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7화
이렇게 말하면 윤기가 고개를 돌릴 줄 알았다. 당황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그럴 사람도 아니고.
하지만 시선을 거두기는커녕 그는 아예 몸을 제 쪽으로 홱 돌렸다.
“보고 싶었습니다.”
오늘 도대체 몇 번째 놀라는 건지. 이젠 셀 수도 없다.
“아주 많이.”
낮게 깔리는 목소리 끝엔 아무리 무심한 이라도 쉬이 알아챌 수 있는 그리움이 묻어 있었다.
이번엔 자신의 착각이 아닌 듯하다. 이건 윤기의 수려한 외모 때문이 아니라…….
내려가는 엘리베이터가 10층을 지나고 있었다.
6층을 지날 때에도 두 사람은 입을 다문 채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정적을 깬 것은 시호였다.
“……좀 놀랐어. 생각도 못 한 말이라.”
그렇겠지. 당신에게 나는 그저 같은 고등학교 검도부 후배일 뿐이었을 테니까.
“사실, 난 하루하루 사는 데 바빠서 솔직히 생각 못 했거든. 너도 그렇고, 우이고 검도부 애들도 그렇고.”
예상한 바라서, 윤기는 시호의 말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고마워. 생각해 줘서.”
그녀가 싱긋 웃었다.
“그래도 네가 날 좋아하긴 했잖아.”
윤기의 눈이 커졌다.
“선배들 중에서는.”
“알고 계셨습니까?”
동시에 내뱉은 말에 기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똑같이 7음절인데 의미는 판연히 달랐다.
이제 와서 모른 척하기엔 놀란 속내를 얼굴에 너무나도 선명히 드러낸 시호였다.
땡. 지하 주차장에 도착한 엘리베이터가 양쪽으로 열렸다.
“내리시죠.”
“어어, 응.”
어색하게 내린 시호는 주차된 자신의 차량으로 향했다. 뒤에서 걸어오는 윤기가 무척이나 신경 쓰였다.
그러니까 나를 좋아했다는…… 그런 의미인 거, 맞지?
선배들 중에서 그나마 좋아했다는 그런 뜻이 아니라.
어머, 그랬구나! 몰랐네. 고마워.
이렇게 웃으며 넘어가도 될 일이었다. 벌써 10년 전의 일이니까.
그러나 가볍게 넘어갈 수 없는 이유는, 여전히 그 마음이 진행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윤기의 눈빛 때문이었다.
시호가 운전석에, 윤기가 조수석에 탔다.
“출발할게.”
차에 탄 순간부터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와 도로에 합류하기까지 시호는 정면을 주시했다.
“고마워.”
결국 그녀는 웃으며 넘어가는 쪽을 택했다.
“전혀 몰랐네. 난 그런 의미로 말한 게 아닌데.”
앞을 보던 윤기의 시선이 다시 이리로 향하는 게 느껴졌다.
정말 옆얼굴 뚫리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그립다, 그때가. 운동만 하면 됐었는데. 어른이 되니까 신경 써야 할 게 참 많아지더라.”
지난 시절을 회상하며 훈훈하게 얘기를 마무리하면 될 것 같았다.
“어떻게 티를 하나도 안 냈어? 아무도 몰랐을걸.”
윤기가 저를 잘 따랐다고는 하지만 대련을 청한다거나 훈련 끝나고 물을 건네준 게 다였다.
워낙에 무뚝뚝하고 차가운 애라 그 정도의 행동만으로도 ‘시호를 잘 따른다’라는 말이 돌았다.
“티 내도 됩니까?”
신호를 받은 차가 서서히 멈춰 섰다.
“뭐?”
절절히 끓고 있는 눈에 시호가 담겼다.
“지금부터 티 내도 되냐고 물었습니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하나. 난감하네.
시호는 일단 ‘웃으며 넘기기’를 택했다.
“하하. 뭐야. 어쨌든 땀에 절어 있던 나 좋아해 줘서 고마워. 기윤기 선수 첫사랑이 나라니, 대대손손 자랑해도 모자라다. 아, 첫사랑은 좀 오버인가?”
당황스럽다. 지금도 여전히 저를 좋아하기라도 한단 말인가?
결혼까지 했었던 나를? 계속?
“첫사랑 맞습니다.”
“어…….”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 짝사랑이기도 하고.”
시호의 심장이 쿵 떨어졌다.
핸들을 붙잡은 손에 힘이 꾹 들어갔다.
