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4화 (159/161)

외전 4화

접견실의 문이 거세게 열렸다.

황제와의 만남을 고대하며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화들짝 놀란 눈을 했다.

이안은 그 시선 한가운데를 성큼성큼 걸어갔다.

‘폐하께서 대체 왜 저러시지.’

루시안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 뒤를 빠르게 좇았다.

제 집무실 문을 벌컥 연 이안은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거대한 마호가니 책상 한편에는, 백색 종이 한 묶음이 묘한 존재감을 자랑하며 붙박여 있었다.

거침없이 종이 묶음의 마지막 장을 넘긴 이안은 아래 부근에서 시선을 멈췄다.

“폐하, 이건…….”

이안의 시선을 따라간 루시안이 숨을 삼켰다.

용병단장이 직접 적은 사인 옆에 박혀 있는 보석이 선명한 주홍빛을 띠고 있었다.

“용병 계약에 무슨 문제가?”

너무 놀란 나머지 루시안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계약서에 박혀 있는 보석은 용병의 의뢰 진행 상태를 의미했다.

초록색은 순항 중, 파란색은 의뢰 완료. 주황색은 의뢰가 난관에 봉착했음을.

그리고, 붉은색은 의뢰 불능을 의미했다.

“삼십 분 전, 집무실을 떠나시기 전까지만 해도 분명 초록빛을 띠고 있었습니다. 제가 확실히 확인했어요.”

“그래. 알아.”

주홍빛 보석을 노려보며 이안이 말했다. 그의 주먹에 파랗게 핏줄이 돋았다.

“그래도 아직 붉은빛은 아닙니다. 의뢰가 실패한 것은 아니에요.”

루시안이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스스로를 달래는 듯한 어투에는 크게 신뢰감이 없었다.

붉은빛이 의미하는 것은 의뢰 불능. 호위 계약이 의뢰 내용인 이 경우에 있어선, 곧 호위 대상의 죽음을 뜻했다.

계약서를 뚫어질 듯 노려보며 이안이 말했다.

“성기사단과 제국 군사를 일으켜라.”

“예! 알겠습니다. 그런데 어느 지역의……?”

루시안이 난감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아이린이 어디로 향했는지 모른다는 것이 이번 계획의 크나큰 맹점이었다.

이안이 씹어뱉듯 답했다.

“제국 전 지역.”

* * *

“고객님! 정신 차리십시오. 차리셔야 합니다!”

칼리가 다급히 내 어깨를 흔들었다. 나는 이를 악물며 흐릿해진 초점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

한결 가까워진 적들은 용병들이 아닌 나를 집중적으로 노리기 시작했다. 용병들의 목표가 자신이 아닌 내 안전이라는 것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크윽!”

앨리샤의 악문 신음이 들렸다. 잘 버텨 오던 이들이지만, 나를 지키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몸까지 지키는 것은 쉽지 않아 보였다.

그래도 용병단장이 보증한 이들답게 셋은 쉬이 무너지지 않았다. 적들이 하나둘 스러져갔다.

“이놈들, 인형인가? 자기들 목숨을 내던지는 데 아무 거리낌이 없어!”

적들의 검을 쳐내며 켄이 악쓰듯 외쳤다.

그 말에 나는 직감했다. 저 전투 요원 중 상당수는 아직 해방되지 못한 나인의 노예들이리라는 것을.

노예 중에는 감정이 완전히 거세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이들도 있었다. 낭패였다. 동요를 예측할 수 있는 사람보다 감정 없는 기계가 더 상대하기 어려운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그때, 또 한 번 그 끔찍한 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끼기기긱!

“흐읏!”

“고객님!”

칼리의 외침과 함께, 킬킬거리는 소리가 다가왔다.

“역시 찰지게 반응하는구만!”

“가판대에서 고문 도구 만지작거릴 때 표정을 보고 의심했었는데, 설마가 역시였어!”

“그래, 내가 말했잖아. 특히 낙인을 보고 허옇게 질리던 그 표정! 빼도 박도 못할 증거였지.”

비열한 낄낄거림에 나는 입술을 씹었다.

카라반이 호위해 주던 여행객 중, 하필 나인의 잔당들이 섞여 있었던 모양이었다.

“첸, 넌 천재야! 이 소리에 노예 잡것들이 반응하리라는 걸 어떻게 생각해 냈지? 아주 좋은 아이디어였어.”

비열하게 웃는 놈은, 전투 요원들보다도 두꺼운 갑옷을 걸친 것이 아무래도 이곳의 대장인 듯했다.

용병들은 공세를 막느라 놈이 건들거리며 가까워지는 것까지 막지는 못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거였죠, 부길드장님. 그건 우리 대장간에서 고문 도구를 만들 때 나던 소리였으니까요.”

