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8화
“나머지는 괜찮은 것 같습니다.”
자신이 담당한 영역의 마지막 수전을 점검한 윤기는 제 티셔츠를 입고 있는 시호를 보고는 흠칫했다.
자신의 티셔츠를 입고 있는, 젖은 시호의 모습은 아찔할 정도로 자극적이었다.
꼭 사랑을 나눈 후에 남자 친구의 옷을 입은 듯한…….
그가 황급히 몸을 돌렸다.
……위험하다. 진짜로.
“윤기야.”
그녀가 제 이름을 부르자 피가 더 뜨겁게 데워지는 기분이었다.
단지 이름을 불린 정도로 이토록 흥분하는데. 만약 닿기라도 한다면.
툭.
시호가 손으로 굳어진 얼굴을 가린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어디 아파?”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윤기는 입술을 깨물었다.
시호의 손이 닿은 곳이 무척 뜨거워서 녹아내리는 듯했다.
위험한데…… 도저히 쳐 낼 수가 없다.
설상가상 시호는 그의 앞으로 걸어와서 고개 숙인 윤기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몸 안 좋아?”
악문 잇새로 힘겨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아닙니다.”
“얼굴이 빨개진 것 같아. 열이라도 오르는 거 아냐?”
감기 같은 게 아니라면 윤기의 얼굴이 붉어질 리가 없었다.
“잠깐 있어. 수건 가져올게. 그거 걸치고 병원에 가자.”
윤기는 나가려는 시호의 손목을 힘껏 붙들었다가 이내 손에 힘을 뺐다.
그러나 놓지는 않았다.
“괜찮습니다.”
“뭐가 괜찮아. 힘들어 보이는데.”
시호의 손이 제 얼굴 쪽으로 다가왔다. 이마나 뺨을 감싸 열을 재 보려는 듯했다.
그 순간, 윤기는 레버를 돌렸다.
촤아아…….
머리 위로 미지근함과 차가움 사이 정도의 온도를 지닌 물이 쏟아졌다.
놀랐음에도 시호는 높은 비명 한 번 지르지 않았다.
그저 뒤로 몇 걸음 물러서서 도대체 이게 뭐냐는 눈빛으로 윤기를 볼 뿐이었다.
“하계 훈련 때가 생각나서…… 근처에 계곡이 있었던…….”
윤기는 눈을 질끈 감았다.
망했다. 제 상태를 들키지 않으려 지나친 무리수를 던지고 말았다.
“계곡에서 편 갈라 물싸움했을 때 말하는 거야?”
슬쩍 눈꺼풀을 들어 올리니, 시호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고 자신을 보고 있었다.
눈에 승부욕이 은근히 타오른 채.
“그때 네가 속한 팀이 이겼었나?”
어쩐지 스위치를 잘못 건드린 듯한 기분이 든다.
“그날이 기억에 오래 남더라고. 져 본 적이 거의 없어서 그런지.”
시호가 옆 수전으로 손을 뻗었다.
“해보자는 거지?”
“선배, 그런 의미가 아니라…….”
해바라기 수전에서 샤워기를 빼낸 시호가 윤기를 향해 물을 틀었다.
쏟아지는 물줄기를 팔로 막아 내는 윤기를 보며 시호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난 팔 안 들었고, 넌 들어서 막았으니까 내가 이긴 거다?”
뿌듯한지 아주 조금 높아진 목소리가 귀여워서 윤기는 그만 픽 웃고 말았다.
머리 꼭대기까지 아슬아슬하게 달아오르던 열기가 식고, 그 자리에 장난기가 차올랐다.
어린아이처럼 은근 신이 난 시호의 기분을 깨뜨리고 싶지 않았다.
“아픈 척하면서 물을 뿌려? 기윤기, 그렇게 안 봤는데 말야.”
“죄송합니다.”
윤기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렇게까지 숙일 필요는 없고.”
시호의 말에도 윤기는 요지부동이었다.
“농담이야. 고개 들어도 돼.”
“아닙니다. 잘못했습니다.”
민망해진 시호가 그에게 한 걸음 다가갔을 때.
윤기가 재빨리 샤워기를 쭉 빼내어 시호에게 따뜻한 물을 뿌렸다.
“기윤기!”
시호가 커다란 소리로 그를 불렀다. 이렇게까지 목소리를 크게 내는 건, 기합을 넣을 때 빼고는 거의 없는 일이었다.
언제나 차분히 조용히 생활했고, 결혼하고 나선 더욱 그러했다.
윤기도, 시호 스스로도 처음 듣는 그녀의 높은 목소리가 물장난의 시작을 알리는 축포가 되었다.
