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화
회의를 마치고 대표실로 돌아온 재혁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이제 좀 줄어드나 싶던 업무는 오늘 회의를 기점으로 또다시 산더미처럼 쌓였다.
해결해야 할 일들만 생각해도 모자랄 판에, 그의 머릿속을 온통 차지한 사람은 바로 아내였다.
‘서시호.’
재혁은 멈칫했다.
이제 시호를 아내가 아니라 전처라고 불러야 했다.
“……하.”
그는 주먹을 한 번 꽉 쥐었다. ‘전처’라는 표현이 아직까지 낯설기 그지없었다.
시호는 어떨까. 그녀에게 자신은 이미 ‘전남편’으로 완전히 치환된 걸까.
아침에 이혼 기사 발표 날짜를 최종적으로 조율하기 위해 시호를 만나러 카페로 향했었다.
먼저 가서 태블릿으로 업무를 보고 있는데,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가까워지더니 이내 자신의 앞에 누군가 앉았다.
몸에 딱 붙는 붉은 원피스와 역시 붉게 칠한 입술, 높은 하이힐, 살짝 웨이브를 넣어 푼 머리.
처음엔 다른 사람인 줄 알았다.
함께 살 때에는 언제나 몸매가 드러나지 않는 얌전한 옷만 입었고, 머리도 흐트러짐 없이 단정히 묶었었다.
한 달 만에 사람이 이렇게 변할 수가 있는 것인지.
시호는 놀란 자신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나는 이런 사람이었다는 듯 당당한 눈빛이었다.
같이 살 때에는 볼 수 없었던 매혹적인 빛이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그간 자신이 소홀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건 시호가 싫어서가 아니라, 일이 너무 바빠서 그랬다.
그룹을 안정시키고, 더욱 확장시키는 것이 아내인 시호를 집에서 인정받게 하는 길이라고 믿었다.
RS그룹의 가치가 더 올라가야 시호도 좋을 것이 아닌가.
비즈니스는 타이밍을 놓치면 끝이지만, 아내는 언제까지고 내 옆에 있을 사람이니까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느 순간부터 말수가 줄고, 낯이 어두워지고 야위어 가는 시호의 모습을 눈치챘을 땐 이미 늦은 뒤였다.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 느껴졌던 반짝거림, 생동감과 활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손목에 붕대를 감고 누워 있던 시호의 눈에선 아예 생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이러다 죽겠다 싶어, 재혁은 결국 이혼에 응했다.
노발대발하는 부모님을 달래 놓고, RS그룹을 정점으로 끌어올린 후에 시호를 다시 데려오자고 결심했다.
솔직히 말하면, 아내였을 때보다 검도 선수였을 때의 시호가 더 매력적이었다.
절제 속에 숨어 있던 도발적인 아름다움에 강하게 이끌린 재혁은 시호를 반드시 자신의 여자로 만들겠다고 다짐했었다.
하지만 결혼 후, 시호에게선 도발적인 면모를 발견할 수 없었다. 오직 절제, 절제 또 절제뿐이었다.
RS그룹 며느리로서는 아주 잘하고 있었지만, 여자로서는…… 어딘지 심심하고 아쉬워졌다.
온종일 어머니께 끌려다니느라 피곤한 것은 알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분위기를 잡고 있는 도중에 잠이 들어 버린 것이 여러 번.
[시호야. 오늘 너무 예쁘다.]
바쁜 아침 와중에도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고 입술로 목덜미를 지분거리며 애정 표현이라도 나눌라 치면.
[식사 준비 늦겠어.]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저를 단호히 내치고는 그대로 나가 버렸다.
둘만 있을 때도 절대 흐트러지지 않았다. 아내가 아니라 수도승과 사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짜증과 애원이 섞인 안달을 내는 날이면, 시호는 달갑지 않게 거의 의무적으로 자신을 받아 주었다.
흥미가 좀 식긴 했지만 그게 싫어하게 되었단 뜻은 아니었다. 재혁은 여전히 시호가 좋았다.
