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3화
시호가 번호를 누르고 휴대폰을 돌려주자 윤기가 곧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가방 안에서 시호의 휴대폰이 지이잉-울었다.
“고마워. 번호 알려 줘서.”
잠시 미간을 좁힌 윤기가 살짝 고개를 저었다.
“당연한 일입니다.”
“친한 사람만 알려 준다고 들었는데.”
시호가 살짝 미소했다.
“그럼 이제 우리 친한 사이인가?”
“그것도 아까 그 사람한테 들으신 겁니까?”
‘그 사람’이라 칭하는 윤기의 눈빛과 목소리는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 친한 사람을 대하는 투가 아니었다.
“으응, 그렇긴 한데…….”
“그 사람과는 친하지 않습니다.”
다소 화가 난 듯한 윤기의 얼굴에 시호는 의아해하며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민주는 왜 윤기와 친하다는 듯이 말했을까?
언제나 절 도와주지 못해 안달이 난 친구이니, 아무래도 저를 도와주기 위해 일단 질러 본 듯싶었다.
사실 윤기의 번호를 모르지만, 나중에 어떻게든 알아낸 뒤에 저에게 알려 주려 한 게 아닐까.
자신이 아는 민주라면 그랬을 법도 하다. 어쩐지 이상하리만치 당황하더라니.
시호는 그런 친구를 귀엽다 여겼고, 또 눈앞의 윤기 또한 귀엽다고 생각했다.
발끈하는 모습에서 고등학생일 때의 앳된 얼굴이 보이는 것도 같다.
하계 훈련 때였던가. 어쩌다 보니 가장 앞서 걷던 둘이서만 산을 올라가게 되었다.
자신은 열아홉, 윤기가 열일곱일 때였다.
[시간 빠르다. 곧 졸업이라니.]
[…….]
[졸업하고 한참이 지난 후에 만나도 너희는 언제까지나 귀여운 후배일 것 같아.]
[아닐 겁니다.]
윤기가 발끈하며 즉각 대꾸했다. 놀란 것도 잠시, 시호는 그 얼굴이 꽤나 귀엽다고 생각했었다.
“그래, 알았어. 음, 그럼 우리는 앞으로 친해질 사이라고 생각해도 될까?”
윤기는 입을 다물었다. 할 말이 있으나 차마 내뱉지 못하는 것 같아서, 시호는 멋쩍은 얼굴로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으음. 너무 나갔나?”
“아닙니다.”
또 곧바로 날아오는 칼 같은 즉답에 시호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왜 웃으십니까?”
“그냥. 귀여워서?”
가뜩이나 차가운 윤기의 얼굴이 더욱 싸늘히 얼어붙었다.
“미안, 이 말 싫어하는구나.”
시호의 말에 윤기는 마른세수를 했다.
“어디에 가시던 길이었습니까?”
“슈퍼에. 집에 먹을 게 하나도 없어서.”
“저도 슈퍼에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래? 잘됐네. 같이 가자.”
고개를 끄덕이는 윤기의 눈가가 순간 붉어진 것처럼 보였지만 시호는 제 착각이라 여겼다.
얼음인간 기윤기가 그럴 리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신기하다. 어떻게 이렇게 다시 만났지? 그것도 평일 오후에.”
아, 그러고 보니 얘가 왜 이 시간에 여기에 있지? 오늘 수요일인데. 한창 운동할 때 아닌가?
“훈련이 일찍 끝났나 봐?”
“체육관 시설 점검 때문에 오늘부터 일주일간 휴가입니다. 오전에 헬스장에서 웨이트 하고 돌아오는 길에.”
윤기의 목소리가 순간 낮아졌다.
“선배와 만난 겁니다.”
벤치에 앉아 눈을 감고 있는 시호를 본 순간, 눈을 몇 번 감았다 떴었다.
그래도 시호는 사라지지 않았다.
홀린 듯 다가가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에 내리쬐는 태양을 가렸다.
신기루인가? 어쨌든 환영 속에서라도 시호와 가까워지고 싶었고, 편하게 해 주고 싶었다.
순식간에 고등학생일 때로 돌아간 듯했다. 오랜만인데도 바로 어제까지 만났던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하루도 한시도 빼놓지 않고 언제나 그녀를 생각했기 때문이리라. 윤기는 그렇게 생각하며 넋을 놓고 환상 속 시호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와 나란히 걷는 지금은 환상이 아니라 현실이었고, 그녀는 제 옆에 실재하고 있다.