여덟 개의 수전을 오가며 물을 뿌리고 끼얹는 두 사람은 고등학생일 때로 되돌아간 것처럼 보였다.
피하려는 시호의 팔을 붙잡은 윤기가 샤워기로 그녀의 얼굴을 겨눴다.
약한 수압이 시호의 머리와 뺨을 적셨다.
“기윤기! 너 가만 안 둬, 진짜!”
“그럼 놔 드리면 안 되겠군요.”
오늘, 윤기의 얼굴에는 몇 번이고 미소가 번졌다.
시호가 결혼한 후로 더욱 웃음이 사라지고 차가워졌던 그다. 친한 친구들조차 전처럼 친밀히 대할 수 없었다.
그런 그가 지금 웃고 있었다.
해맑은 소년처럼.
시호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외 활동에 참여하여 형식적인 미소를 짓는 것을 제외하면 웃을 일이 전혀 없었는데.
그간 쌓였던 웃음이 한꺼번에 터지는 기분이었다.
“이거 놓고 정정당당하게 승부하자, 어때?”
“손을 뒤로 두고 레버를 붙잡으려는 분이 할 말은 아닌 듯싶습니다만.”
윤기가 시호를 제 쪽으로 더 당겼다.
“아……!”
그녀가 비틀거리며 그의 품에 안겼다.
윤기의 맨가슴에 시호의 뺨이 닿았다.
당황하여 벌어진 입술 틈으로 하, 하고 내쉰 그녀의 숨결이 윤기의 심장을 데웠다.
윽, 그가 그녀의 어깨를 붙잡으며 이를 악물었다.
식히기가 무섭게 도로 피어오른 열기가 윤기를 잠식했다.
“설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녀가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윤기는 숨을 삼켰다.
냉정했지만 어딘가 희미한 불길이 감돌아서 눈을 뗄 수 없던 눈동자가 바로 지척이었다.
“윤기야.”
젖은 입술이 움직이며 제 이름을 발음하자 한 곳으로 피가 몰렸다.
“방심하지 마.”
시호가 재빨리 레버를 돌렸다.
그들의 머리 위로 물줄기가 장마처럼 쏟아졌다.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윤기를 보고 시호가 눈을 접으며 아이처럼 웃었다.
“놀랐어? 완전히 넋이 나갔네.”
그녀의 천진한 미소에 영혼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오늘, 시호의 숨겨진 면면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오직 자신만이 목도하고 있다.
벼락을 맞은 충격이 이러할까.
아니, 이보단 약할 것이다.
그러다 시호까지 젖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윤기가 정신을 차리고 물을 잠갔다.
“선배까지 다 젖지 않습니까.”
“적어도 진 건 아니잖아. 그럼 우리 비긴 거다?”
‘우리’라고 묶이는 말이 좋아서 윤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티셔츠를 비틀어 물기를 짜내는 시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윤기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아…….”
그의 엄지가 시호의 입술 끝을 부드러이 훔쳤다.
느릿하게 문지르는 손길엔 제법 짙은 농밀함이 묻어 있었다.
“물이 고여서요.”
입술가에 물이 고이다니.
말도 안 되는 말임을 안다.
그러나 갈망하듯 제 입술을 애타게 바라보는 윤기의 손을 선뜻 쳐 낼 수가 없었다.
시선에 묶이기라도 한 듯 몸이 움직이질 않는다.
“선배.”
낮은 음성이 귀를 핥듯이 파고들었다.
“보고 싶었습니다.”
귓가에 아찔히 감겨 오는 목소리에 시호의 등줄기가 찌르르했다.
“선배가 떠난 이후로 줄곧.”
서로의 눈동자 속에 서로의 모습이 담겼다.
묘한 열기를 품은 밀도 높은 침묵이 그들 사이를 가득 메웠다.
“다시는 떨어지고 싶지 않습니다.”
시호는 애써 태연한 척 턱을 조금 치켜들고 몸에 힘을 주었다.
이러다 제 심장이 쿵쿵 뛰는 소리가 윤기의 귀에까지 들리면 어쩌나 싶었다.
“침묵은 긍정이라던데.”
윤기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눈을 내리깔고 시호의 입술을 응시했다.
“대답하신 걸로 알면 되겠습니까.”
이 애가 이렇게 유혹적이었나.
아님 내 눈에 뭐가 씐 건가.
숨을 얕게 들이마신 시호가 그의 가슴팍을 살짝 밀었다.
“있어. 별채에서 수건 가져올게.”
“제가 가겠습니다.”