첸이라 불린 남자가 끌끌 웃으며 답했다.

“노예 놈들 바로 옆에서 말입니다! 그때 일그러지던 노예 놈들 표정이 어찌나 볼만했는지. 이젠 그 맛을 보기 힘든 게 아쉽군요.”

“좋은 시절은 다 갔지. 그래도 아직 이렇게 가끔 재미 볼 거리가 남아 있어서 다행이야.”

그렇게 말하며 놈들의 대장이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언뜻 보기에 낡아 보이는 종잇조각이었다.

‘주문서다!’

마탑에서 판매되고 있는 것을 본 적 있었다. 마법을 종이에 담아, 찢기만 하면 일반인도 일회용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남자가 종이를 끄트머리부터 찢기 시작했다. 찢겨 나간 부분부터 붉은 화염이 혀를 날름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막아야 해.’

저것만은 막아야 한다는 예감이 들었다. 나는 꽉 이를 악물었다.

‘이안과 약속했는데.’

내 몸을 해치는 일은 더 이상 하지 않겠다고 이안과 굳게 약속했었다.

하지만 이런 경우라면야 이안도 이해해 줄 거다.

아니, 이해받고 말고 일단 내가 살아야 했다. 나는 입술을 열었다.

“움직이지 마!”

목에서부터 거센 불꽃이 솟구쳐 올라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부길드장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눈꺼풀 하나 깜빡이지 못한 채, 그는 그대로 못 박힌 듯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부하들이 그런 부길드장을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부길드장님, 왜 그러십니까?”

“읍, 흡……!”

성대도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지, 부길드장의 입에서 괴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언령이 제대로 먹혀들고 있었다.

나는 그를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

“손에 들고 있는 그거, 찢어. 지금 그 자리에서.”

부길드장의 눈이 더 커다래졌다.

그의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미 끄트머리가 찢긴 주문서에서부터 빨간 불꽃이 조금씩 더 넘실거리며 튀어나왔다.

조금씩, 조금씩 주문서의 균열이 더 심해졌다. 그러던 어느 순간 부길드장의 손이 멈췄다. 손의 떨림이 격렬해졌다.

“찢어!”

부길드장의 두 손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며, 주문서가 두 동강 났다.

화르륵!

순식간이었다.

시뻘건 불꽃이 그를 손부터 집어삼켰다.

“으, 으아악! 부길드장님!”

“무, 물! 물을 가져와라!”

“여기 물이 어디 있습니까!”

적들이 우왕좌왕 갈피를 잡지 못했다.

“끄아악! 끄으어억!”

불과 하나가 된 부길드장으로부터 끔찍한 비명이 흘러나왔다.

나는 그를 똑똑히 노려보았다.

이 고통으로도 저자는 평생 지어 온 죄를 속죄하지 못할 것이다. 다른 이들에게 강제로 선사한 아픔에 비하면 새 발의 피도 되지 못할 테니까.

“크아아아악!”

마지막 단말마를 끝으로, 부길드장의 몸이 풀썩 땅에 쓰러졌다.

풀밭으로 옮겨붙은 불이 확 주변으로 번져 나갔다. 순식간에 숲이 지옥 같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큭! 눈이 따가워!”

“앞이 안 보여!”

자욱해진 연기에 시야가 혼란스러웠다. 아군의 것인지, 적군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비명이 여기저기서 난무했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던 순간이었다.

타앙!

귓전을 뚫는 굉음과 함께 내 온몸이 조여들었다.

“으윽! 놔!”

언령을 아무리 써도 몸을 죄는 것은 사라지지 않았다.

잠시 뒤 나는 그것의 정체가 밧줄로 만들어진 그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물건에 언령이 통할 리가 없었던 것이다.

“자, 잡았다. 일단 노예는 잡았어!”

얼떨떨한 환호 소리와 함께 매캐한 연기가 콧속으로 들어왔다. 누군가 내 등을 후려치는 것을 느끼며 나는 정신을 잃었다.

* * *

“으윽…….”

두통과 함께 나는 가물가물 눈을 떴다.

보이는 것은 낯선 풍경이었다.

내 침실의 크림색 벽지도, 아침이 되었다며 상냥하게 웃는 아네트의 얼굴도 아니었다. 내 이마에 입을 맞추는 이안은 더더욱 아니었다.

“깨, 깨어났다.”

낯선 얼굴들이 이곳저곳에서 나를 바라보았다. 우리에 갇힌 짐승을 구경하듯.

“입마개는 제대로 됐지?”

“응, 일단은.”

“구속도?”

“사지를 다 묶어 놨어.”

