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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쳐 주세요 선배-1화 (1/81)

가르쳐주세요 선배

제01화

이혼을 했다.

벤츠인 줄 알았던 남편은 눈보라 치는 겨울날 한강에 뜬 오리배였다.

보기 힘들었다는 얘기다. 쉽게 발만 구르면 될 줄 알았는데, 방향도 내 맘대로 쉽게 가지지 않았다.

꽁꽁 얼어붙은 물에 걸리고, 힘이 빠진 내 발목에 걸리고, 온통 걸리는 것 투성이였다.

“4년 만에 이혼이라니.”

시호는 얕은 숨을 내뱉었다.

미래는 아무도 알 수 없다지만 그래도 이렇게 빨리 끝날 줄은 몰랐다. 아니, 어쩌면 예정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

시댁은 준재벌급인 RS그룹이었고, 시호의 집안은 평범하디평범했다.

그들이 결혼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 남편인 재혁이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기 때문이다.

시호는 검도 선수였다.

고3 때 대나무 베기를 시연하는 모습과 대련하는 장면이 텔레비전에 나간 이후 ‘검도 여신’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인기를 끌었다.

취미로 검도를 하던 재혁은 그녀에게 한눈에 반했고, 대학에 진학 후 대회에 나갔을 때 팬이라며 처음으로 다가왔다. 안면을 익히고, 말을 섞고, 이따금 데이트를 하며 호감이 생겼다.

그러다 시호는 갑작스러운 발목 부상으로 인해 인생의 하나뿐인 목표였던 검도 선수 생활을 접어야 했다.

예상치 못하게 끝나 버린 커리어에 시호는 깊은 절망에 빠져 있었다.

어릴 때부터 그녀의 꿈은 오직 하나였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 참아 냈던 힘겨운 수련과 훈련, 그리고 자신의 목표와 꿈이 하루아침에 무참히 끝나고 말았다. 몸도 마음도 메말라 갔던 하루하루였다.

수렁에 빠져 있던 시호에게 재혁은 평생 옆에서 힘이 되어 주겠다며 프러포즈를 했다.

[결혼합시다. 첫눈에 반한 순간부터 결심했습니다. 당신을 평생 내 곁에 두겠다고.]

재혁을 좋아했다. 그러나 그것이 사랑이라고 묻는다면? 쉽게 대답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시호는 그와의 결혼을 택했다.

평생 자신을 뒷바라지하느라 고생하시는 부모님, 걱정과 동정이 섞인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 무엇보다 스스로를 비참하다 느끼는 자신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

거센 시댁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재혁은 그녀와의 결혼을 강행했다. 그룹 이미지를 격상시키겠다는 약속을 내세워서.

귀하디귀한 외아들의 첫 반항에 시부모는 결국 한 발 물러났다.

[지켜보도록 하지.]

결혼 후, 재혁은 그룹의 이미지를 높이는 데 시호를 앞세웠다.

- 재벌끼리 결혼하는 ‘결혼 카르텔’을 벗어나 비인기 종목 선수 출신 며느리를 맞아들인 RS그룹 화제…….

- RS그룹, 소외된 비인기 스포츠 투자로 미래 인재 양성!

언론에 배포된 기사는 ‘산왕그룹 경영권 전쟁에서 패배한 둘째 아들이 세운 허울뿐인 기업’이라는 RS그룹의 기존 이미지를 깨뜨리는 데 성공했다.

‘배경보다는 사람을 중시하는 기업’이라는 이미지가 형성되어 젊은 인재들이 모여들었고, 그 결과 그룹의 위상과 사업 규모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재혁은 첫눈에 반해 곧바로 결혼까지 한 아내의 환경을 요긴하게 써먹었고, 시호 역시 그저 운 좋은 신데렐라라기엔 쉴 틈 없이 일했다.

비록 경기를 직접 뛸 수는 없었지만 그녀는 검도계에 자신이 조금이라도 이바지할 수 있단 사실에 기뻤다.

