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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6화 (161/161)

외전 6화

“마, 말도 안 돼…….”

콜록, 콜록.

그 희박하다는 ‘벼락에 맞아 죽을 확률’을 눈앞에서 맞닥뜨렸지만 당황할 새도 없었다.

방금 사용한 언령 때문에 잔기침이 튀어나왔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성녀님, 괜찮으십니까!”

조안 경이었다.

경도 함께 와 주었구나. 많이 바쁠 텐데…… 미안함과 고마움을 담아 그녀에게 대답하려던 때였다.

“성…… 녀?”

제압당한 나인 놈들이 혼란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서, 성녀라고?”

“그래. 저분이 성녀님이시다.”

이번에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엘리엇의 모습을 발견한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아무래도 내가 아는 모든 이가 이곳에 총출동한 모양이었다.

‘조안 경에, 엘리엇까지 있을 정도면 완벽한 정예 멤버인데…… 내가 여기 있을 줄은 어떻게 알고 온 거지?’

문득 그런 의문이 스쳤다. 그러는 동안 엘리엇이 말을 이었다.

“동시에 황후 폐하이시기도 하지. 네놈들이 치를 죗값이 이제 좀 짐작이 가나?”

그렇게 으르는 엘리엇은 제법 남주다운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었다. 셀레나와 있을 때는 미성숙한 소년처럼 다투기만 해서 실감하지 못했는데, 엘리엇도 이제 어엿한 성기사였다.

“제, 젠장. 성녀라니…….”

“언령으로 부길드장님을 그렇게 만든 거였나?”

“폭우도, 벼락도 전부 성력이었어……!”

나인 놈들이 이상한 착각을 하기 시작했다.

‘언령은 내 능력이 맞지만, 그 뒤는 아닌데.’

날씨를 조절하다니. 난 셀레나가 아니다. 아니, 셀레나라 하더라도 아까처럼 어마어마한 폭우를 일으키거나, 벼락으로 세심하게 사람 한 명을 해치울 만큼 무시무시한 능력을 소유하진 못했다.

하지만 저들의 오해를 굳이 정정해 줄 필요는 없었다. 나는 이안의 목을 살짝 끌어안았다.

“저어, 미안한데…… 이안.”

위를 올려다보자 시리도록 푸른, 하지만 동시에 벨벳처럼 부드러운 눈이 나를 마주했다.

“잠시만, 자도 될까요? 조금 피곤해서. 아주 조금이지만요.”

행여나 또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 나는 얼른 덧붙였다.

이안이 고개를 숙이더니, 살며시 내 이마 위에 입을 맞췄다.

“주무십시오.”

자장가처럼 부드러운 목소리가 달래듯 나를 향했다.

“깨어나실 땐 이미 집일 겁니다.”

집, 그래.

우리 집.

나는 눈을 감은 채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여행이 끝났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마침내는 끝이 났다.

이제는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 * *

“하암.”

나는 입을 가리고 하품했다.

곁에 있는 이안에게만 들릴 만큼, 아주 아주 작게.

“세상에는 나라가 별처럼 많네요.”

이번 역시 이안에게만 들리도록 조그마한 목소리였다.

이안이 쿡 웃음을 흘렸다.

“나라도, 부족도 많긴 하죠. 하지만 우리가 이렇게 오래 인사를 받고 있어야 하는 건 사실 전적으로 그대 때문입니다.”

“어째서요?”

“여기 들어오는 사신들의 대다수는 그대를 보러 온 이들일 테니.”

“말도 안 돼요.”

나는 단칼에 고개를 내저었다. 이안이 내가 앉은 황후좌 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더니, 은밀히 속삭였다.

“그럼 내기하죠. 다음번에 들어오는 사신의 시선이 어딜 먼저 향하는지.”

“흠, 좋아요.”

나는 흔쾌히 끄덕였다.

자신 있었다. 방 안에 이안이라는 존재가 들어 있는데, 그가 아닌 다른 인간을 먼저 쳐다본다는 건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확신했다.

“내기 상품은 뭘로 할까요?”

“가장 보편적인 걸로 하죠.”

이안이 빙그레 웃었다.

“소원 들어주기.”

“흠. 좋아요.”

나는 자신 있게 수락했다.

이안의 배포라면 소원에 한계 따윈 두지 않을 것이다. 뭘 소원으로 빌까 생각하자니 가슴이 금세 두근거렸다.