놈들이 저들끼리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제야 내가 처한 상황을 깨달았다.

‘……잡혀 왔구나.’

그 발버둥에도 불구하고 놈들에게 당하고 만 것이다.

나는 주위를 살피기 위해 애썼다. 용병들은 살아 있을까? 특히 칼리의 부상이 심했는데.

“아주 사특한 계집이야.”

“부길드장님이 자기 손으로 주문서를 찢은 광경만 생각하면 아직도 소름이 돋아.”

“대체 무슨 수작을 부린 거지?”

“우리도 노예들을 그렇게까지 완벽하게 조종하진 못해.”

놈들이 두려움 서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엄청 강한 대마법사가 아닐까?”

“토니가 마력은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잖아. 게다가 이건 원래 우리 노예였다고. 해방된 게 고작 얼마 전 일인데 그새 대마법사가 어떻게 돼?”

“그럼 아까 그 능력은 대체 뭐였던 거야. 우린 노예에게 그런 능력을 이식하는 데 성공한 적은 없어.”

“그야 그렇지. 그랬다면 우리가 제국도 지배했을 테니까.”

얼씨구. 나는 헛웃음을 쳤다.

놈들은 자기들끼리 상상의 나래를 부풀리며 온갖 망상을 떠들어 대고 있었다.

내 정체가 대마법사라는 설부터, 천재적인 정신의학자, 최면술사라는 설까지. 가만 놔두면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능력이 다 등장할 기세였다.

‘저렇게 많은 가설이 튀어나오는데도 아직 정답이 안 나왔다는 게 신기할 정도다.’

하긴. 저놈들도 쉽사리 떠올리긴 힘들겠지.

제 놈들 앞에 묶여 있는 내가 설마 성녀이리라는 건.

‘내 정체를 아직 모르는 걸로 봐서, 변장은 아직 잘 이어지고 있는 것 같고.’

변장. 거기 생각이 미친 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어쩌면 내 정체를 밝히는 것이 나을지도 몰랐다.

‘날 여기 이렇게 묶어 둔 걸 보면, 내게 인질로서의 가치가 있다고 여긴다는 뜻이겠지.’

그리고, 내 입으로 말하기엔 아직 많이 어색하고 민망한 이야기이지만.

이 제국에서 이안이 아니고서야, 황후이자 성녀인 내 신분보다 더 가치 높은 인질이 있을까?

‘내가 황후라는 걸 알게 되면, 겁먹고 달아날지도 모르고.’

아무리 막 나가는 나인 놈들이라 해도 이안과 제국에게 추적당할 빌미를 얻고 싶진 않을 터였다. 나인을 소탕할 때 간신히 달아났을 이놈들이라면 더더욱.

나는 잠시 후 결정을 내렸다.

‘그래. 내 이름을 밝혀야겠어.’

결론지은 나는 몸부림을 쳤다. 사슬이 쩔렁거리는 소리가 나며, 놈들이 크게 움찔했다.

“우, 움직인다.”

“다들 조심해!”

뭘 조심해, 미친놈들아. 이렇게 온 사지를 꽁꽁 묶어 놓고선.

나를 사슬 풀린 맹수처럼 바라보는 시선들이 웃기기 짝이 없었다.

“읍, 으읍.”

입마개를 풀어 달라는 뜻으로 목소리를 내자 놈들이 소스라쳤다.

“헉, 그 능력을 또 쓰려고 한다!”

“크윽, 젠장!”

“누가 막아!”

놈들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꽁지에 불붙은 당나귀들 같았다.

‘적당히 하고 와서 입마개나 풀어라.’

그래야 협상을 하지.

나는 놈들 중 그나마 용감한 녀석이 내게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놈들이 두려운 눈짓을 주고받으며 저들끼리 속닥거렸다.

“그, 그냥 여기에 버리고 가자.”

“그…… 그럴까?”

“정체가 뭔지도 안 밝혀졌잖아. 어쩌면 실험 부작용으로 말도 안 되는 초능력자가 됐을지도 몰라.”

“그, 그래. 실험 부작용이 어디 한두 개였어? 너무 위험해. 일단 구속은 못 푸는 것 같으니, 이대로 여기 두고 멀어지자고.”

‘……뭐라는 거야, 이놈들이?’

‘내 이름은 아이린 그레이스. 이 제국의 황후다!’ 따위의 대사를 궁리하고 있던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인질 협상도 안 하고 그냥 간다고? 뭐, 나로선 고마운 일이긴 하지만…….

그러나 그때, 내 기대를 처참히 배신하는 대사가 들렸다.

“그래도 후환이 없도록 확실히 처리하고 가자고.”

“그래. 불을 지르고 도망치자!”

나는 눈을 부릅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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