그러나 사업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을 때, 재혁은 서서히 검도에 대한 투자를 줄여 나갔고 시호에게도 바깥출입을 자제하라고 했다.

[이제 그룹도 어느 정도 안정되었고 남들 시선에서 벗어나서 지내면 좋겠어. 어머니랑 같이 갤러리 운영을 배워 봐도 좋고.]

갑자기 끝난 선수 생활처럼,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화려한 삶도 갑작스럽게 막을 내렸다.

곧바로 답답하기만 한 감옥 생활이 시작됐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검도처럼 재벌가 며느리가 하기엔 우아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운동은 할 수 없었다.

대신 필라테스나 요가, 혹은 발레 같은 조용하면서도 강사와 일대일로 할 수 있는 운동만 허락되었다.

시모를 따라 꽃꽂이, 요리 학원, 미술품 관람, 명품관 순회, 친목 도모를 위한 모임 등에 참석하는 것만이 일과의 다였다.

격하게 움직이고 땀을 흘려야 직성이 풀리는 시호에게는 끔찍한 나날이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시들어 가고 있을 때.

우울증이 극에 달한 어느 날, 시모와 함께 호텔에서 열린 파티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시모의 옆에 인형처럼 서 있던 시호는 케이크를 자르는 칼을 보며 무심히 생각했다.

‘저거라면 이 감옥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그저 머릿속으로 생각만 했다고 여겼는데, 몸이 멋대로 움직였다.

[꺄악!]

누군가 그녀를 보며 비명을 질렀고, 시모는 붉게 젖은 시호의 손목을 얼른 테이블보로 감싸며 애써 수습했다.

[아이가 서툴러서 칼에 베였네요.]

시호가 전직 검도 선수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 말을 믿지 않는 눈치였지만, 당시엔 변명거리가 그거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겉모습을 매우 중시하는 시모는 자신과 그룹의 이미지에 아주 조금의 티끌이라도 묻는 것을 못 참아 했다.

그렇기에 아들과 시호의 결혼도 허락한 것이다. 재계에서 드물게 화목하다고 알려진 RS그룹 일가에서 잡음이 새어 나가는 것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을 테니까.

같은 이유로, 이혼도 허락했다.

사유로는 서민 출신 며느리가 재벌가에 적응하지 못했다는 흔한 스토리를 내세웠다.

[그러게 내가 뭐랬니. 격에 맞지 않는 애를 억지로 꿰어 맞추니까 이 사달이 났잖아. 이혼 계약서 작성해서 당장 내보내! 난 저런 사람 더는 내 집에 못 들인다.]

남편인 재혁은 처음엔 반대했지만 부모님과 시호의 강한 결단 사이에서 점점 지쳐가다가 어쩔 수 없이 꼬리를 내렸다.

[당신이 우울하다니까, 이대로는 죽을 것 같다니까. 잠시 보내 주는 거야. 바람 쐬고 온다고 생각해.]

남편은 그것을 사랑이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네가 힘드니까 놔준다.

그러나 시호의 생각은 달랐다.

자신을 정말로 사랑했다면 어떻게든 옆에서 함께 이겨 내려 노력하지 않았을까. 무관심 속에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제게 호감과 미련은 남아있지만, 귀찮은 일을 맡기는 싫었던 남편은 마지막 선물을 통 크게 쐈다.

공식적으로는 위자료 10억을 받았다. 이혼 후 검도계에서 활동하겠다는 허락을 받아 내어 책정된 액수였다. 비공식적으로는 강남 한복판 상가 건물 한 채와 경기도 일대의 땅을 받았다.

이는 체면과 겉치레를 중시하는 시모의 성향 덕분도 있었다.

시모는 주위에 ‘그냥 몇 푼 쥐여 주고 내보냈어’라고 말하고 다녔는데, 아무리 보아도 도저히 ‘몇 푼’ 수준은 아니었다.

