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화
시호는 살면서 지금껏 청력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자꾸만 의심을 하게 된다.
이번에도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나를…… 달라고?”
“예.”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대답하는 윤기의 모습에 혼란은 더욱 가중되었다.
무슨 뜻일까. 내가 생각하는 그게 맞나? 정말 기윤기가 원하는 게 ‘그런’ 건가?
“오늘부터 식사는 최대한 함께 하고 웬만해선 같이 있는 겁니다. 여의치 못한 상황으로 떨어져 있을 땐 틈틈이 통화를 하거나 메시지를 주고받는 것으로 하죠.”
시호의 손가락이 눈송이라도 되는 듯, 윤기가 아주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선배의 시간을 제게 주십시오.”
깃털이 내려앉기라도 한 듯 심장이 간질거려서 시호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못마땅한 듯 순간 눈을 가늘게 뜬 윤기가 엄지로 그녀의 입술을 부드럽게 눌렀다.
“이런 나쁜 버릇도 고쳐질 겁니다. 이럴 때마다 내가 막을 거니까.”
이대로 그의 가슴을 밀면 밀려나 줄 것을 알고 있다. 제게 닿는 손끝엔 아주 조금의 힘도 들어 있지 않으니까.
집요하게 시선을 얽으면서도, 윤기는 자신이 싫은 기색을 내보이면 언제든 물러서 줄 정도의 틈은 두고 있었다.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시호는 마치 움직이지 못하는 마법에라도 걸린 듯 그를 밀어낼 수가 없었다.
윤기에게서 이제껏 본 적 없는 요야한 열기가 느껴져서, 시호는 저까지 몸이 달아오르는 듯했다.
‘내가…… 미친 건가?’
오랜만에 다시 만난 후배에게 이런 감정을 느끼다니. 이혼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물론, 법적으로도 그리고 도덕적으로도 걸리는 것은 없다. 하지만 이혼할 때 ‘남자보다는 내 목표에 집중하자’고 굳게 다짐한 게 겨우 한 달 전이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너무 빠르지 않나.
게다가 윤기를 좋아하여 떨린다기보다는,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수려해진 후배가 낯설고, 또한 훅 가까워진 거리가 아찔하여 떨린다고 보는 게 맞을 듯하다.
그러다 문득, 시호는 어쩌면 이것이 일종의 테스트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검도는 무엇보다도 기운과 기력이 중요시되는 운동이다. 기합 소리로 유효 타격을 판정한다. 기합을 수반하지 않은 타격은 유효로 인정하지 않을 정도다. 눈에 보이지 않는 기(氣)를 기합으로 형체화하는 것이다.
지금 그는 이 정도 도발도 견딜 수 없다면 물러나라는 경고를 하는 것이 아닐까.
시호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자고로 도전은 피하지 말고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했다.
“좋아.”
시호의 대답에 윤기가 설핏 미간을 좁혔다.
“제가 무슨 뜻으로 말하는지 알고 계십니까?”
“알아.”
안다고? 아니, 그녀의 표정을 보아하니 모르는 게 분명하다.
지금 자신의 속을 들여다본다면 혼비백산하여 도망가야 옳다. 온통 붉고 야릇한 생각으로 가득하니까.
“운동을 쉰 지 오래되긴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에 기죽어서 물러설 정도로 물렁해지지는 않았어.”
거봐. 그녀는 모른다.
제 시꺼먼 속내를.
당장이라도 당신을 한입에 집어삼키고 싶은 내 마음을.
“나도 선수와의 교감은 중요하다고 생각해. 서로 떨어져 있던 시간이 길었던 만큼 대화도 많이 필요할 거고. 그건 걱정하지 마.”
시호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윤기의 눈에는 읽을 수 없는 빛이 어렸다.
“선배.”
시호는 긴장으로 뒷목이 뻣뻣해졌다. 또 어떤 조건을 내걸까.
“집에서 보내 준 반찬으로 차리려고 하는데. 괜찮으십니까?”
응? 갑자기 무슨 소리?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서. 만드는 건 내일 해 드리겠습니다.”
“뭐를?”
“점심 말입니다. 아직 안 드셨다면서요.”
맞다. 밥 먹으러 내려온 김에 담판도 지으려고 한 거였지, 참.
시호의 몸에서 긴장이 스르르 풀렸다.
“잠깐만 앉아 계세요. 금방 드리겠습니다.”
자연스레 시호의 손을 붙잡고 안으로 이끈 윤기는 그녀를 테이블 의자에 앉혔다. 그러고는 냉장고에서 집에서 보내 준 반찬들을 꺼내 그릇에 정갈히 옮겨 담았다.