머지않아 다음 사신 차례가 되었다.

“시오 왕국의 체셔 프린스,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를 배알하십시오.”

이윽고 다음 사신이 접견실 안으로 입장했다. 서글서글하게 생긴 사막 부족 남성이었다.

남자이긴 했지만 그래도 내기가 걱정되진 않았다. 성별에 상관없이 인간이라면 아름다운 존재에 눈이 끌리게 마련이었다.

여유롭게 내 승리를 확인하려던 순간이었다.

‘응?’

사신의 반짝이는 눈길이 나를 향했다.

정확히 나를. 황좌가 아닌, 그 옆 황후좌에 앉아 있는 나를.

“뵙게 되에 무한한 영광입니다, 황후 폐하. 그리고 황제 폐하.”

심지어 내게 먼저 인사하기까지 했다.

“지난번 배알했을 때에는 황후 폐하께서 계시지 않아 몹시 아쉬운 마음이었습니다. 마침내 이렇게 대륙에서 가장 신의 사랑을 받으신다는, 현숙하며 우아하시고 아름다우시며 신앙심이 바다처럼 깊으신 황후 폐하를 뵙게 되어 가문, 아니. 저희 왕국의 영광입니다.”

맙소사.

길디긴 수식어를 들은 내 얼굴이 살짝 파리해졌다.

‘아무리 들어도 익숙해지질 않네.’

계약을 떨쳐 버리기 위한 여행에서 돌아온 이후, 나는 매일 이와 같이 뱀처럼 긴 수식어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 망할 나인 놈들 때문에!’

원흉은 그날 잡아 온 나인의 잔당들이었다.

수도까지 잡혀 온 그놈들은, 심문당하는 내내 헛소리를 떠들었다고 한다. 내가 저들 수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한 데다가 불을 끄기 위해 폭우를 불러오고, 심지어 탈주자에게 손수 벼락을 내리꽂았다는 이야기까지.

하나 정도는 사실이지만 나머지는 터무니없는 소리였다.

하지만 헛소문은 연기처럼 스멀스멀 퍼져 나갔고, 이야기가 워낙 황당하긴 하지만 그만큼 자극적인 탓일까. 곧 수도 전역에 저 내용을 모르는 사람은 없게 되었다.

수도뿐이면 다행이지. 다른 나라까지 퍼져 나가는 바람에 나는 외교관들을 맞이할 때마다 말도 안 되는 신격화를 당해야만 했다.

‘으으, 맞아. 이런 문제가 있었지.’

나는 현재 내가 내기에서 현저히 불리한 상황임을 이제야 깨달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안을 먼저 쳐다볼 줄 알았는데.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아 이안 쪽으로 흘끔 시선을 돌렸다. 호수 위에 떠오른 달을 보듯 시야가 환해지는 미모가 거기 있었다.

매일 보는 모습이지만 아직도 도무지 적응되지 않는 얼굴이었다.

부인인 내가 이런데, 타인이라면 오죽할까. 넋을 놓고 구경만 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내기에서 진 게 아직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이안이 나를 돌아보더니 싱긋 웃어 보였다. ‘그것 봐’라고 말하는 듯한 웃음은 살짝 얄미웠지만 약 올라 하기엔 너무 예뻤다.

‘하긴. 이안은 승부에서 지는 법이 없지.’

나는 내심 납득했다. 이안이 던진 승부수는 어긋난 적이 없었다.

계약 때문에 행적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진 나를 찾을 때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내가 있는 장소를 정확히 찾아냈냐고 묻자, 이안은 내 뺨에 키스하며 대답했었다.

‘그대는 추운 것을 싫어하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더운 걸 즐기는 것도 아니죠.

이안의 목소리가 나긋나긋 이어졌다.

그 말이 맞았다. 나는 추위에도 더위에도 강하지 않다. 그러니 제국의 북쪽 국경과 남쪽 국경은 자연스레 물망에서 제외되었다.

‘일부러 교통이 험난한 지역을 택해 갔을 리는 없으니 목적지는 아마도 크게 번화한 국경 도시였을 테고.’

그렇다면 남는 것은 동쪽과 서쪽 국경의 몇몇 도시로 추려지는데, 그대는 뭐든 새로운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까. 이안이 이어 말했다.

