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2화
“윤기를 영입한다고?”
너무 놀라 넋이 빠져 버린 것처럼 보이는 민주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시호는 몰랐지만, 민주는 지금 심장이 쿵쿵 뛰고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는 것 같았다.
“응. 방금 네 말 듣고 결심했어.”
“내, 내 말……?”
“현재 최고로 대우해 주는 곳과 계약 끝나 간다면서. 거기보다 더 좋은 조건을 내세우면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하지만 윤기는 국가대표잖아. 지금껏 연교시청 소속으로만 뛰어 왔고. 이제 막 창설한 검도단으로 쉽게 이적을 할까?”
대한민국 검도 국가대표는 평소엔 실업팀에 소속되어 활동하다가, 대회가 발생하면 소속에 상관없이 선발전을 통해 선출된다.
시호가 테이블 위에 손깍지를 낀 손을 올려놓고 친구를 응시했다. 자신을 걱정한다기엔 민주는 어쩐지 무언가에 쫓기는 듯 다급해 보였다.
“민주야.”
같은 교복을 입은 학생이었을 때도, 시호가 이런 차분한 목소리로 제 이름을 부르면 왠지 모르게 긴장이 되면서 자세를 바로 하게 되었었다.
습관처럼 허리를 편 민주가 입술 안쪽 살을 살짝 짓씹고는 금세 고개를 저었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
“고, 고맙긴. 친구끼리.”
“그래서 말인데. 부탁이 있어.”
민주는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어쩐지 시호의 입에서 듣기 싫은 말이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시호를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쉽지 않았으니까.
“혹시 윤기 번호 알고 있니?”
시호는 민주의 눈썹이 팔자(八)로 내려가는 것을 보았다.
곤란할 때의 버릇이다.
“당연히 알지. 그런데 내가 함부로 가르쳐 줘도 되는지 모르겠네. 윤기가 워낙 낯을 가려서.”
윤기와 ‘낯을 가린다’는 표현은 잘 어울리지 않았다. 스스로가 다른 이들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 차가운 분위기에 짓눌린 이들이 그에게 다가가지 못한다는 편이 맞았다.
“친한 사람만 번호 알고 있거든.”
둘이 친해진 건가? 어쨌든, 민주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으므로 시호도 바로 수긍했다.
“그러네. 기분 나쁠 수도 있겠다. 그럼 내가 번호 받아도 되는지만 물어봐 줄래? 이유는 내가 말할게.”
“……그래, 알았어.”
민주는 애써 밝게 말했다.
“그런데 기사는 안 났네?”
“곧 나갈 거야. 이 주 정도 후에.”
좀 더 얘기를 나누던 두 사람은 국화차가 찻잔 밑바닥에 조금 깔릴 정도로 줄었을 때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차장에 드문드문 세워진 차를 살피던 민주가 의아하다는 낯으로 시호에게 물었다.
“차는? 안 가져왔어?”
“저기.”
시호가 가방에서 키를 꺼내 누르자 붉은 SUV가 대답하듯 소리를 냈다.
“차 바꿨어? 세단이었잖아!”
시호는 언제나 운전기사가 딸린 검은 세단을 타고 다녔었다.
“엄밀히 말하면 바꾼 게 아니라, 처음으로 뽑은 거지. 그건 내 차가 아니라 시댁 거였으니까.”
조금씩 겹쳐진 네 개의 원 모양 로고를 보던 민주가 입술을 지그시 씹었다.
벤츠 남편과 헤어졌어도 서시호는 명품에 감싸여 있구나, 여전히.
그런데도 전혀 감흥 없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시호의 표정과 말투는 담담했다.
‘전부터 저런 점이 싫었어.’
비슷비슷한 환경에서 자랐으면서 저만 고고한 척, 우아한 척.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면서.
민주는 시호의 차와 조금 떨어진 곳에 주차된 자신의 차를 보았다.
중고로 구입한 에메랄드 색깔의 국산 소형 SUV가 오늘따라 더욱 초라해 보였다.
비교되는 건 차뿐만이 아니었다.
완벽하게 관리된 굴곡이 아름다운 몸에 딱 붙는 붉은 원피스를 입고, 베이지색의 스틸레토 힐을 신은 시호는 C사에서 나온 명품 가방을 들고 있었다.
그에 반해 자신은 군살은 없었지만 시호에 비하면 선이 아름답지 않은 몸을 가졌다.
옷도, 가방도, 모두 시호보다 등급이 떨어지는 브랜드들이다.
마른 상체에 비해 상대적으로 굵은 하체, 특히 종아리가 민주의 콤플렉스였다.