다만, 그녀의 마음을 살필 정도의 여유가 제게 없었을 뿐이다.
[생각 추스르고 다시 돌아와.]
그래서 그녀가 원하는 대로 이혼을 해 주었다. 바람을 쐬게 해 줘야 또 돌아올 마음이 생길 테니까.
재혁은 시호가 제게로 돌아올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혼을 요구한 이유는 어머니 때문이지, 결코 제가 싫어서는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 증거가 바로 오늘이다.
시호는 놀랍도록 달라진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의 시선을 사로잡기 위해서 말이다.
몸에 달라붙는 붉은 원피스는 그녀의 흰 피부와 몸매를 여실히 드러내 주어 우아하면서도 섹시한 분위기를 풍겼다.
머리를 귀 뒤로 넘길 때 드러난 작은 진주 귀걸이는 앙증맞았고, 길고 매끈한 다리와 깨끗한 목선이 재혁의 시선을 매혹적으로 끌어당겼다.
그녀는 결혼 전보다 훨씬 더 도발적인 눈빛으로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재혁의 눈에는 시호가 ‘나를 붙잡아 줘.’라고 신호를 보내는 것으로 보였다.
아닌 게 아니라, 아침에 만나고 온 순간부터 머릿속을 점령한 시호 때문에 재혁은 애가 탔다.
꼭 신혼 때처럼 보고 있기만 해도 몸이 달아올랐다. 품에 안고 입을 맞추며 오래도록 사랑을 나누고 싶었다.
얼른 바쁜 일을 끝내고, 온전히 그녀에게 집중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 찾아갈 것이다.
뭐든 쉽게 손에 얻고, 쉽게 풀리는 인생을 살아온 재혁은 이번에도 자신의 뜻대로 풀릴 것이라 생각했다.
“내 아내. 서시호.”
그래, 이게 자연스럽다. 시호는 전처가 아니라 여전히 자신의 아내였다.
달력을 보던 재혁은 인터폰을 들었다. 적어도 다음 주 중에는 연교에 내려갈 수 있도록 일정을 조정해야지.
“윤 비서. 일주일 후에 있을 임원 회의, 금요일로 당겨요. 최대한 빨리 끝낼 거니까.”
***
“정말 이걸로 끝이야?”
“예.”
“연봉이라든가, 그 밖의 처우라든가…….”
“선배가 생각하시는 조건으로 하겠습니다.”
“내가 어떤 조건을 생각하고 있는 줄 알고?”
“선배는 양심적이고 공정하시니까요.”
시호가 졌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 말 들으니까 나쁜 마음 못 먹겠네. 걱정 마. 현재 네 위치와 대우 생각해서 아주 양심적이고 공정하게 처리할게.”
윤기와 연교시청 사이의 계약 기간은 앞으로 약 2개월 남짓 남아 있었다.
목표를 너무나 쉽게 달성해 버린 시호는 어안이 벙벙했다.
그동안 시댁에서 참고 견딘 시간들이 보상으로 되돌아오는 건가, 싶기도 했다.
어쨌거나, 손에 들어온 기회는 새어 나갈 틈 없도록 꽉 붙잡아야 하는 법.
“믿고 결정해 준 만큼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그리고 잘할게.”
그녀를 빤히 보던 윤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선배.”
“응.”
“결혼 생활…… 힘드셨습니까?”
멈칫.
이내 평정을 되찾았지만 잔을 잡은 시호의 손에는 힘이 꾹 들어갔다.
“그러니까 이혼했겠지?”
“죄송합니다. 신경이 쓰여서요.”
“넌 예전부터 그랬어. 핵심을 곧바로 찌르고 들어왔지. 말도, 칼끝도.”
시호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참 돌려 말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기분 나쁘셨다면 사과드립니다.”
“아냐. 뒤에서 이러쿵저러쿵 추측하면서 말 도는 것보다 이게 나아.”
연교시는 결코 작지 않지만, 이곳에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니 이혼 기사가 나간다면 동창들을 중심으로 얘기가 돌 것이 빤했다.
