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5화
뭘 어쩌겠다고?
“숲에 지어진 나무 집이라 아주 활활 잘 탈 거야.”
“야! 술 좀 내놔 봐!”
저놈들, 진심이구나.
나는 기가 막혀 멍하니 놈들을 노려보았다.
기껏 날 여기다 묶어 놓고, 한다는 게 불 지르고 도망치기라고?
직접 끝장내지도 못할 만큼 내가 무섭단 말이야?
‘나인이. 그 나인이 이렇게 형편없는 겁쟁이 집단일 줄이야…….’
어쩌다 손에 쥐게 된 권력에 취해 있었을 뿐, 놈들은 생쥐보다도 조그맣고 볼품없는 담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 주제에 피해자들 위에서 잘난 체하며 거만을 떨었다는 것이 우습고 역겨울 만큼.
한 놈이 나무 바닥에 거침없이 술을 뿌렸다. 지독한 알코올 냄새가 코를 찔렀다.
‘망할!’
놈들의 말은 맞았다. 이곳에 불을 붙이면 꼼짝없이 모든 게 다 타 버릴 터였다.
“서둘러! 그 용병을 놓친 게 찝찝하단 말이야.”
그 용병?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잡히지 않은 용병이 있는 것일까?
희망을 가져 보려던 그 순간, 놈들 중 하나가 성냥에 불을 붙이고는 바닥에 떨어뜨렸다.
화르륵!
무섭도록 불길이 타올랐다.
“아무리 괴물이어도 불에 멀쩡하진 못하겠지.”
성냥을 떨어뜨린 놈이 이죽거렸다.
불길은 빠르게 나무 바닥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됐다. 튀자!”
놈들은 불바다가 되어 가기 시작하는 집을 두고 빠르게 달아났다.
시뻘건 불꽃이 여기저기서 몸집을 키우기 시작했다. 주위를 둘러보자 저 반대편 기둥에 두 용병이 묶여 있는 것이 보였다. 켄과 칼리 같았다.
‘이대로라면 다 같이 사이좋게 타 죽겠는걸.’
나는 필사적으로 몸부림을 쳐 보았으나, 단단한 구속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꼼짝없이 화형이다. 나는 탄식했다.
‘아, 부길드장을 그렇게 만든 인과응보인가…….’
엘룬 신이시여, 당신의 카르마는 참으로 신속하고 정확하군요…….
죽기 직전에는 주마등이라는 것이 스쳐 지나간다고들 하던가.
놀랍게도 그 낭설은 사실인 것으로 밝혀졌다.
내 일생이 짧은 시간 눈앞에 상영되었다. 그 뒤에는 그리운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눈을 감자, 매캐한 연기 냄새를 제치고 이안의 체취가 코끝에 감겨 왔다.
환영 속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푸른 눈이, 마치 마주하고 있는 것처럼 생생했다.
그 눈을 들여다보며 나는 속삭였다.
‘내가 여기서 이렇게…… 너를 버리면 안 되는데.’
그럴 순 없었다. 나는 내가 살려 낸 이안의 남은 일생을, 원작 속 활자가 담지 못했던 그의 진짜 일생을 지켜봐야만 했다. 내 두 눈에 똑똑히 담아야 했다. 결혼 서약에서 맹세했듯, 검은 머리가 하얗게 새어 버릴 때까지.
그러니 정신을 차려야만 해.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도무지 의식이 명료해지지 않았다. 지독한 연기가 머릿속을 몽롱하게 만들었다.
점점 커지는 불길이 내 옷자락에 닿기 직전이었다.
불길이 타오르는 소리 너머로, 기묘한 소리가 귓전에 섞여 들어왔다.
쏴아아!
‘응?’
나는 간신히 눈꺼풀을 열었다.
가볍고 빠른 것이 거세게 지면을 때리는 소리. 이건 마치…….
‘비?’
고개를 꺾은 나는 힘겹게 창밖에 시선을 던졌다. 내 눈이 커다래졌다.
‘비…… 비다.’
새까만 먹구름이, 세상을 모두 삼킬 듯 거센 폭우를 쏟아붓고 있었다.
“끄아악! 이게 뭐야!”
“갑자기 웬 소나기야!”
아직 멀리 도망가진 못했는지, 저 너머에서 나인 놈들의 고함이 들렸다.
쏴아아아…….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커다란 물소리에 정신이 조금씩 또렷해졌다.
‘비, 비가 오고 있어.’
그렇다는 건…….
주위를 둘러본 나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무너진 지붕 위로 빗방울이 세차게 떨어지고 있었다. 악마처럼 혀를 날름거리던 불길도 그 거센 물줄기 앞에서 서서히 힘을 잃었다.
‘살았다!’
환희와 함께 그런 깨달음이 찾아왔다.
나는 황급히 주변을 살폈다. 불에 구워지지 않게 된 건 일단 천만다행이다. 하지만 일이 끝난 건 아니었다. 어떻게든 이 구속구를 해제해야만 했다.
근처에 날붙이, 혹은 구속구에 비빌 만한 날카로운 것이라도 없을까. 나는 구속당한 몸으로 최선을 다해 주위를 탐색했다.
“끄어어억!”
“으아악!”
시끄러운 비명이 들려왔다.
무시하고 마저 집중하려는데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 좀 맞는다고 저렇게 꽥꽥 비명을 질러? 뭔가 이상-’
“사, 살려 줘! 살려 주시오!”