검도를 한 서시호는 잔근육이 붙은 매끈한 종아리를 가졌는데, 어째서 자신은 이런 다리를 가졌단 말인가!
질투와 시기의 원인은 의외로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짜증 나. 난 운동도 안 하는데.’
학창 시절, 어린 마음에 품었던 외모 콤플렉스로 인한 열등감은 시호와 친구가 되어 함께할수록 차차 그 범위를 넓혀 갔다.
딱히 관심을 끌려 하지 않아도 시호는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고, 제 눈에는 답답하고 애늙은이 같기만 한 차분하고 담담한 성격도 또래 사이에서는 높이 평가되었다.
그런 시호의 가장 친한 친구라는 사실에 뿌듯했지만, 그만큼 질투와 자격지심이 솟구쳤다.
비뚤어진 마음이라는 것을 알지만 이 감정을 지울 수는 없었다.
윤기를 좋아하게 된 순간부터는 더더욱.
“그럼 부탁 좀 할게.”
“걱정 마. 윤기한테 내가 잘 물어볼 테니까.”
“고마워. 조심히 들어가.”
“응! 연락하고.”
활짝 웃으며 배웅한 민주는 시호의 차가 사라지자마자 얼굴에서 웃음을 지웠다.
그리고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미리~! 나야. 뭐 하고 있어? 우리 오늘 저녁에 모일까? 참, 오늘 시호 만났거든. 연교로 아주 왔다네? 응응, 자세한 건 만나서 얘기해.”
***
리모델링 현장으로 가려던 시호는 생각을 바꾸고 아파트로 방향을 돌렸다.
옷을 갈아입고 갈 생각이었다.
아침에 이혼 기사 날짜를 최종적으로 조율하기 위해 남편을 만나러 갔던 차림 그대로 민주를 만난 것이다.
“……아. 이제 전남편이지.”
언제나 몸매가 드러나지 않는 무채색의 단정한 옷만을 입었던 시호는 그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이제 나는 완전히 자유라는 것을.
자신을 보자마자 놀란 전남편의 표정에 시호는 속으로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집에서는 더욱 만족스러운 옷으로 갈아입을 것이다.
바로 후드 티와 청바지.
결혼 전엔 줄기차게 입었으나, 결혼 후에는 단 한 번도 입은 적 없는 옷들이었다.
“이제 나로 돌아가야지.”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운 시호는 그대로 집으로 올라가려다 로비 층을 눌렀다.
이쪽 냉장고에는 물 한 병도 없지, 참.
그간 검도관으로 쓸 한옥에 딸린 별채에서 지냈던지라 아파트에는 먹을거리가 하나도 없었다.
아파트 상가 건물에 딸린 슈퍼마켓으로 향하던 시호는 잘 정비된 조경을 보며 걸음을 멈추었다.
결혼해서 궁궐 같은 시댁에 살았을 때에도 커다란 마당이 있었고, 조경도 끝내줬었다. 그러나 마당을 보고 있으면 담장 안에 갇힌 자신의 처지를 새삼 깨달을 뿐이어서 답답했다.
지금은 가슴이 탁 트이고 아주 평화롭다. 흔히 볼 수 있는 벤치조차도 무척 아름다워 보인다.
‘니콜 키드먼이 왜 그렇게 신나 했는지 알 것 같네.’
온라인에 떠돌던 ‘결혼 안 한 사람도 이혼하고 싶게 만드는 사진’이라는 게시물을 클릭하자, 민트색 치마와 꽃무늬 상의를 입은 니콜 키드먼의 사진이 떴었다.
이혼한 날 파파라치에게 찍힌 사진이라는데, 화면으로만 봐도 그녀의 해방감과 즐거움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 사진을 떠올리니 웃음이 나왔다. 그녀는 작게 미소를 지으며 벤치에 앉았다.
그간 제대로 느낄 틈이 없었던 따사로운 햇살을 맞으며 시호는 잠시 눈을 감았다.
숨을 들이마시자 싱그러운 봄의 공기가 폐를 가득 채웠다.
“좋다.”
얼마 만에 누리는 여유인지.
봄바람이 살랑거리며 머리카락을 건드렸다.
그때 무언가에 의해 햇빛이 가려졌다. 시호는 지나가는 구름이라 생각했다. 꽤나 긴 구름인가 보다. 여전히 햇빛이 눈꺼풀 위로 들이치지 않는 것을 보면.
뜨겁지 않고 무척 좋았다.
그렇게 잠시 햇빛을 맞고 바람을 느낀 후 만족스러운 얼굴로 눈을 떴을 때.
커다란 손이 눈 위를 가리고 있었다. 손의 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누구…….”