게다가 이곳에서 검도단을 만드는 것으로도 모자라, 연교시청 소속이던 대한민국 최고 검도 선수 기윤기를 영입할 예정이니.
당분간은 입방아에 줄기차게 오르내리리라.
“왜 이혼하신 건지 알고 싶습니다.”
“보통 이유를 물어봐도 되냐고 하던데. 참 돌려 말하기 못 해.”
“그래서…… 싫으십니까?”
순간 윤기의 목소리가 조금 떨린 것도 같았다. 내 착각이겠지, 시호는 생각했다.
그럴 리가 없으니까. 어떤 상황에서도 기윤기는 침착하고 냉정한 사람이니.
“전혀. 뒷담화보다 앞담화가 훨씬 낫다니까. 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를 대라면 고부 갈등이랄까.”
시호가 컵을 살짝 돌렸다. 안에 있는 찻물이 작은 소용돌이를 그렸다.
“곧 기사 나올 테지만, 그냥 흔한 얘기야. 재벌가에 적응할 수 없었던 서민 출신 며느리, 결국 환경 차이를 이기지 못하고 파국. 뭐 그런 거지.”
그녀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이거 어디서도 안 한 얘기야. 너한테만 털어놓은 거니까 소문내고 다니면 안 된다?”
하지만 윤기는 따라 웃지 않았다.
“그 사람과는 문제가 없었습니까?”
“그 사람? 재혁 씨?”
시호의 입에서 재혁의 이름이 나오자 윤기가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도 남편이라고 안 한 게 어디냐며 애써 스스로를 달랬다.
“음. 술이 아니라 대낮에 차를 마시면서 얘기하려니까 좀 민망하네.”
“그럼 술 마시면서 얘기해 주십시오.”
“너 술 마시려고? 관리 안 해?”
시호의 말대로 윤기는 운동은 물론 금연과 절주로 몸 관리를 하고 있었다.
담배는 지금껏 한 번도 태우지 않았고, 술은 회식이나 뒤풀이 때 아주 가끔 한두 잔 정도 마시는 게 다였다.
“한두 잔 정도라면…….”
윤기가 심각한 얼굴로 내뱉었다. 치열한 고뇌 끝에 나온 결과라는 것을 아는 시호는 귀엽다는 듯 웃었다.
“됐어. 술은 나 혼자 마실 테니까 앞에 앉아 있기만 해, 그럼.”
“예. 제가 책임질 테니 취하셔도 됩니다.”
“와아. 기윤기 다 컸네? 그런 말도 할 줄 알고. 그래, 언제 한번 날 잡고 취하도록 마실 거니까 마음의 준비 하고 있어.”
선연히 웃는 시호의 말간 얼굴이 아플 정도로 심장을 두드렸다.
동시에 재혁의 얘기가 나와도 움찔거린다거나 흠칫하지 않고 그저 덤덤한 태도를 보이는 것에서, 전남편에 대한 그 어떤 감정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오늘 밤에 갖고 싶습니다.”
흑요석처럼 검은 눈동자가 위험하게 번뜩였다.
방금 전까지 무슨 주제로 대화를 나눴었는지조차 순식간에 까맣게 잊어버릴 정도로 아찔한 빛이었다.
“뭐……를?”
시호는 저도 모르게 컵의 손잡이를 꽉 쥐었다.
“……자리.”
내가 뭘 들은 거지? 방금 기윤기가 무슨 자리라고 했는데……? 설마 잠…….
“술자리, 오늘 갖고 싶은데. 시간 괜찮으십니까?”
시호는 다시 한 번 자기방어를 하고 싶었다. 이건 자신의 머리가 썩어서가 아니라, 그저 보기만 해도 수많은 의미를 담은 듯한 윤기의 눈빛 때문이라고.
하아. 음란마귀에 아주 단단히 씌었구나. 그녀는 머리를 쓸어 올렸다.
“글쎄. 오늘은 잘 모르겠어. 도장에 수전을 점검하러 가야 하거든.”