단정하고 우아하게 젓가락질을 하는 옆모습을 보고 있자니 꼭 수련의 일환처럼 보였다.
그저 반찬을 옮겨 담고 있을 뿐인데, 꼭 ‘나를 위해 요리하는 내 남자’ 따위의 콘셉트 화보를 찍는 것처럼 보인다.
반듯한 이마와 높고 날렵한 콧대, 도톰한 입술과 강인한 턱까지 이어지는 선이 정성 들여 조각한 것처럼 아름다웠다.
얼굴은 모델 같은데, 몸을 보면 영락없이 운동선수다. 갑옷을 입은 듯 단단하고 탄탄한 신체는 어느 곳을 찔러도 다 튕겨 낼 듯했다.
“선…….”
그릇을 시호의 앞에 가져다 놓으려 몸을 돌린 윤기는 자신을 보고 있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일순 굳었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잘생겼다 싶어서.”
미묘한 침묵이 공간을 메웠다.
“인기 많았겠다. 고등학교 때하고는 비교도 안 되지?”
교복을 입은 학생일 때도 윤기는 무척이나 인기 있었다.
유독 새까맣고 결이 좋은 머리카락은 운동을 마쳤을 때 더욱 빛을 발했다.
호면을 벗고, 머리를 감싸고 있던 면수건까지 벗은 다음 땀을 털어 내기 위해 윤기가 머리를 흔드는 모습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마음을 뒤흔들었다.
호구를 착용하기 전, 죽도를 쥐고 몸을 풀 때 손등에 드러난 핏줄은 또 어떻고.
차가운 눈빛과 날카로운 분위기와는 다르게 모공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깨끗한 피부는 그를 유일하게 제 나이로 보이게 하는 요소였다.
게다가 지금은 거기서 키가 더 자랐고, 몸은 좀 더 커졌으며, 더욱 날렵해진 턱선에 앳된 기운은 쏙 빠진 성숙한 분위기가 온몸을 휘감고 있었다.
무언가를 아주 조금만 길게 응시해도 눈빛에 관능적인 의미를 담은 것처럼 보였다.
워낙에 무뚝뚝한 성격이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쏟아지는 관심에 꽤나 피곤했을 듯싶다.
“인기 없습니다.”
되도 않는 소리에 시호가 코웃음을 쳤다.
“슈퍼에서 너 따라다니는 시선들이 얼마나 많았는데.”
“선배도 그 시선들 속에 포함됩니까?”
윤기가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저렇게 보면 이상한 상상을 하게 된다니까 그러네.
이건 내 잘못이 아니라, 지나치게 잘생겨서 뭐든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저 녀석의 외모 탓이다.
“그래, 너 멋있어서 자꾸 보게 되더라. 누가 보면 연예인인 줄 알겠어. 잘 컸네, 기윤기.”
장난스레 말하는 시호를 보며 윤기는 입을 다물었다. 더 말했다간 둑이 터진 듯 흘러나온 마음이 시호를 질식시킬지도 모르니까.
윤기는 그녀의 앞으로 밥을 한 공기 퍼 준 다음, 수저를 정갈히 놓았다.
“혼자 산 지 오래됐나 봐? 익숙해 보이네.”
“고등학교 졸업한 이후로 계속 혼자 살았습니다.”
“대학 땐 기숙사에 있으니까 그렇다 치고. 본가가 연교 아니야?”
“맞습니다.”
“하긴, 독립이 로망이긴 하지. 이렇게 깔끔하게 해 놓고 사는 거 보면 부모님도 안심하시겠다.”
자신은 위자료가 아니었다면 살 수 없었던, 연교에서 가장 비싼 아파트에서 자취를 하고 있는 윤기를 보며 시호는 고등학교 때 애들이 떠들어 대던 말을 떠올렸다.
윤기의 수많은 별명 중 하나는 ‘연교 도련님’이었다. 그의 친가는 대대로 연교시에 거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몇십 년 전 소유한 땅 중 일부가 신도시 필지에 포함되어 어마어마한 보상금을 받았다.
할아버지는 한학자에 큰아버지는 당시 시의원을 하다가 도의원을 거쳐 국회에까지 진출했다고 들었고, 부모님은 사업을 하신다고 했다.
조상 중에 독립운동가가 몇 명이나 있고 학자와 정치가도 여럿 배출한, 연교시에서는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명문가였다.
시호는 단정히 담긴 반찬을 집었다. 이게 그 집안에서 공수한 음식이란 말이지.
“집에서 보내 주신 거지? 이 귀한 걸 내가 먹어도 되는지 모르겠네.”
“많이 보내 주셔서 늘 남습니다.”