그럼으로써 집안의 재력을 과시하는 동시에 은근히 아들의 이혼을 알려, 결혼 적령기에 들어선 딸을 둔 사모님들로부터 새로 만든 예술 재단 산하 기관의 후원까지 받아 냈다.

참으로 마지막까지 그녀를 이미지 격상의 도구로 잘도 써먹는 사람들이었다.

“후. 그래도 이제 끝이야.”

이를 새옹지마라고 해야 할지. 어쨌든 시호에게는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상념에 잠겨 있던 시호는 연교시에 위치한 한옥 카페 <가배>에 들어섰다.

***

“서시호! 여기야, 여기.”

가장 안쪽으로 들어가니 창가에 앉아 있던 여자가 시호에게 손을 흔들었다.

“내가 국화차 시켜 놨어. 괜찮지?”

“응. 잘했어.”

맞은편에 앉는 시호를 살펴보던 민주가 디저트로 나온 쿠키를 그녀의 앞에 밀어 주었다.

“한동안 연락이 없어서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그러다 갑자기 연교에 왔다고 하고.”

“미안. 그렇게 됐어.”

민주는 연교시에서 같은 고등학교·대학교를 졸업한 친구로, 시호가 지금까지 가까이 지내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웃음이 많은 활달한 성격에, 누구와도 금세 친해지는 뛰어난 사교성을 갖춘 그녀는 신중하고 차분한 시호와는 정반대의 유형이었다.

또 학창 시절 옆에 딱 달라붙어 시호의 인간관계를 챙겨 준 고마운 사람이기도 했다.

검도부라 하교 후 친구들과 잘 어울릴 수 없던 그녀가 소외되지 않게 챙겨 준 것도 모두 민주였다.

가끔 이유 없이 토라졌다가 또 이유 없이 풀리곤 해서 까다롭긴 했지만, 어쨌든 가장 가까이 지내는 친구였다.

하지만 그런 민주와도 결혼 후에는 한동안 만나지 못하고 이따금 메신저로 안부를 주고받는 게 다였다.

그러다 일주일 전 민주와 통화를 하면서 이혼을 했다고 밝혔다.

기사가 나갈 때까지 기밀이긴 하지만 절친에게는 말해야 할 것 같았다. 부모님 외의 사람에게 답답한 속내를 털어놓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 결국엔 ‘이혼을 했다’는 객관적인 사실 외에 속마음은 감춰 두고 민주의 얘기를 들어 주어야 했지만.

“이야. 원래도 멋있었지만 돌싱 되고 나니까 더 멋있어진 거 같다?”

살짝 웃은 민주가 장난스럽지만 예리한 눈빛으로 시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래?”

“완전. 뭔가 여유로워졌어. 눈가도 부드럽게 풀렸고. 마음 편해 보인다.”

“그런가.”

“위자료 엄청 많이 받았나 보다, 이렇게 때깔 좋은 거 보면? 아아, 부럽다, 부러워.”

시호가 옅은 미소를 짧게 짓자, 아차 싶었던지 민주가 살살 눈치를 보았다.

“아고, 말이 헛나갔네. 아무리 그래도 이혼이 쉬운 일은 아닌데. 미안.”

“됐어. 그렇게 틀린 말도 아니고.”

“그래서, 이혼하고 한 달 동안 얼굴도 안 보여 주고 뭐 했어? 응? 여행이라도 다녀온 거야? 해외?”

“나 연교로 아주 왔어.”

“……응?”

“여기서 살 거야. 이제부터.”

“뭐라고?!”

민주가 눈을 크게 뜨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주위에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연교로 온다고? 왜? 이젠 부모님도 여기 안 사시잖아.”

시호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일단 앉아.”

“으, 으응.”

엉거주춤 자리에 앉은 민주가 여전히 놀란 눈으로 시호를 보았다.

“왜 그렇게 놀라?”

“왜는! 한마디 말도 없이 갑자기 연교에 온다니까…….”

“난 좋아할 줄 알았는데.”

시호가 민주를 지그시 응시했다.

