
무언가를 보고 놀랐다고 그것을 혐오하는 것은 아니듯이 말이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드리겠습니다.”
윤기가 냉큼 대답하며 그녀의 손을 세게 쥐었다.
“일단 돌아가서 씻은 다음 이어서 얘기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어서 얘기를?”
“술자리 갖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시호는 확답하지 않았다. 오늘 술자리를 갖자는 윤기의 말에 수전 점검을 해야 한다고 말했고, 지금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아무렴 어떠랴 싶었다.
결국은 윤기의 뜻대로 이루어졌을 테니까.
“어차피 저녁도 부실하게 먹을 생각이었을 테니, 같이 먹으면서 갖는 건 어떻습니까.”
시호가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아까 두부를 샀다면 그걸로 점심, 저녁을 때우려고 했었다.
“늘 그렇게 드셨습니까?”
“자유를 누리는 중이야.”
“부실하게 먹는 자유도 있습니까?”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고 시호를 내려다보는 윤기는 꼭 잘못해서 변명을 늘어놓는 아이를 보는 듯했다.
“그동안 끼니마다 한 상 가득 만찬을 차려야 했어. 요리가 교양의 기본이라나. 흥미도 재주도 없는 거 꾸역꾸역 하느라 피곤했었거든.”
시호가 배시시 웃었다.
“그래서 이렇게, 대충 먹고 싶을 때 대충 먹을 수 있는 자유를 만끽하고 있어. 그러니까 봐주라.”
입을 다문 윤기의 눈동자가 진하게 내려앉았다.
“앞으로는 요리하지 마십시오.”
“하하. 너무 극단적인 거 아냐? 당분간만 이럴 거야. 비싼 돈 주고 배웠는데 써먹어야지.”
한식, 양식, 중식, 일식, 각 종류별로 참 다양하게도 배웠다. 전부 기존에 시모를 가르쳤던, 각 분야 장인이라는 선생들에게서 배운 거다.
그게 이 집안의 전통이라고 했다. 며느리가 직접 식사를 챙기는 것이.
다른 집안일은 가사도우미가 했지만, 식사 준비에는 시호가 반드시 참여하여 직접 차려야 했다.
식사 시간이 되면 시부모는 심사위원이 되어, 수저를 드는 순간부터 내릴 때까지 맛에 대한 평가를 내렸다.
대개 부정적이었다. 너무 짜다, 싱겁다, 시다, 쓰다, 달다, 맵다.
간이 딱 된 날에는 ‘맛은 괜찮지만 정성이 부족한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남편 재혁이 함께하는 자리에선 칭찬만 했다.
[우리 며느리, 참 많이 늘었다. 그렇죠, 여보?]
[그러게 말이야. 처음에 비하면 엄청나게 발전했네. 그렇지, 아가?]
[예, 정말 맛있네요. 어머니가 좋은 선생님들만 붙여 주신 덕분인가 봅니다. 그렇지, 시호야?]
말미에 ‘그렇지, 누구야?’하고 묻는 것이 이 집안의 말버릇이었다.
대화를 나누던 그들이 제게 ‘그렇지, 시호야?’라고 물어 올 때마다 시호는 매번 체했고, 시부모는 은근히 무시하며 타박했다.
[어릴 때부터 간간이 좋은 음식도 좀 먹어 봤어야 속이 잘 받아들일 텐데. 그렇지, 며늘아기야?]
드라마에서처럼 ‘이 천한 것!’ 하며 대거리를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게 낫지, 싶으면서도.
어느 땐 오히려 그렇게 한바탕 쏟아 내는 편이 더 시원하지 않을까 생각도 들었다.
저렇게 은근히 무시하면 발끈하기도 좀 뭐했다. 삽시간에 자신만 이상한 사람이 될 게 뻔했으니까.
남편에게 털어놔 봤자 부모 자식 간을 이간질하는 못된 며느리가 될 것이고, 친정 부모님에게는 걱정거리가 될 뿐이었으니까.
그래서 참고, 또 참았다.
시호에게 요리는 스트레스와 같은 말이었다.
그런 이유로, 이혼하고 가장 좋은 점 부동의 1순위는 바로 끼니를 내 맘대로 먹어도 된다는 거였다.
“제가 하겠습니다.”
“뭘?”
“식사 때마다 제가 다 만들 테니까 선배는 드시기만 하십시오.”
와아. 속으로 탄성을 내뱉은 시호가 윤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가 미간을 좁혔다.
“왜 그러십니까?”
“태어나서 들은 말 중에 가장 설렜어, 방금.”
윤기가 고개를 돌리며 커다란 손으로 제 목덜미를 덮었다.
“어? 설마 부끄러워하는 거야?”
“……아닙니다.”
“얼굴이 좀 빨개진 것 같은데?”
그의 손이 급히 얼굴을 덮었다. 시호는 웃음을 터뜨렸다.
“얼음인간이 수줍어할 줄도 알아?”
그녀가 장난스러운 눈길로 요리조리 살피자, 윤기가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눈을 가렸다.
“어?”
“……그래서 오늘 오실 겁니까?”
시야가 가려지자 윤기의 목소리가 더욱 또렷하게 들리는 듯했다.
“손 좀 내려 줄래?”
“온다고 하시면 내리겠습니다.”
허. 이것도 협박의 일종이 아닐는지.
하지만 거대하고 차가운 모습답지 않게 귀여운 협박이었으므로, 시호가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손 아래 드러난 붉은 입술이 살포시 위로 들리는 모습에 윤기의 미간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그런데 말이야. 내가 저녁을 먹으러 가면 나 너무 나쁜 년 같지 않을까?”
나쁜…… 뭐?