동쪽 도시들은 수도와 건축 양식이나 생활 방식이 대체로 비슷하다. 하지만 서쪽은 레하트 제국이 아니라고 느껴질 만큼 이국적이었다. 범위를 서쪽의 큰 국경 도시로 잡으면 후보는 몇 남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그래도 최정예 부대를 보낼 지역을 정하는 데에는 도박이 섞여 있었다. 이안은 승부를 걸었고 이번에도 이겼다.

‘하지만, 내가 짚은 곳이 틀렸다 하더라도 그대를 구해 내는 결말은 변함없었을 겁니다.’

이안은 그제야 나를 찾기 위해 전 제국에 기사를 풀었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놀라는 내게 입 맞춘 그가 속삭였다.

‘난 그대 안전을 확률에 맡길 만큼 무모하지 못하니.’

“……리하여, 저희 시오 왕국은 지난번 황제 폐하의 너그러운 조치에 대한 감사의 선물로 이것을 준비했습니다.”

잠깐 상념에 빠져 있는 사이 시오 왕국의 사신이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건…….”

나는 신기한 눈길로 그 물건을 더듬었다.

그것은 달걀 모양의 주먹만 한 황수정이었다. 겉면이 화려한 색감의 보석들로 장식되어 있어 보기만 해도 눈이 황홀한 만큼 호화로웠다.

“다산을 상징하는 보석입니다, 황후 폐하.”

관심을 보이자, 체셔라고 했던가? 시오 왕국의 사신이 기쁜 표정으로 설명했다.

“이 보석을 지니고 있는 분께는 아주 아름답고 강한 아기님이 찾아든다는 전설이 있지요.”

아, 아기.

갑작스러운 단어에 기침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황후의 위엄을 지키기 위해 간신히 참는데 이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런가?”

“예! 더불어 산모님의 건강도 더할 나위 없이 지켜 준다고 합니다.”

“아주 의미 깊은 보석이군.”

이안이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선물 고맙소. 제국은 잊지 않고 시오 왕국의 우정을 기억할 것이오.”

“감사합니다, 황제 폐하. 감사합니다!”

얼굴이 활짝 핀 체셔가 연신 감사 인사를 했다.

나는 살짝 붉어진 얼굴을 감추느라 괜히 뺨을 감싸며 말했다.

“신경 써 주어 고맙습니다.”

“저야말로 이렇게 반가이 받아 주시니 감읍할 따름입니다. 저 체셔, 고국으로 돌아가서도 건강한 아기님의 탄생을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분명 아주 뛰어난 아이가 태어나 대륙을 호령하게 될 거라고 체셔가 장담에 장담을 이었다.

체셔가 나가고, 이안이 은밀히 황후좌를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그렇다고 하는군요.”

“……뭐가요.”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퉁명스레 대답하자 이안이 매끄럽게 웃었다.

“오늘 접견은 일찍 마치도록 할까요.”

잎새가 나부끼듯 속삭이는 목소리에 가슴이 간질거렸다.

나는 이안을 바라보았다. 푸른 눈동자가 나를 마주 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 칼날처럼 시리다고 느꼈던 눈동자는, 이제 끝 모를 바다처럼 깊은 다정함과 함께 나를 담고 있었다.

이 눈동자와 함께라면 나는 어디든 갈 수 있을 것이다.

돌연 그런 확신이 들었다.

아무리 추운 곳도, 더운 곳도, 예상치 못한 슬픔이 늪처럼 깔린 곳이라 해도. 이안이 곁에서 손을 잡아 준다면 걸음을 내딛는 데에 두려움은 없을 터였다. 아름다운 꿈결 속을 걷고 있는 듯한 지금처럼.

“사랑해요.”

둑이 터져 나오듯 감정이 언어를 타고 흘러나왔다.

이안이 놀란 눈동자를 했다.

“어떻게 알았죠? 내기에서 이긴 대가로 그 말을 요구하려던 것.”

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말은 일 초마다 요구하셔도 들어줄 수 있는걸요.”

“그랬다간 입술이 부르트고 말 텐데.”

살며시 다가온 이안이 내 입술에 입을 맞췄다.

“사랑합니다. 아이린.”

식물에 닿는 햇빛처럼, 물처럼 그 말이 내 마음을 적셨다. 나는 눈을 감고 가만히 미소 지었다.

문득, 창문 닫힌 접견실 어디에선가 산들바람이 한 줄기 불어왔다.

깃털처럼 가볍게 다가온 바람이 축복하듯 내 귓가를 간지럽혔다.

<가짜 성녀의 화려한 사기 결혼> 외전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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