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4화
잘못 들었나?
시호가 대꾸 없이 눈만 깜빡이자 윤기가 다시 말했다.
“제 집으로 가요, 선배.”
그녀의 눈이 천천히 커지는 것을 보며 윤기가 미소했다.
“점심 해 드리겠습니다.”
“점심?”
“그렇게 부실하게 먹고 다니면 건강에 좋지 않아요.”
또 웃었다. 얼음인간 기윤기가.
윤기는 시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계산대로 향했다. 워낙 다리가 길어서 몇 걸음 걷지 않았는데도 금방 멀어졌다.
멍하니 있던 시호가 얼른 뒤따랐지만, 직원이 카트 안에 있는 물 두 상자의 바코드를 찍고 윤기가 카드를 내밀자 순식간에 계산이 끝났다.
“됐어, 계산은 내가…….”
“가요, 선배.”
500밀리리터 물병 30개가 묶인 박스 두 개를 거뜬히 든 윤기가 발을 옮겼다.
저렇게 무거운 걸 들고 가면서도 윤기의 발걸음이 가벼워 보이는 것은 기분 탓이겠지, 분명?
반팔 아래로 드러난 윤기의 팔 근육이 화가 난 듯 불끈 일어났다.
참 관리 잘했네. 현역, 게다가 국가대표 선수니 당연한 거겠지만.
“물값이 얼마 안 돼서 돈을 주는 것도 좀 그렇고. 밥 살게. 짐 들어 준 것까지 다 합쳐서.”
잠시 생각하던 윤기가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밥 말고. 물을 30번 사 주십시오.”
“뭐어?”
“그게 좋습니다.”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윤기는 어쩐지 즐거워 보였다.
“뭐야, 그게? 그냥 맛있는 거 사 줄게. 되게 비싼 걸로.”
“싫습니다. 물 30번. 그게 좋아요.”
좋아요, 라고 말할 때 윤기의 눈빛이 더욱 짙어진 것도 같았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감정에 시호는 멈칫하며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기윤기와의 기 싸움에선 진 듯싶다.
“선배. 입술 깨물지 말아요.”
뚝. 시호의 움직임이 멎었다.
“상처 날까 걱정됩니다.”
윤기의 눈동자가 붉은 입술로 도르르 내려갔다.
“피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의 시선이 묘하게 관능적이었다. 눈동자로 입술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것 같달까.
‘왜 이런 생각을.’
감추듯 입술을 한 번 안으로 만 시호가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럴게. 가자.”
“몇 동에 사십니까?”
“101동. 넌?”
윤기가 걸음을 멈췄다. 그러곤 시호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정말이십니까?”
“이런 걸로 왜 거짓말을 하겠어.”
“저도 101동에 삽니다. 1601호에.”
말도 안 돼! 정말로?!
“난 네 윗집에 살아. 1701호.”
시호가 어이없다는 듯 웃자, 윤기도 자석처럼 따라 웃었다.
“신기하네요.”
“응, 그러게. 정말 신기하다. 꼭 보이지 않는 실로 연결된 것 같아.”
보이지 않는 실이라…….
그래, 시호와 자신은 무엇으로든 묶여 있지 싶었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날이 올 수가 없었다.
비록 중간에 희미해지기는 했지만, 다시 제자리를 찾은 것이다.
윤기는 시호를 절대로 놓을 생각이 없었다. 확실히 붙잡아 품에 안을 것이다.
전남편과의 일은 쉽게 잊힐 한낱 과거로 만들어 묻어 버리고, 자신과의 기억으로 그녀를 가득 채울 것이다.
자신 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오직 시호만을 사랑하고 아끼며 그녀만을 바라보겠다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
이젠 아낌없이 내보일 차례다.
시호가 공동 현관문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반걸음 뒤에서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윤기는 가슴이 뻐근해졌다.
이러고 있으니 꼭 한집에 사는 사이 같다.
“뭐 해? 안 들어와?”
자신을 향해 뒤돌아서는 시호가 눈부셨다.
윤기는 벅찬 마음을 누르고 얼른 그녀의 뒤를 따랐다.
엘리베이터에 탄 시호는 16층과 17층을 눌렀다.
“나 옷 좀 갈아입고 내려갈게. 물은 이따 내가 가져갈 테니까 일단 네가 맡아 줘.”
“알겠습니다.”
윤기가 먼저 내렸다. 혼자가 된 시호는 참았던 숨을 터뜨렸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까지 자신을 바라보던 윤기의 시선에 어쩐지 숨이 막힐 듯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그간 훈련을 아주 제대로 했나 보다. 그저 자신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꽁꽁 묶인 것 같았다.