“감기 걸려. 운동선수가 몸 소중한 줄 알아야지.”
“제겐 선배 몸이 더 소중합니다.”
누군가에게 소중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얼마 만인지.
어쩐지 울컥해서 시호는 입술을 조금 세게 깨물었다.
“선배.”
윤기가 손으로 그녀의 턱을 잡아 입술을 조금 아래로 벌렸다.
“읏…….”
“이 나쁜 버릇 때문이라도 옆에 꼭 붙어 있어야겠군요.”
문질. 손가락의 뜨거운 온기가 입술을 덥혔다.
아슬아슬하게 유지하고 있던 벽이 무너져 내리고 위험한 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얼른 갔다 올게.”
빠르게 샤워실을 나선 시호는 너른 대청마루를 지나 신발을 신고 별채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고 신발을 벗자마자.
스르르. 바닥에 주저앉았다.
“……하.”
결혼 생활 내내 느꼈던 긴장감과는 사뭇 다른 종류의 긴장이 그녀를 덮쳤다.
일순간에 사냥감이 된 기분이었다.
게다가 소중하다니…….
사냥감을 노리는 포획자 같으면서도.
동시에 설탕 가루로 만든 인형을 보는 듯 애틋하고 애타는 눈길로 제게서 눈을 떼지 않던 윤기의 검은 눈동자 안에 여전히 갇힌 기분이었다.
티셔츠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바닥을 적셨다.
시호는 벽을 짚고 일어났다.
빨리 가져다줘야지.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이야.
하루라도 훈련을 빠지는 것이 훗날 얼마나 큰 타격으로 돌아오는지 잘 알고 있는 그녀였다.
시호는 화장실에 비치된 타월을 두 개 꺼내어 작은 것은 제 몸에 두르고 커다란 것은 손에 들었다.
다시 신발을 벗고 대청마루에 올라 남자 라커룸 안 샤워실로 들어갔다.
벽에 기대고 있던 윤기가 그녀를 보자마자 몸을 바로 세웠다.
“얼른 덮어.”
“몸이 얼었나 봐요.”
시호의 눈이 커졌다. 벌써 감기에 걸렸나?
“덮어 주세요.”
그가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온통 근육뿐인 단단하고 큰 몸이 성큼 가까워지자 위압감이 느껴져, 시호는 저도 모르게 뒤로 한 발 물러섰다.
멈칫한 윤기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선배.”
“……응.”
“너무 먼 것 같은데.”
그의 눈이 한층 더 짙어졌다.
“가까이 오세요.”
“그럼 내 어깨에 두른 타월이 흘러내릴 것 같아. 네가…….”
“제가 잡고 있겠습니다.”
시호가 멀어진 만큼 다가온 윤기가 손을 뻗어, 그녀의 가슴께에 오는 타월의 끝자락을 살며시 붙잡았다.
몸에 닿지는 않았지만 손을 아주 조금이라도 움직인다면 툭 닿을 듯 아슬아슬한 거리였다.
시호는 평정을 되찾으려 애썼다.
“몸 좀 낮춰 봐.”
윤기가 상체를 숙였다.
순간 더운 숨이 시호의 목덜미에 훅 끼쳤다.
그녀가 움찔하자 더욱 낮아진 그의 목소리가 탁하게 갈라졌다.
“죄송합니다. 호흡 조절이 잘 안 돼서.”
“……괜찮아.”
시호는 가지고 온 커다란 타월을 그의 어깨에 두르고 앞에서 매듭을 가볍게 묶었다.
“운동은 잘 하고 있어?”
“매일 똑같습니다.”
“잘하고 있네. 기복이 없는 사람이 이기는 거야. 잘 알고 있겠지만.”
확실히 윤기는 자신은 기복이 없는 편이라 여겼다.
운동도, 시호를 향한 감정도.
처음 그 마음 그대로 쭉 유지되고 있으니까.
그때 윤기의 눈에 시호의 속눈썹 끝에 매달린 물방울이 들어왔다.
그것을 입술로 머금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선배.”
젖은 음성에 시호는 등줄기가 찌릿했다.
“이제 그만 가자.”
윤기의 입에서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말이 나올 것 같았다.
“아직 대답을 못 들었는데.”
그녀의 속눈썹에 매달려 있던 물방울이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이 부서졌다.
타월의 매듭을 묶고 멀어지려는 시호의 손을 붙잡은 윤기가 손가락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
“기다리고 있으면.”
흣…….
온몸 가득 퍼져 나가는 요요한 열기에 시호가 어깨를 움츠렸다.
“와 주시는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