민주는 눈웃음을 지으며 시호로부터 시선을 돌리지 않기 위해 애썼다. 예전부터 저 눈을 보고 있노라면 자신의 속이 낱낱이 읽히는 기분이 들었다.

“다, 당연히 좋지, 좋은데. 그래도 귀띔이라도 해 주지. 그럼 살 데는 정했어?”

“응. 아파트 계약했어.”

“어디?”

“유원 바람채.”

허억, 하며 입을 크게 벌린 민주의 동공이 잘게 떨렸다.

“윤기가 사는 데네…….”

민주가 반사적으로 중얼거렸다.

“윤기라면…… 기윤기?”

시호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움찔한 민주가 어색하게 웃었다.

“아, 응. 근데 언제 계약한 거야?”

민주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이혼하고 나서 바로.”

“야아, 너 근데 나한테 말도 안 하고! 되게 섭섭하다?”

“좀 정리된 후에 말하려고 했어. 근데 기윤기랑 연락해? 몰랐네.”

“그냥, 으음…….”

“뭐. 아는 주민 한 명 생겼네.”

여상한 시호의 말투에 민주는 테이블 밑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언젠가 단지 내에서 마주칠 수도 있겠다. 알은척하면 받아 주려나? 본 지가 오래돼서.”

시호는 윤기를 떠올렸다.

무뚝뚝했지만 저를 유난히 잘 따랐던 검도부 후배였다.

지금은 대한민국 검도의 간판이자 명실공히 원톱으로 우뚝 선 국가대표 스타 선수다.

그는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이미 대학생에 필적하는 실력과 남다른 피지컬, 수려한 외모로 유명했다.

극히 친한 친구들 외에는 말도 잘 섞지 않았던 녀석이 드물게 먼저 말을 건네는 상대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시호였다.

[선배.]

[대련 받아 달라고?]

[……예.]

[좋아. 첫 번째로 받아 줄게.]

[……감사합니다.]

대련을 할 때에도 윤기는 상대에게서 절대로 눈을 떼지 않으며 전력을 다해 부딪쳐 왔다.

웬만해선 기죽지 않는 시호도 이따금 윤기의 눈빛에 움찔할 때가 있었다.

고등학생이던 때를 떠올리던 시호의 붉은 입술이 위로 살짝 들렸다.

“궁금하네. 기윤기.”

그가 검도를 할 때면 장내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동경과 감탄 어린 시선으로 윤기를 보았었다.

떡 벌어진 어깨와 탄탄하고 너른 등판을 넋을 놓고 보고 있던 여학생들은 그가 단상을 내려오자, 너 나 할 것 없이 준비한 꽃다발을 윤기의 품에 안겼었다.

꽃을 든 남자가 꽃길을 걷는 모습은 아직까지도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에게 자주 회자되었다.

“아직 연교시청 소속이던가?”

“맞아. 곧 계약 기간이 끝난다는 것 같던데.”

오호. 시호의 왼쪽 눈썹이 살짝 들렸다.

“계약이 곧 끝난다…….”

“근데 백 퍼센트 재계약하겠지. 연교시청에서 놔 줄 리가 없잖아. 그나마 윤기 덕분에 검도에 관심 가진 사람들이 늘었는데. 윤기도 현재 최고 대우 해주는 연교시청을 떠날 리도 없고.”

민주가 아, 하며 화제를 돌렸다.

“너 오후에 일정 있다고 일찍 가야 한다며.”

전화로 약속을 잡을 때 민주에게 미리 사정을 알렸었다.

“무슨 일정인데?”

“도장에 수전을 설치했거든. 그거 살펴보러.”

“도장?”

시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검도단 창단할 계획이야. 수련관으로 쓸 건물 매입해서 현재 리모델링 중이고.”

민주는 내용이 한 번에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검도단을 만든다고? 연교에서?”

시호의 눈이 목표물을 포착한 사수처럼 반짝 빛났다.

“응. 기윤기를 내 첫 선수로 영입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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