집에 들어선 시호는 구두를 벗고 원피스도 벗어 던진 다음, 청바지로 갈아입었다.
위에는 후드 티를 입으려다가 그냥 흰 셔츠를 꺼내 들었다.
그래도 영입 제안을 하러 가는 거니까. 이 정도의 격식은 차려야지.
머리는 묶지 않았다. 그간 언제나 하나로 단정하게 묶고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제 뭐든 내 맘대로 할 거야.
휴대폰과 차 키를 챙긴 시호는 나가기 직전 머뭇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첫 방문인데 빈손은 좀 그렇지 않나? 하지만 마땅히 가져다줄 것이 없다.
“아까 정신 차리고 음료수 세트라도 살걸.”
휴. 가벼운 한숨을 내쉰 시호는 일단 운동화를 신고 문을 나섰다. 나중에 맛있는 거 사 주자.
어차피 자주 볼 것 같으니까.
“물을 30번 사 달라니. 기윤기한테 엉뚱한 면이 다 있었네.”
매일같이 얼굴을 보던 고등학생 때보다, 아직 하루가 다 지나지 않은 시간 동안 윤기의 다양한 모습을 보게 되었다.
인생은 참 어디로 어떻게 흘러가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나쁘지 않은 조짐이었다.
아니지.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이 정도면 완전 대박의 징조다.
윤기와의 만남은 며칠 더 걸릴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렇게 빨리 만나게 되다니. 쾌거였다.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제게로 올 수 있도록 윤기를 사로잡고 설득해야 한다.
그저 같은 고등학교 선후배라는 얄팍한 학연에 기대기엔 기윤기는 너무나도 대단한 선수였다.
국내 대회에선 무조건 우승을 차지했고, 작년에 열렸던 세계검도선수권대회에선 아깝게 준우승에 머물렀다.
검도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윤기를 알았고, 검도에 관심이 없다 하더라도 윤기를 아는 사람이 꽤 되었다.
세계 대회에서 상을 받을 때 찍힌 사진이 인터뷰 기사와 함께 올라간 적이 있었는데, 조회 수와 댓글이 엄청나서 포털 사이트 메인에까지 잠깐 게시될 정도였다.
축구나 야구도 아닌 검도 선수의 인터뷰가 메인에 걸리는 건 극히 드문 일이다.
곧바로 인기 있는 프로 야구팀의 경기 기사에 묻히긴 했지만, 잠깐이라도 윤기의 사진을 본 사람들은 절대 그를 잊지 못했다.
대다수의 반응은 ‘검도와 관련된 드라마나 영화를 촬영하는 배우인 줄 알았다’였다.
‘본업 최고, 얼굴은 더 최고’라는 당시 기사 베스트 댓글이 아직까지도 그를 따라다녔다.
그런 선수를 신생 검도단으로 모셔 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시호는 굳게 다짐했다. ‘무영단’의 소속 선수로 윤기의 이름을 반드시 올릴 것이라고.
‘무영단을 우리나라 최고의 선수단으로 만들 거야.’
그 의지가 밖으로 드러났는지, 초인종을 누르자마자 문을 연 윤기의 눈동자가 순간 크게 확장되었다.
“할 말이 있어.”
결연하기까지 한 시호의 모습에 윤기는 그녀가 들어올 수 있도록 몸을 조금 뒤로 물렸다.
“일단 들어오십시오.”
시호는 문 안으로 발을 들였다.
어쩐지 인생 제3막의 무대 위로 오른 기분이 들었다.
1막은 검도 선수로 땀에 절어 지냈고, 2막은 RS그룹 며느리로서 숨을 죽이고 살았다.
3막은 빛처럼 살 것이다. 어떤 어둠도 들어올 틈 없이 환하게.
그러기 위해서는 윤기가 필요했고, 자신도 윤기에게 그만한 가치가 있어야 했다.
등 뒤로 문이 철컥, 닫혔다.
아주 좁은 간격을 사이에 두고 윤기와 마주 선 시호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렇게 가까이 서니 위압감이 장난 아니었다.
하이힐을 신었을 때에도 크다 생각했는데, 이리 운동화를 신고 올려다보니 고개가 더욱 뒤로 젖혀졌다.
머리 하나 정도 더 높은 곳에서 저를 내려다보는 시선은 진득했고, 체격은 그리 좁지 않은 현관을 가득 채웠다.