시호의 이마와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이 천천히 내려가며, 밤처럼 온통 새까만 동공이 점점 드러났다.
우뚝 솟은 코.
그 아래 보기 좋게 자리한 도톰한 입술.
찰랑거리는 결 좋은 흑발.
“……기윤기?”
시호의 목소리에, 얼음으로 빚은 동상처럼 차갑게만 보이던 눈매가 잘게 떨리며 서서히 풀어졌다.
그리고 이내 가늘게 접혔다.
“선배.”
낮고 깊은 음성에 시호는 저도 모르게 눈을 고쳐 떴다.
“정말 서시호 선배 맞습니까?”
오랜만에 들어 본다. 선배라는 말.
시호가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누구인 줄 알고 손으로 햇빛을 가려 줘?”
“…….”
입을 다문 윤기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오랜만. 거꾸로 해도 기윤기.”
붉은 입술 사이에서 자신의 이름이 흘러나오자, 윤기의 눈동자가 순간 희미하게 떨렸다.
“혹시 이거 꿈인가?”
나른한 햇살 아래 눈을 감았다 뜨니 윤기가 서 있다.
고등학생일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그때도 완성형이었던 체격과 외모는 이제 완벽형이 되어 있었다.
187센티미터에 육박하는 거대한 신장과 현역 선수다운 넓고 탄탄한 어깨와 몸, 모델처럼 긴 다리, 온몸과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범상치 않은 아우라.
어디에 있어도 단박에 시선을 사로잡을 만큼 매혹적인, 이제는 소년에서 완연한 남자가 된 윤기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와 똑같은 시선으로.
“저야말로 묻고 싶습니다. 이게 꿈인 건지.”
머리를 한 번 쓸어 올린 윤기는 잠깐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가 다시 시호를 보았다.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그녀를 보며 안심한 듯도 하고, 여전히 믿기지 않는 듯도 한, 복잡한 낯이었다.
그러다 윤기가 대뜸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시호는 조금 놀랐다.
이 애가 먼저 손을 내미는 사람이었나? 누군가와 신체 접촉 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렇지만 무뚝뚝한 와중에도 다정한 면이 있는 애였지. 운동 끝나고 말없이 슥 다가와서 물병을 내민다든가.
잠시 생각하던 시호는 천천히 그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맞닿은 손의 온기가 따뜻했다.
“꿈 아니구나.”
꽤 높은 힐을 신었는데도 여전히 윤기의 시선이 더 높았다.
“키는 원래 크긴 했는데. 고등학생일 때보다 더 큰 것 같아.”
“5센티미터 정도 더 자랐습니다.”
“그랬구나.”
살짝 웃은 시호가 손을 빼내려고 했다. 그러자 윤기는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당황한 시호가 바라보자, 윤기의 눈이 잠깐 짙어지더니 이내 천천히 손을 놓았다.
무척이나 아쉽다는 듯이.
“왜 여기에 계십니까?”
“나 이사 왔거든.”
윤기의 눈이 커졌다. 덩달아 시호의 눈도 커졌다.
“너 이렇게 놀라는 거 처음 봐.”
시합에서 수세에 몰렸을 때도, 반대로 승리가 확실할 때도. 남들 다 깜짝 놀라는 순간에도 윤기의 표정은 변함없었다.
그런 얼음인간 기윤기가 얼굴에 감정을 드러내고, 먼저 손을 내밀다니.
하긴. 더는 고등학생이 아니니까. 자신이 변한 것처럼 윤기 역시 변했을 것이다.
“기윤기.”
“…….”
“윤기야.”
“……예.”
늦은 대답에 시호가 작게 웃었다.
“진짜 당황했나 보네.”
윤기가 마른세수를 했다. 굉장히 혼란스러운 듯했다.
내가 연교로 온 게 그렇게 이상한가?
아까 민주도 그렇고, 지금 윤기도. 이렇게까지 놀랄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이 아파트로 이사 오신 겁니까?”
“응. 너도 여기 산다며? 마주칠 수도 있겠단 생각은 했는데. 이렇게 빨리 만날 줄이야.”
“누구한테 들으셨습니까?”
“민주한테. 둘이 친한…….”
“아닙니다. 절대.”
깜짝이야. 칼인 줄.
자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날아오는 즉답이 꼭 잔뜩 벼린 칼처럼 날카로웠다.
“민주한테 내가 네 번호 받아도 되는지 물어봐 달라고 했거든. 연락 오면 아마 그거 때문일 거야.”
시호의 말이 끝나자마자 윤기가 자신의 휴대폰을 내밀었다.
“선배 번호 알려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