“수련관으로 쓸 곳 말입니까?”
“맞아.”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묘한 열기를 품은 시선이 맞부딪쳤다.
“앞으로 훈련할 곳인데 미리 봐 두고 싶어서요.”
아, 그렇겠지. 당연한 얘기다.
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아직 공사가 끝난 게 아니란 걸 감안하고 봐 줘. 그럼 차 마시고 갈까?”
두 사람은 차 맛을 음미하느라 잠시 침묵을 지켰다.
“오늘 국화차를 두 잔이나 마시네.”
“싫어하십니까?”
“아니. 평소엔 허브티만 마셔야 했거든. 근데 가끔 이것도 마셨으면 괜찮았겠다 싶어서.”
다른 한 잔은 저에 대해 얘기를 했다던 그 친구와 마신 건가. 찻잔을 입가에 가져다 대며 윤기는 눈을 내리깔았다.
시호에게 언짢은 기색을 내보이긴 싫었다. 좋은 모습만을 보이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은 시호뿐이다. 세상에서 오직 한 명.
윤기는 민주를 떠올렸다. 그가 민주의 얼굴과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이유도 역시 단 하나였다.
시호와 연락을 하고 지내는 유일한 친구이기 때문에.
이따금 위아래 학년이 섞여 있는 모임에 얼굴을 내미는 이유는 민주를 통해 혹시 시호의 소식을 들을 수 있을까 싶어서였다.
민주의 근처에 앉기는 했지만 옆에 앉거나, 닿거나, 말을 섞은 적은 맹세코 단 한 번도 없었다.
전부터 근처에서 얼쩡거리며 귀찮게 했던 사람이었다. 시호의 친구이기에 그간 참았지만…….
“왜 그렇게 무서운 얼굴이야?”
시호의 말에 윤기는 바로 눈가에 힘을 풀고 천천히 몸을 이완시켰다.
“……아닙니다. 아무것도.”
“음, 근데 그게 내가 기억하는 네 평소 얼굴이긴 해. 오늘 좀 자주 웃어서 더 대비되는 거지.”
“제가 자주 웃었습니까?”
응, 하고 시호가 미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좀 놀랐다? 너 예전엔 잘 안 웃었잖아. 시간이 많이 흘렀구나, 싶었어.”
평소에도 잘 웃지 않았지만, 시호의 결혼 소식을 들은 이후로 윤기는 전혀 웃지 않게 되었다.
친구들이 우스갯소리를 할 때 종종 올라가던 입꼬리도, 무거운 추라도 매달린 듯 움직이지 않았다.
사방이 온통 암흑이었고, 계절은 늘 혹독한 겨울이었다.
“웃으니까 보기 좋다.”
그러나 이제 윤기의 계절은 봄으로 바뀌려 하고 있었다.
“보는 사람까지 다 환해지는 기분이야.”
녹아내린 얼음이 투명한 물이 되어 흘렀고, 물이 지나간 자리에 싹이 텄다.
곧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리라. 반드시 그렇게 만들겠노라고 윤기는 굳게 다짐했다.
“나 차 다 마셨는데.”
“저도 다 마셨습니다.”
“그럼 이제 갈까? 내 차로 가자. 기 선수님한테 운전을 시킬 수는 없지.”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자신이 해도 괜찮다고 말하려던 윤기는 마음을 바꾸었다. 그녀의 공간에 발을 들여놓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다.
문을 나선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버튼을 누르려 뻗어 가던 두 손가락이 살짝 닿았다.
가볍게 웃은 시호는 아무렇지 않은 척 자신이 버튼을 눌렀다. 10층에 있던 엘리베이터는 금방 올라왔다.
밀폐된 공간에 자발적으로 갇힌 두 사람은 층수가 표시되는 램프를 주시했다.
아니, 층수표시램프를 뚫어지게 보는 사람은 시호였고, 윤기는 그런 시호를 뚫어지게 보았다.
“윤기야.”
“네, 선배.”
“나 옆얼굴이 뚫릴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