굵고 긴 팔과 핏줄이 툭 불거진 커다란 손은 한 번 붙잡히면 빠져나올 수 없을 것처럼 강인해 보였다.
“선배.”
농밀한 숨결과 뒤섞인 낮은 음성이 도톰한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자, 시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왜 이렇게 긴장이 되는지 모르겠다. 그저 마주 서 있을 뿐인데.
윤기의 집요한 응시에 시호가 슬쩍 시선을 아래로 돌리자, 그의 고운 미간에 금이 갔다.
“상대를 공략할 땐.”
커다란 손이 시호의 얼굴로 다가갔다.
“절대 눈을 피하지 말라고.”
뺨을 감싸려는 듯 펴졌던 긴 손가락이 앞으로 넘어온 그녀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조심스럽게 넘겼다.
“배웠잖아요.”
귀에 그의 손가락이 닿자 소름이 오스스 돋아서, 시호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기본 중의 기본인데.”
윤기가 그녀에게로 고개를 조금 더 숙였다. 높이 솟은 코와 코가 서로 맞닿기 일보 직전이었다.
“벌써 잊으셨습니까.”
시호는 움직이지 않은 채 눈동자만 올렸다. 새까만 윤기의 동공이 오직 저만 담고 있었다.
그녀는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목에 힘을 주었다.
“연교시청과 계약이 거의 끝나 간다고 들었어.”
“……이것도 아까 그 사람한테 들은 겁니까.”
“맞아.”
윤기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하, 하고 느른한 숨을 내뱉었다.
뜨거운 숨이 살짝 벌어진 시호의 입술 안에 연기처럼 들어와 퍼졌다.
“저에 대해 왜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윤기의 목소리에 힘이 더해졌다.
“아무 사이 아닙니다.”
그의 눈에 모든 것을 태워 버릴 듯 강렬한 빛이 떠올랐다.
시호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등에 문이 닿았다.
그의 품 안에 갇힌 꼴이 되어 버렸으나 달리 피할 곳이 없었다.
“그렇……구나.”
시호의 대답에 윤기의 눈가가 미세하게 풀어졌다.
그러나 집요한 시선은 그대로 이어졌다.
“할 말이 있다고 하셨는데.”
“너와 계약하고 싶어.”
계약?
의외의 말에 윤기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선수단을 창단할 생각이야. 널 ‘무영단’의 첫 선수로 영입하고 싶어.”
“무영단…….”
“고속도로 들어가기 전 공터에 한옥 알지? 지금 리모델링 중이야. 수련관으로 쓰려고.”
“흉가라고 불리는 곳 말입니까?”
“그래, 그 흉가. 근데 이젠 그렇게 못 부를 거야. 엄청 공들이고 있거든.”
한옥이라지만 그다지 중요한 역사적 가치가 있는 곳은 아니라서 민간인이 소유하고 있었다.
원래 소유주가 관리를 하지 않아 흉물스럽게 방치되어 폐가로 취급받고 있던 그곳을 시호가 사들였고, 현재 공사 중이다.
“네가 원하는 조건은 최대한 들어줄게. 뭐든 말만 해.”
조건이라는 말에 윤기의 눈이 맹수처럼 번뜩였다.
“조건이라.”
그의 목소리가 스산하게 깔렸다.
그리고 찾아온 잠깐의 침묵은, 태풍이 불어닥치기 전 찾아온 순간의 고요처럼 느껴졌다.
“정말 뭐든 들어주실 겁니까?”
“내가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선 최대한, 최선을 다해서.”
“선배가 충분히 할 수 있는 겁니다. 아니, 선배밖에 못 하는 것이라 표현하는 게 더 맞겠군요.”
그의 눈빛에 잡아먹힐 것 같았다.
시호는 주먹을 꼭 쥐고 마치 싸우러 온 사람처럼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 정도로 눈을 피해 버린다면, 윤기가 저를 단장으로 믿고 따르기 어려울 것이다.
경험이 부족한 만큼, 패기와 열정 그리고 자신감으로 꽁꽁 무장을 해도 모자랄 판에 흔들릴 수는 없었다.
“그래. 말해 봐. 나밖에 못 들어주는 그 조건이 뭔지.”
시호가 턱을 들어 올렸다. 가늘어진 윤기의 눈에서 검붉은, 퇴폐적인 무언가가 미약하게 점화되었다. 그것은 이내 삽시간에 퍼져 주위를 집어삼킬 듯 타올랐다.
마주하고 있는 시호의 몸까지 데워 버릴 정도의 열기를 내뿜으며 그가 도톰한 입술을 열었다.
“선배를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