겉으로는 전혀 드러나지 않았지만, 온몸의 혈관이 뜨겁게 달궈지는 기분이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다. 미치게 좋아서. 늘 그리고 그리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달아오른 감정은 이내 떠오른 한 가지 사실에 차갑게 식어 버렸다.
시호에게는 남편이 있다. 그녀는 가정이 있고, 그 가정을 충실히 지키고 있는 사람이다.
뜨거움과 차가움이 어지러이 뒤섞인 감정에 윤기는 목이 졸리는 것만 같았다.
‘이사를 왔다는 건…… 당연히 남편도 함께 왔겠지.’
윤기는 곧게 펴졌던 미간을 다시 구겼다. 시호의 남편을 ‘남편’이라 칭하는 것이 미치도록 싫었다.
하지만 싫다고 해서 사실이 변하는 것은 아니었다. 시호에게는 남편이 있고, 그것은 자신이 아니다.
그녀를 만나 밝아졌던 세상에 다시금 깊은 어둠이 내렸다.
“저도 신기합니다.”
“뭐가?”
“선배가 제게 연락하려 했다는 게.”
“하긴. 그간 연락 한 번 없던 선배가 동네에 이사 왔다고 대뜸 전화하면 좀 싫겠다. 기억하고 있을지 없을지도 잘 모르는데. 그치.”
기억하고 있을지 없을지도 모른다니. 첫사랑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이런 말은 시호를 곤란하게 만들 뿐이다.
하여, 윤기는 침묵을 택했다. 금방이라도 끓어 넘치려는 마음을 꾹 누른 채.
“할 말이 있어서. 언제 시간 돼? 편할 때 알려 주면…….”
“오늘 됩니다.”
윤기가 냉큼 대답했다. 이번에는 칼 같은 느낌이 아니라, 산책을 가자는 말에 신난 마음을 애써 감추는 무뚝뚝한 대형견 느낌이었다.
시호는 아름다운 미소를 머금었고, 그런 그녀를 보며 윤기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음, 그럼 시간 좀 내줄래? 꽤 진지한 얘기거든.”
“알겠습니다.”
“일단 슈퍼 갔다가 집에서 옷 좀 갈아입고 나올게. 아, 아니다. 밥 좀 먹고 나올게. 한 10분이면 돼.”
“식사 시간으로 10분은 너무 짧은 것 같은데.”
“물이랑 두부만 먹으려고. 지금 그거 사러 가는 거야.”
시호의 대답과 함께 두 사람은 슈퍼에 도착했다. 윤기가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그게 점심입니까?”
“응. 별로 안 내키네. 너랑 얘기하고 나서 가 볼 곳도 있고.”
“어디인지 물어봐도 됩니까?”
“이미 물어본 거나 마찬가지 아니야?”
장난스럽게 웃은 시호가 카트를 끌고 오려 했다.
“제가 하겠습니다.”
순간 그녀는 당황했다. 따로따로 가져가서 각자 계산하려고 했는데?
“너는 뭐 살 건데?”
“저도 물 사러 왔습니다.”
뭐…… 얼마 안 살 거니까 같이 할까? 그리고 윤기와 조금이라도 친밀감을 형성해 놓는 편이 좋을 듯하니.
윤기가 카트를 밀었고, 시호가 그 옆에서 걸었다.
“얼마나 살 거야? 난 일단 세 병만 사고 나머진 나중에 주문하려고.”
“얼마나 사려고 하셨습니까?”
“한 박스 정도? 아, 이따가 오는 길에 사야겠다.”
“지금 사십시오. 제가 들어다 드리겠습니다.”
“아냐. 괜찮아. 내가 하면 돼.”
잠시 시호를 응시하던 윤기가 무겁게 입을 뗐다.
“그게 낫겠군요. 남편……분께서 싫어하실 테니까.”
어쩐지 윤기의 눈에서 맹렬한 불길이 치솟는 것처럼 보여서, 시호는 저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녀는 기 싸움에서 절대로 밀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검도에서는 상대의 기운에 밀리는 순간 시합의 승패가 갈린다.
누구보다도 승리를 갈망했던 시호는 웬만해서는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뒤로 물러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그러나 방금 전에는 윤기의 기운에 압도당했다. 도저히 피할 수 없는 빠른 칼날이 목에 겨눠진 듯 아슬아슬한 기분이었다.