“좋겠다. 자고로 남이 해 준 밥이 최고로 맛있는 거거든.”
잘 먹겠습니다. 시호가 분주히 젓가락을 놀리기 시작했다.
“음, 맛있다. 돈 안 내고 먹기에 미안할 정도야.”
시호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니 윤기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른다는 표현이 거짓이 아니구나, 이제야 깨달았다.
그는 픽 웃으며 시호의 숟가락 위에 반찬을 얹어 주었다.
“아…… 고마워.”
젓가락을 내려놓은 윤기가, 양손에 수저를 들고 열심히 음식을 먹는 그녀를 가만히 보다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흠칫 놀란 시호가 고개를 조금 뒤로 물리며 눈을 크게 뜨자 그의 동공이 잘게 흔들렸다.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손이 먼저 움직였습니다.”
그가 얼른 손을 물리고 고개를 숙였다.
“괜찮아. 조금 놀란 것뿐이야. 그런데 왜?”
그의 시선이 다시 그녀의 입술로 향했다.
“아주 조금만 닿아도 되겠습니까?”
머리 위에 물음표가 떠오른 시호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윤기는 그녀의 입가를 엄지로 훔친 뒤 제 입으로 가져가 살짝 빨았다.
“역시 다네요.”
색정적인 모습에 시호는 바보같이 말을 더듬고 말았다.
“다, 당연히 달겠지. 매실청이니까.”
“평소보다 더 달게 느껴지는데.”
도륵. 올라온 그의 눈동자가 또 저를 뚫어지게 보았다. 그리고 비죽 삐져나온 붉은 혀로 제 손가락을 핥았다.
“선배는 어떠십니까?”
씹고 있던 매실장아찌를 삼킨 시호가 손등을 들어 입가를 닦았다. 아무것도 묻어나지 않았다.
“안 묻었어요. 제가 다 핥아먹었으니까.”
말이 이상하게 들리잖아! 목적어를 넣어 달라고, 좀!
이제 보니 기윤기, 오해를 사게 말하는 버릇이 있다.
“……달아. 엄청 맛있어.”
“네. 맛있네요. 혼자 먹을 땐 몰랐는데.”
“그 말 들으면 부모님 섭섭하시겠다. 혼자 먹어도 맛있을 수밖에 없는 맛인데.”
“그렇군요. 앞으로 부모님이 섭섭하지 않으시도록 늘 선배와 함께 먹어야겠습니다.”
윤기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 시호는 눈을 깜빡였다.
“얘기가 왜 그렇게 돼?”
“어차피 계약 조건 사항 아닙니까.”
“그건 그렇지만……. 아, 말 나온 김에 원하는 거 일단 다 말해 봐.”
“식사부터 하세요. 다 먹고 난 뒤에 차 마시면서 얘기하는 게 좋겠습니다.”
아, 차도 같이 마시는 거구나.
시호는 다시 젓가락질을 시작했고, 그녀가 거의 다 먹어 갈 때쯤 윤기는 자리에서 일어나 찻물을 끓였다.
“설거지는 내가 할게.”
“괜찮습니다.”
“내가 안 괜찮아. 조금인데 뭘.”
“조금이니까 제가 하겠습니다.”
윤기가 시호의 앞에 차를 따른 잔을 두었다.
다시 자리에 앉은 시호는 작게 심호흡을 한 후,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들을 준비 됐어. 말해 줘, 네가 원하는 계약 조건.”
쉽지 않을 것이라 예상은 하고 있다. 이런 거물 선수가 신생 실업팀으로 옮기려면 어마어마한 조건을 내걸겠지. 당연한 얘기다.
“연락이 끊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원활한 커뮤니케이션, 오케이.
“좋아.”
“몸이 좋지 않다든가, 무거운 물건을 든다든가, 그 외에 선배 혼자서는 곤란한 상황일 때 반드시 제게만 연락하십시오. 저 또한 그러겠습니다. 서로의 연락에는 꼭 응해야 합니다.”
음, 이것도 원활한 소통의 일환으로 보면 되는 건가?
아무리 들어도 선수와 단장 사이에 내거는 계약 조건이라기보다는…… 뭐랄까.
……연인 사이에 나눌 법한 말로 더 적합한 것 같은데.
이상하다 여길 때쯤 윤기가 다음 조건을 내걸었다.
“저녁 식사는 최대한 함께 했으면 합니다.”
“저녁 식사?”
“예.”
사실 윤기는 출퇴근도 함께 하고 싶었지만, 갑갑한 결혼 생활이 싫었다는 시호에게 족쇄처럼 느껴질 수 있기에 말을 아꼈다.
“하루에 한 번은 꼭 봤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