“협상을- 크억!”
피비린내 나는 비명에 나는 깜짝 놀라 다시금 창문을 돌아보았다.
내 눈이 삽시간에 커다래졌다.
‘어?’
은빛 갑주를 입은 기사들이 숲을 난자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숲에 찾아온 불청객들을.
가슴이 미친 듯이 뛰어 댔다. 은색 갑옷이 의미하는 저들의 소속은 하나뿐이었다.
‘성기사단!’
“으읍! 읍!”
여기예요! 여기!
일 년간 한 성당에서 부대껴 온 성기사들을 만나자 반가움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저 뒤에선 물동이를 들고 달려오던 앨리샤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검을 뽑아 드는 것도 보였다.
그들에게 내 존재를 알리기 위해 한껏 몸을 뒤흔들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풀밭에 널브러져 있던 반 시체의 몸을 들어 올렸다. 멱살을 한 손으로만 쥐고도 사람을 들어 올릴 만한 괴력의 소유자였다.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나무에 가려진 탓에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캑, 캑!”
“고통 없이 죽고 싶나?”
빗소리에 섞여 목소리가 흐릿하게 들렸다. 그런데도 심장이 제멋대로 날뛰기 시작했다.
“제, 제발-”
“그럼 말해. 내 부인께선 어디 있지?”
나는 숨을 멈췄다. 내가 아는 한, 저렇게까지 오만하고 또 차디찬 목소리의 주인공은 한 명밖에 없었다.
“흐으읍! 읍!”
‘이안! 여기! 여기!’
애타게 외쳤으나 틀어막힌 입이 낼 수 있는 소리는 한계가 명확했다.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는 목소리.
그런데 저 너머에 서 있던 그가 순간, 거짓말처럼 고개를 틀었다.
정면으로 마주친 시선에 심장이 크게 박동했다.
“……아이린.”
탄식처럼 중얼거린 그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들고 있던 인간을 헌신짝처럼 내버린 이안이 놈의 복부에 검을 꽂아 넣었다.
“허어억!”
단칼에 목을 쳐 주지 않았으니 고통스럽기 그지없는 최후를 맞이할 터였다. 저지른 업보에 그럭저럭 들어맞는 마지막이었다.
“아이린.”
이안은 거침없이 내게로 다가왔다. 긴 다리로 성큼성큼 달려오자 멀었던 거리도 금방이었다.
나는 순식간에 오두막 안까지 침입해 온 그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꿈결 같았다. 일주일 전만 해도 매일매일 이 얼굴을 마주하는 게 당연했는데, 지금은 다시 없을 선물로 느껴졌다.
내 온몸을 구속하고 있던 구속구를 이안이 순식간에 해제해 냈다. 쓰러지듯 그의 품으로 파고드는 나를 안아 들며 이안이 말했다.
“다시는…… 다시는, 그대와 계약 같은 건 하지 않을 겁니다.”
나를 꼭 끌어안은 팔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대 곁에 내가 함께하지 않는 일도 없을 겁니다.”
무슨 이유를 대서든, 설령 영혼에 건 계약이 영혼을 파괴하더라도.
이어지는 맹세에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흐르는 눈물이 뺨을 적셨다. 그냥, 미안했다. 행복하기만을 바라는 사람이 나로 인해 슬퍼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가슴이 꺼질 듯이 미안했다.
“앞으로는…….”
메인 목소리로 나는 이안에게 속삭였다.
“거머리처럼 찰싹 달라붙어 있을 거예요. 한시도 떨어지지 않을 거예요. ……미안해요, 그리고.”
“그런 말 마십시오.”
이안이 내 머리칼에 입을 맞췄다.
“그댄 내게 미안해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 체온 자체만으로도 축복인데.”
그렇게 말한 이안이 나를 부드럽게 안아 들었다. 나는 얼른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이제 돌아가죠. 집으로.”
조용히 내려앉는 목소리에 나는 눈을 감고 미소 지었다.
“네. 집으로.”
오두막 밖으로 걸어 나왔을 때, 상황은 얼추 종료되어 있었다.
절명한 이들은 운이 좋았다. 그렇지 못한 잔당들은 성기사들에게 포박당하고 있었다. 저들은 수도로 끌려가 마땅히 받았어야 할 죗값을 마저 치르겠지.
‘잠깐.’
성기사들의 시야가 닿지 않는 곳에서 한 놈이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지자 놈이 냅다 등을 돌리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저기!”
나는 그놈의 등에 대고 삿대질을 했다. 내 목소리를 들었는지 놈이 더 빠르게 줄행랑을 쳤다. 발목에 날개라도 단 듯했다.
“멈춰!”
아, 나도 모르게 언령을 실은 것 같아.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새하얀 빛줄기가 저 앞에 내리꽂혔다. 눈부신 빛에 나도 모르게 눈이 질끈 감겼다.
콰르릉!
잠시 뒤, 귀가 멀어 버릴 듯한 굉음이 들렸다.
황급히 눈을 뜬 나는 멍하니 저 앞을 바라보았다. 달아나던 나인의 잔당이, 새까맣게 타 버린 채 풀밭 위에 쓰러져 있었다.
“벼…… 벼락이다.”
포박당하고 있던 놈들 중 하나가 신음하듯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