그런 자신의 속내를 간파당할까, 시호는 방어하듯 팔짱을 꼈다.
그리고 윤기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으려 애썼다. 눈까지 피해 버리면 정말 지는 것 같아서였다.
“한 박스 정도는 들 수 있어. 지금은 옷하고 신발이 좀 불편해서 그래. 그리고 남편은 안 싫어할 거야. 모를 테니까.”
윤기가 그게 무슨 말이냐고 눈으로 물어 왔다. 시호는 허리를 더욱 바로 세웠다.
“나 이혼했거든. 한 달 전에.”
윤기의 눈이 전에 없이 커졌다. 아까보다도 훨씬 더 놀란 얼굴이었다.
“이혼……이라고 하셨습니까?”
놀라는구나. 기윤기에겐 아무런 감흥도 없을 줄 알았는데.
시호는 여상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갑갑했던 결혼 생활 정리하고 여기 나 혼자 왔어. 앞으로 혼자 살 거야.”
충격에 휩싸인 윤기를 보니 시호는 괜히 민망해졌다.
졸업 후 지금껏 왕래 한 번 없던 선배의 이혼이 이 정도로 경악할 일인가.
시호가 왼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비어 있는 왼쪽 네 번째 손가락을 본 순간, 윤기는 어두웠던 마음 한편에 환한 빛이 쏟아지는 기분이었다.
그녀가 결혼한 이후로, 제게 더는 기회가 없을 줄 알았다.
시호와 이혼한 전남편에게 감사의 절이라도 올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잘생기고 스마트한 남자가 이 정도로 멍청했을 줄이야.
만약 자신이었다면, 시호를 호적에 아내로 올린 이상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녀를 놓지 않았을 것이다.
오직 한 가지 생각만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다시는 놓치지 않는다. 절대로.’
기회를 놓치는 바보 같은 짓은 한 번으로 족하다.
그 깊고 어두운 상실감은 정말이지 두 번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다.
“네가 그러니까 좀 민망하다, 야. 살면서 이혼 한 번쯤은 할 수 있잖……. 아니다. 결혼도 안 한 애한테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스스로가 어이없다는 듯이 시호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윤기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
아픔도 그녀의 웃는 얼굴에는 흠집을 내지 못했다.
여전히 예뻤다. 여전히…… 눈앞이 아득해질 만큼 매혹적이다.
서늘한 눈이 아찔하게 휘어지며 콧잔등에 귀여운 주름이 지던 모습을 본 날이면, 쉽게 잠들 수 없었다.
도무지 수런거리는 속이 가라앉지를 않아서.
“일단 빨리 살 거 사자. 정말 중요한 얘기란 말이야. 너한테 생각할 시간도 필요할 거고.”
자, 자! 가자. 시호가 그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재촉했다.
윤기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손이 닿은 곳에서부터 아찔한 감각이 피어오르는 듯해서다.
쿵쿵. 터질 듯 뛰기 시작하는 심장을 안고서 윤기는 시호와 나란히 걸었다.
“일단 물부터 사자. 넌 얼마나 살 거야?”
“저도 한 박스 살 예정이었습니다.”
“두 박스 들고 가기엔 너무 무거워. 일단 네 것만 사. 난 세 병만 살 테니까.”
윤기는 대답 없이 물 두 박스를 카트에 실었다.
“무겁다니까.”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저 문짝 같은 몸을 보면 그럴 것 같기도 하다만.
“네가 정 그렇다면, 뭐. 난 절대 강요 안 했다?”
윤기의 눈가가 부드럽게 풀어지며 이내 호선을 그렸다.
‘웃었어?’
처음 보는 윤기의 미소 띤 얼굴에 시호는 흠칫했다. 무표정할 땐 고양이 같은데, 저리 웃으니 순둥한 대형견이 따로 없다.
어쩐지 주위가 좀 더 밝아진 것도 같았다. 저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닌지, 지나가는 사람들이 윤기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두부만 얼른 사서 가자. 기윤기 선수 시간 오래 뺏으면 안 되니까.”
시호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앞서 걸었다.
방금 전 윤기의 미소를 보고 두근거렸던 마음을 애써 무시하고 감추었다.
놀라서 그런 것뿐이야. 놀라서.
“선배.”
어쩐지 윤기의 목소리가 방금 전보다 깊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내 집으로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