마침 신호가 바뀌어서 시호는 운전에 집중하는 척하며 일단 대답을 유보했다.
윤기도 대답을 강요하지 않고 기다렸다.
침묵 속에 차가 한옥 앞에 도착했다. 대문 앞 주차 공간에 차를 대고 시동을 껐다. 엔진 소리마저 멎으니 완벽한 고요가 들이닥쳤다.
“내리자. 아직 공사 중이라 군데군데 위험한 곳이 있을 거야.”
시호가 먼저 내렸고 이윽고 윤기도 따라 내렸다.
을씨년스러웠던 기존의 썩어 빠진 나무 문은 단단하고 윤기 나는 새로운 문으로 갈려 있었다.
시호가 도어록 숫자를 눌러 문을 열었다.
“들어가자.”
끼이익 소리가 날 것 같은 문이 조용히 열렸다.
“어때? 괜찮지?”
깔끔하게 정비된 정원과 조경수들, 그리고 넓게 펼쳐진 기와 아래 반질반질한 대청마루.
커다란 본채 옆에는 소박하지만 정결한 별채가 있었다.
윤기의 시선을 따라간 시호가 흐뭇한 얼굴로 말했다.
“저긴 별채. 내 사무실로 쓰려고.”
“늘 저기 계시는 겁니까?”
“그렇지? 웬만한 일 없으면.”
선배가 언제나 상주하는 수련관이라니. 천국이 아닐까.
“별채 봐 볼래? 아니면 마루에 앉아 있어도 되고. 난 수전 좀 점검하고 올게.”
“어디입니까?”
“본채 안에.”
“같이 가요. 이젠 혼자 안 보낼 겁니다. 어디든.”
윤기는 강인한 눈빛으로 시호를 보았다. 그녀의 마음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신발은 벗고 올라가면 됩니까?”
“으응.”
윤기가 앞서 걸었다. 듬직한 뒷모습을 바라보던 시호는 가슴께를 꾹 누르고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은 신발을 벗고 대청마루에 올라 거대한 미닫이문을 양옆으로 열었다.
“바닥은 단풍나무로 깔았고, 층고도 보통보다 더 높게 올렸어.”
들어가서 오른쪽 벽면은 전체가 거울이었고 남자 라커룸, 사무실, 여자 라커룸, 휴게 공간이 왼쪽에 일렬로 배치되어 있었다.
그들이 들어온 문의 반대쪽 역시 열면 뒤뜰이 나오는 미닫이문이었고 위쪽에도 창문이 있어 채광과 통풍이 아주 잘 될 듯했다.
“사무실 위쪽에는 숙소도 있어. 지방에 거주하거나 사정이 여의치 않은 사람들을 위한.”
시호가 어깨를 으쓱했다.
“첫걸음은 화려하고 싶었거든.”
그녀가 턱짓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쪽이야. 아직 전기가 안 들어와서 불 못 켜니까 조심해.”
샤워실은 라커룸 안에 있었다.
남자 라커룸에 들어가자마자 왼쪽에 있는 문을 여니, 해바라기 수전 여덟 개가 적당한 간격을 두고 설치되어 있었다.
“하나씩 틀어 보면 됩니까?”
“응. 끝에서부터 틀면서 만나자.”
그들은 양쪽 끝에서부터 물을 틀어 보기 시작했다.
윤기가 세 번째 수전의 점검을 끝내고, 시호가 막 세 번째 수전을 점검하던 때였다.
“어라.”
“왜 그러십니까?”
윤기가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이게 안 되네.”
시호가 몇 번이고 수전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지만 물은 나오지 않았다.
“제가 해 보겠습니다.”
윤기가 조작해 보았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불량인 것 같은데.”
“그러게. 미리 알아서 다행이다.”
윤기가 자신의 영역으로 돌아가고 시호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수전을 틀어 보았다.
쏴아아!
둑이 터진 듯 물줄기가 세차게 퍼졌다.
“선배!”
시호는 얼른 레버를 돌렸지만 물은 계속 쏟아져 내렸다.
황급히 다가온 윤기가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아 물이 쏟아지지 않는 곳으로 옮긴 다음, 레버를 세게 당겼다.
하지만 물은 멈추지 않았고, 설상가상 무얼 잘못 건드렸는지 헤드의 구멍에서 물이 온 사방으로 분출했다.
거세게 내리는 물줄기를 피할 곳이 없었다.
갑자기 벌어진 아비규환이었다.