“난 아직 네 마음에 대해 확답하지 않았잖아. 그런 상태에서 밥을 얻어먹는 건 좀. 거기다 술자리까지.”
시호가 혀로 입술을 살짝 축였다. 윤기의 눈에 욕망이 치솟았다.
“만약 소설이나 드라마였으면 나 엄청 욕먹었을 장면이야. 좋아하는 마음 이용해서 어장 관리 한다고.”
“하셔도 됩니다.”
“뭐라고?”
“당사자가 허락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시호가 입을 벌렸다.
“남들이 뭐라든 상관없습니다.”
어이가 없다는 뜻이었지만, 윤기의 눈에는 그녀가 하는 모든 행동이 유혹적으로 보였다.
“얘가 정말…… 철저한 사람인 줄 알았더니 사기당하기 십상이겠어.”
그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모습까지 사랑스러우니. 중증이었다.
“너 나중에 계약서 꼼꼼히 읽어 봐야 한다?”
“마음껏 이용하시고 관리하셔도 됩니다. 마지막 정착지가 저이기만 한다면.”
아. 이번 건 좀 셌다.
시호는 저도 모르게 심장 부근 옷자락을 꼭 쥐었다.
서서히 스며드는 관계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급발진으로 다가오는 것이 이렇게 설렐 줄은 몰랐다.
“왜 그러십니까?”
좀 두근두근해서, 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 그랬다간 정말로 어장 관리라는 걸 해 버린 것이 될 것 같다.
“그럼 오늘은 오랜만에 만난 선후배가 회포를 푸는 자리로 하자.”
“뭐든 좋습니다. 선배와 같이 있기만 한다면.”
기윤기 이 자식…….
사람 설레게 하는 말이 뭔지 너무 잘 아는 거 아냐?
시호가 윤기의 손목을 붙잡아 제 얼굴에서 떼어 냈다.
“이제 집으로 가자. 감기 걸리겠어.”
윤기는 그대로 시호의 손을 꽉 잡아 마디마디를 얽었다.
“뭐야?”
“감기에 걸리면 안 되니까요.”
“참나. 손잡으면 감기에 안 걸린대?”
“체온 유지를 위해선 벗은 몸이 맞닿아 있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데. 지금 선배가 맨살을 드러낸 곳은 손뿐이라서요.”
묘한 말과 시선에 시호가 손을 빼내려 했다. 혹여 이어진 손을 통해 뛰는 심장을 들키기라도 할까 봐.
그러나 윤기는 힘을 주며 더 깊게 손가락을 얽었다.
“안 됩니까?”
“……안 돼. 어장관리녀로 욕먹고 싶지 않아.”
“누구에게 욕을 먹는다고 그러십니까.”
“그냥. 우리를 보고 있는 시선들이 느껴지는 것 같아.”
‘우리’라고 한데 엮인 말이 듣기에 썩 좋았다.
윤기가 그녀에게 더 가까이 다가섰다.
“제가 다 막아 드리겠습니다.”
그래, 이 문짝만 한 몸이라면 뭔들 못 막아 내랴 싶었다.
그래도 시호는 손을 빼냈다.
“믿음이 가기는 하나.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돼. 명확한 사이도 아닌데 손잡고 그러는 거, 좀 그렇거든.”
윤기가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시호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뭐든 포용해 줄 것 같지만 의외로 선이 명확한 점. 이런 면도 좋아했다.
문을 잠그고 나온 그들은 차에 올라탔다.
“감기 걸리면 안 되니까 히터 조금만 틀게.”
미약하게 히터를 튼 시호가 윤기를 보았다.
“아파트에 올라갈 때 괜찮을까? 엘리베이터에 사람이 없어야 할 텐데.”
맨몸에 커다란 타월을 두르고 있는 모습은 물론 멋있었지만, 돌아다니기엔 그림이 좀 이상하기는 했다.
“괜찮습니다.”
“빨리 가자. 감기 걸리면 큰일 나.”
“씻고 바로 내려오십시오. 준비해 놓고 있겠습니다.”
그녀가 픽 웃었다.
“우렁 각시 같다. 아, 우렁 총각이라고 해야 하나.”
윤기는 저로 인해 웃는 시호의 모습을 황홀한 눈으로 보았다.
그림으로 그려서 영원히 보관하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수련관은 어땠어?”
“좋았습니다. 통풍도 환기도 다 잘 될 것 같고, 라커룸과 샤워실의 크기와 시설도 마음에 듭니다.”
“잘됐다. 혹시 계약 끝나는 다른 선수도 있어? 물론 내가 따로 알아보긴 할 건데. 미리 들어 놓는 게 명단 추리기에 좋을 것 같아서.”
아…….
윤기는 마른세수를 했다.
정신이 나갔나 보다. 저 수련관을 시호와 저, 둘만이 쓸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감독과 코치, 그리고 다른 선수들도 있을 텐데.
단둘이 있는 시간에 취해 잠시 현실을 망각하고 있었다.
“미안. 혹시 기분 나빴어?”
윤기의 침묵을 언짢음으로 해석한 시호가 사과를 건넸다.
“마음이 급했나 봐. 너랑 같은 시기에 계약한 선수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선수한테 그런 걸 물어보면 안 되는 건데.”
윤기는 미간을 좁혔다.
자신은 시호 생각만 하느라 현실을 잊고 있었는데, 그녀는 저와 있어도 현실을 생각하고 있었다.
마음의 크기 차를 생각하면 당연한 거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아닙니다. 안 나쁩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미안해. 사과할게.”
“그것 때문이 아니라.”
윤기가 머리를 쓸어 올렸다.
“저도 마음이 급해져서요. 선배를 안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