이를 악문 윤기가 수전을 몇 번 세게 내리쳤다.
물줄기가 약해지더니 이내 쫄쫄거리며 멈췄다.
뚝. 또옥. 뚝.
물방울이 바닥에 떨어져 잘게 부서졌다.
“하…….”
시호가 망연히 숨을 내뱉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선배, 괜찮으십…….”
윤기의 눈이 커졌다.
물에 젖어 몸에 찰싹 달라붙은 하얀 블라우스가 속옷의 형태와 몸의 굴곡을 뚜렷이 드러내고 있었다.
윤기는 황급히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젠장.’
정신을 다른 곳으로 돌리지 않으면 몸이 반응할 것 같았다.
윤기는 역시나 흠뻑 젖어 버린 자신의 남색 티셔츠를 벗었다.
오랫동안 운동으로 다져진 다부진 근육을 타고 물방울이 굽이굽이 흘러내렸다.
“선배. 이거 입으십시오. 젖긴 했지만…… 안 입는 것보다는 나을 겁니다.”
윤기는 여전히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린 채 팔만 뻗어 티셔츠를 건넸다.
시호는 고개를 숙여 젖은 상체를 내려다보았다.
이런…… 다 비치네.
“잠시만 여기에 있어. 수건이 별채에 있어서.”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아냐. 옷 다시 입고 기다리고 있어.”
샤워실을 나서려던 시호는 음, 하고 잠깐 생각하더니 다시 들어왔다.
“이왕 젖은 김에 점검 다 해야겠다. 다른 것도 불량일지 모르니까. 계속 그렇게 돌아 있어 줄래?”
“선배 힘으로 안 되면 어떡하려고 그러십니까.”
윤기가 들고 있는 티셔츠를 살짝 흔들었다.
젖어 다 비치는 시호를 보며 신체를 제어할 자신이 없었다.
“……이거 입어 주십시오.”
시호도 자신의 꼴이 민망하다 여겼는지 이번엔 순순히 윤기의 티셔츠를 건네받아 입었다.
‘되게 크다. 잠옷으로 딱이네.’
파자마조차 격식 있는 것으로 갖춰 입어야 했던 결혼 생활에 질렸으나, 여전히 그 파자마를 입고 잠자리에 드는 시호였다.
오늘만 입어야지, 내일은 꼭 다른 것으로 사야지, 다짐했지만 다음 날이면 잊었다.
이혼하고 집 계약과 이사, 한옥 매입 후 공사 진행 등 나름대로 바빴던 탓도 있고.
습관이 무서운 탓도 있다.
침실에 들어가면 곧바로 잠옷으로 갈아입고 눕는 것이 몇 년째 몸에 배어서, 잠옷으로 삼을 티셔츠를 사야겠단 생각은 아침에 옷을 갈아입을 때 잠깐 하고 곧 잊었다.
내일은 진짜 사야지. 기윤기 티셔츠와 같은 사이즈로.
시호는 수전을 마저 점검하는 윤기를 보았다.
현역 선수답게 몸 관리가 무척 잘 되어 있었다.
도장에서 운동을 하지 않을 때면 수영을 한다고 했던 말을 지난날 얼핏 들은 것도 같다.
일자로 떡 벌어진 어깨 아래에는 온통 잘게 쪼개진 단단한 근육뿐이다.
총알이 날아와도 박히지 못하고 튕겨져 나갈 듯했다.
죽도에 맞아도 아프지 않겠다. 도리어 윤기의 몸에 부딪친 것이 부서져 버리지 않을까.
‘저 몸에 부딪치면 즉사할 거야.’
하긴, 부딪칠 일이 뭐가 있겠냐만.
운동을 다시 시작할 것도 아니고.
대련이 아니라면 저런 전차 같은 몸과 부딪칠 일은 없을 것이다.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몸에 물기가 근육을 타고 굽이쳐 흐르니…… 묘하게 선정적인 느낌을 주었다.
절경이라는 말이 떠오를 정도로 아찔하고 요요했다.
그래서일까. 순간 시호는 그의 품에 안기는 상상을 해 보았다.
저 몸을 끌어안으면 마치 절벽으로만 이루어진 산을 안는 느낌일 것 같다.
지나치게 단단하고 딱딱하지만 도리어 부드러운 것을 안을 때보다 훨씬 기분이 좋을 것 같은…….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화들짝 놀라 시선을 돌리려는데.
“선배.”
윤기와 눈이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